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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장 묵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22.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눅 5:1-11)
◆ 게네사렛 호수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바다의 별칭이다. 갈릴리 바다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게네사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6:1), 긴네렛 (민 34:11, 수 13:27) 등이다. 갈릴리 바다는 짠물이 아니라 민물이기에 종종 호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호수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무척 크다. 폭이 12km에 남북 길이가 21km나 된다.
현대에서도 예수님 시대 때와 거의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유적지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 갈릴리 바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갔을 때, 갈릴리 바다는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일으켰다. 우리 주님께서 활동하셨던 그 바다 그대로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종종 말씀을 전하셨는데 주로 무리들은 해변에 있고, 예수님은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셨다(막 4:1),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전하셨다고 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솔직히 이 대목이 궁금했다. 내가 경험한 바다들이란 언제나 파도 소리로 시끄러운 곳이어서 배에 타서 바닷가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지순례 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갈릴리 바다에서 나는 이것을 실험하고 싶었다.
넓은 갈릴리 바다에 도착했을 때 놀랬다. 그토록 큰 바다에 파도가 하나도 없었다. 바람이 없을 때는 정말 잔잔한 호수였다. 나는 실험해 보았다. 바닷가에서 50미터 떨어진 동료에게 카페에서 조금 큰 목소리로 말하듯이 말을 건넸다. '들려요?' '들립니다' 세상에! 이게 들린단 말인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께서 배에 서서 바닷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갈릴리 바다에 가면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한 번 외쳐보라.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막 4:1-9)
◆ 베드로 결단의 시기
누가복음에는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헌신이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한 후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은 순서가 바뀌어 있다(마 8:14-17, 막 1:29-34). 아마도 마태나 마가의 순서가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이적이 이루어졌는데, 그 자리에 제자들이 있었고(요 2:1-11). 병자를 낫게 하는 이적은 갈릴리 혼인 잔치 이후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베드로가 결단한 이 사건은 기록상 뒤에 있을 뿐 사건 자체는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 본문이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아니다. 본래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소개를 받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안드레의 소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었다(요 1:40-42). 그러나 본격적으로 헌신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오늘 사건을 계기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 주님의 부르심
(10)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아마도 평생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나타나셨다. 그리고 배를 사용하시길 청하셨다. 만일 고기를 잔뜩 잡았으면 예수님의 청을 들어주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 소득이 없었던 그날, 가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만한 그날이 베드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며 전 인류 중에서 가장 최고의 부르심을 받은 날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모든 것이 실패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닌가?
배에서 말씀을 다 가르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도록 조언하셨다. 예수님은 직업이 목수였다. 목수가 어부에게 조언하다니? 수학의 난제를 가지고 쩔쩔매는 수학자에게 영어 선생이 대신 풀어주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맞고 안 맞고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내렸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자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리자 너무 고기가 많아서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 얼마나 많았는지, 양쪽 배에 모두 채웠는데, 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상상이 되는가? 이것은 제법 많이 잡힌 정도가 아니다. 황당할 지경으로 많이 잡힌 것이다. 베드로 평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획득이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주님의 경이로움을 보았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깨닫는 것이 예수님의 경이로움이다. 압도하는 그분의 신성 앞에 베드로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 이는 자신이 자격 없는 자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 순박한 어부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이 위대한 부르심(소명)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저하지 않았다.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의 인생이 바뀌었고, 이들의 헌신은 세상을 바꾸었다. 내 인생도 주님을 만나는 순간 바뀌었다. 성령이 오시는 순간 그는 좋든 싫든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거대한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도 있지만, 지극히 사소한 곳에서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도 있다. 큰 일이냐, 작은 일이냐 또는 어른이냐, 아이냐 따지지 말고 남과 비교하지도 말고, 오직 맡겨진 일에 충성할 따름이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에게도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라며 칭찬하시는 분이시다(눅 19:17).
주님, 저를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맡겨진 일의 대소를 따지지 말고, 불평하지 않으며, 평생 기쁨으로 충성하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23. 나병 들린 자를 고치심 (눅 5:12-16)
◆ 나병환자를 고치심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나병 환자들은 특별히 격리되었다. 그들은 일반인 가까이 오면 입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며 소리쳐야 했다(레 13:45,46). 유대인들은 나병 환자를 극도로 꺼려했었다. 왕조차도 문둥병이 걸리면 내쳐 칠 정도였다(대하 26:20)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대단한 장군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나병이 걸렸다. 그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와서 고쳐달라고 했을 때, 엘리사는 문 앞에 나와보지도 않고 종을 통해서 요단강에 씻을 것을 전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 몸에 터치해줄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를 만나주고 상처 위에 손이라도 흔들어줄줄 알았는데, 얼굴조차도 비치지 않고 명령만 전달하는 것에 몹시 분노했다. 그것은 가뜩이나 문둥병이 걸려서 위축된 나아만의 열등감을 더욱 자극했다. 그렇지만 자존심을 죽이고 실천한 후에 정말로 문둥병이 낫자 나아만은 몹시 감격하고 감사했다(왕하 5:15).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충분히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 직접 손을 대셨다. 나병 환자로서는 정말 가슴 뭉클한 터치(touch)다. 문둥병자에게는 이 터치가 병 낫는 것보다 더 의미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영원한 생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 응답 받았을 때 감격하는 것은 단순한 응답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반응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고, 내 마음을 만지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 예수님의 경고
(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나병이 나은 것은 엄청난 뉴스였다. 구약 선지자 엘리사 시대에나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소문이 퍼지면 중요한 사역에 방해받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최우선 사역은 병 고침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것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다.
어떤 분은 애초에 병을 고쳐주지 마셨어야지, 왜 고쳐주시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라며 트집 잡는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심은 과시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병자에 대한 긍휼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자기 병 나은 소문을 사방에 퍼뜨렸다. 절대로 잘한 짓이 아니다. 그런 간증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해야 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병자들 때문에 기도할 시간도, 제자들을 가르칠 시간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귀신같이 알아낸 병자들이 문 앞에 줄지어 서 있다면 어떨까? 예수님은 이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고자 제자들과 함께 빈들이나 산에 거하신 적이 많다.
◆ 주님의 본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무수한 병자들이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불쌍한 병자 고치는 것이 우선이지, 기도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종종 사역자들은 일에 취해서 기도하는 것이나 말씀 연구하는 것을 뒷전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그러한 행위는 결국 자기 자랑에 빠지게 하고, 점점 교만하고 메마른 사역자가 되게 할 뿐이다.
예수님은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아셨다. 결코 기도를 뒷전으로 하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면 결국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을 살펴야 한다. 주님도 기도하셨는데, 사역에 바빠서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고 하는 당신은 주님보다 더 위대한가? 기도와 말씀이 우선이다. 그 후에 사역이다. 그래야 사역도 살고, 나도 산다.
주님, 주님께서 기도하신 본이 큰 교훈이 됩니다. 우선순위를 잃지 않겠습니다.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저를 만져주십시오.
24. 중풍병자를 고치심 (눅 5:17-26)
◆ 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오늘 본문의 장소는 가버나움이다(막 2:1). 아마도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집일 것이다(눅 4:13). 가뜩이나 좁은 집에 갈릴리뿐 아니라 인근 마을과 심지어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왔으니 빈틈이 없었다(막 2:2).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의 친구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의 집에 왔지만, 도저히 들어갈 수 없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달아내렸다.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남의 지붕을 파손하고 새치기를 한 셈이다. 어떻게 이렇게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는가? 충분히 짜증이 날 만한 상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일반인과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들의 무례함보다는 오히려 친구의 우정과 그들의 믿음을 기특하게 보셨다. 주님의 평가는 이처럼 다르다.
우리도 많은 부족함과 미숙함이 있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중심에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신다. 이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가령 우리는 종종 내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전도하는 사람을 비판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실 수 있음을 잊지말자.
◆ 죄사함과 병고침
모든 병의 원인이 '죄' 때문은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의 병 원인은 '죄'였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자가 완전히 나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근본적인 죄 용서함 없이 병만 낫게 하려는 것은 이방 종교의 주술가들이나 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자,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반발했다. 당시에 죄를 사함 받으려면 소나 양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제를 부탁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생략하고 단 한마디로 사하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한 셈이다. 신성모독이다. 그리고 저렇게 말만 던져놓는 용서가 진짜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치적으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지적이 옳아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틀렸다. 인간의 논리는 그럴싸해도 오류가 많다. 오늘날 소위 학문이 깊다는 신학자들이 이런 식의 논리로 많은 신자를 엉뚱한 길로 이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3)
오랫동안 중풍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는 죄 사함 받았다는 말이 백 배, 천 배 더 쉽다. 그거야 아무도 모르니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중풍 병자에게 침대를 들고 걸어갈 것을 명령하는 것은 아무도 못한다. 그것은 실제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25). 이는 주님의 죄사함의 선언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죄사함, 하나님과의 평화 등은 심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실재하는 은총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의 완성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의 대속은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은혜이며, 죽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이다. 도대체 십자가의 죄사함의 은총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이 가능하단 말인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이 믿음을 갖자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한참 부족함에도 하나님께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엡 3:12).
주님, 죄사함의 은총을 제게 베푸셨음을 감사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늘 주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요.
25.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27-32)
◆ 세리 레위
마태복음을 쓴 마태의 다른 이름이 '레위'였다. 유대인들이 두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시로는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오늘 본문이 마태복음에는 '마태'로, 마가, 누가복음에는 '레위'로 소개되었다. 부르심 이후에 사용된 공식 이름이 '마태'인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이 '마태 (하나님의 선물)'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에 로마 정부는 유대인 고위 관리들에게 조세를 거두도록 하고, 그들은 세리를 고용하여 이 일을 수행했다. 당시에는 인두세와 같이 직접 세를 징수하러 다니는 세리가 있었고, 세관에 앉아서 통행세와 같은 간접세를 받는 세리가 있었다. 아마도 레위는 간접세를 받는 세리였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모두 싸잡아서 로마의 앞잡이로 여겼고 혐오했다. 그래서 타락한 죄인을 대표하는 부류가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녀라고 생각했다.
◆ 레위를 부르심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당시 유대인들의 세리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무릅쓰고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오늘날 많은 교인이 사람들의 평에 신경 쓰느라 일부러 유명한 교회, 큰 교회에 다닌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관심을 많이 둔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세리를 부르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암시하셨다. 사람들의 평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레위에게 다른 요구를 하지 않으셨다. 지금까지 떼어먹은 것을 다 갚고 오라든가, 삼 일을 금식해서 정결해진 후에 오라든가 하지 않으셨다. 아주 단순한 요구를 하셨다. "나를 따르라"
세리 레위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했다. 이런 능동적인 순종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일할 수 있도록 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중독에 빠져서 영적으로 무기력하다. 상당수의 성도가 술 중독, 게임 중독 등에 빠져있고, 본인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인터넷 중독, 유튜브 중독 등에 빠져있다. 설사 일이나, 등산 등 건전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엄청난 시간을 들여 몰두하는 반면, 하나님의 말씀 묵상에는 5분도 아까워한다면 분명히 그것도 중독이다.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레위가 결단을 내려서 주님을 따르기로 했듯이 우리도 결단해서 기도하는 시간,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영혼과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살릴 것이다. 아무리 주님께서 부르셔도 내가 '예'라고 하며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다.
◆ 죄인을 부르러 오심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식사하시는 것을 비난했다. 이때 주님께서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드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3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른 분이심을 드러내신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들이라면 예수님은 오히려 더럽혀진 자를 씻으셔서 깨끗게 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새인들이 병자를 피해 다니는 자들이라면 예수님은 병자를 찾아다니시며 고치시는 분이시다. 수준과 급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나아가자.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시는 분이시다!
병든 자가 몸이 좀 건강해진 후에 의사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면 얼마나 우스운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는 좀 정결해져서 나아가자고 생각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자. 그분께서 고치신다. 그분 앞에 엎드리자. 다만 병자가 고침을 받으려면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일단 자신이 병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는 자신이 스스로 고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셋째는 결단을 내려서 의사에게 나아와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구원받는 단계와 비슷하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고, 내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와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도 매일 매일 십자가의 공로와 보혈의 능력으로 새롭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한껏 위축된 죄인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세리 마태는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이 너무나 기뻤다. 자기를 제자로 불러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큰 잔치를 벌였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택을 비난했지만, 예수님의 선택은 옳았다. 후에 레위가 마태복음을 우리에게 남긴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위대한 일인가?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함으로써 우울과 자책에서 못 벗어나시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과거는 그냥 과거로 남겨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자. 아니면 백 퍼센트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또는 거대한 어떤 사역이나 내 생활이 전혀 없는 노예적 삶을 상상하지 말자. 그런 것은 누구라도 자신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로 부르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존중해주시는 분이시다.
지금 당장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 염려를 벗어버리고 범사에 감사하며, 조그마한 일일지라도 실천할 수 있는 그것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시작이다. 여전히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몹시 추상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좀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되면 그를 더욱 신뢰하고 예수님을 배우게 되며 예수님을 닮게 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잘 알게 될 것이다.
주님,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살길을 얻음은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26.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복음과 교회의 관계 (눅 5:33-39)
◆ 잘못된 기준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당시에 세례 요한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금식을 자주 했다. 주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려는 그들의 노력은 가상했다. 칭찬할만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먹었다. 없어서 못 먹을지언정 금식한 적이 없었다. 물론 제자들도 사도행전에서는 종종 금식함을 보여주었다(행 13:2). 그러나 예수님을 따를 당시에는 제자들에게 금식을 권하신 적이 없다. 이것이 바리새인들 눈에는 문제로 보였다.
바리새인들은 엉뚱한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곤 했다. 얼마나 금식을 자주하는가? 십일조를 성실하게 하는가? 구제를 열심히 하는가? 안식일을 잘 지키는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가? 언뜻 보면 그럴싸하다. 모두가 마땅한 기준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핵심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던 바리새인들(눅 18:9-12)의 종교적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어떻게 평하셨을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이것은 그들의 금식이나 종교적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종교적 행위의 목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종교적 행위의 목적이 자기 자랑, 자기 영광 추구라면 그것은 역겨운 것이다. 가령 청빈한 삶을 사는 것이야 칭찬할만하지만, 그가 그것을 자부심으로 삼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그의 청빈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에 우린 자주 빠진다. 금식해보면, 나는 배고파서 고통스러운데, 다른 사람들이 때마다 열심히 먹을 것을 찾아서 먹는 것을 보면 정말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우며 신앙이 없어 보인다. 내가 잘하는 분야를 기준으로 삼고 남을 판단하는 이 어리석음이란 참 근절하기 어렵다. 그 뿌리는 '자기 자랑', '자기 영광 추구'라는 원죄에 깊이 박혀있다. 아마도 내가 잘해서 받는 칭찬보다는 남을 판단함으로써 받는 책망의 무게가 수십 배 더 클 것이다(눅 18:14).
주님, 이런 오만과 어리석은 판단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칭찬할만한 여러 종교적인 행위가 자기 자랑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일이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옷을 찢어서 낡은 옷을 수리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멀쩡한 새 옷을 찢을 뿐이고 낡은 옷에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둘 다 망가뜨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교훈은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정신이 번쩍 나게 하시는 교훈이다.
오늘날 기독교를 유대교에 욱여넣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목사를 제사장으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주일을 안식일로, 세례를 할례로 생각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구약 시스템에 신약 교회를 욱여넣었다. 이것은 신약 교회도, 구약교회도 아니다. 그냥 구약교회 짝퉁 교회일 뿐이다.
성령이 오신 후로는 더는 건물이 성전이 아니고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이 성전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들판에서 모이면 거기가 성전이고 집에서 모이면 거기가 성전이다. 제사장도 마찬가지다. 구약에서는 백성이 제사장을 통해 나아갔지만, 이제는 성도 모두가 제사장이다(계 1:6).
성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할례는 '거듭남'이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며 영적인 할례다.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과정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회관이 짝퉁 교회관이라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저 구약 성경을 모방하고 있으니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고 착각한다.
◆ 올바른 교회관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사람들은 묵은 포도주를 좋아한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보수적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두려워한다. 옛것을 따르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새 포도주가 나왔을 때, 그것은 헌 부대에 넣으면 안 된다. 그러면 둘 다 잃는다. 복음은 율법과는 다르다. 새로운 틀이고, 새로운 내용이다. 복음은 새 포도주다. 그리고 신약 교회는 새 부대다. 따라서 복음을 구약 교회 시스템에 욱여넣으면 안 된다. 그러면 복음이 훼손된다.
구약교회 일원이 되려면 매년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예배와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 그러니 복음을 어떻게 구약교회 시스템에 넣겠는가? 구약교회에서는 제사장이 아닌 자가 제사를 드리면 불법이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성도를 제사장이 되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러니 어떻게 구약교회에 복음을 담겠는가?
구약교회에서는 양과 소로 속죄제를 드렸다. 그러나 신약교회에서는 오직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다. 저것이 그림자라면 이것은 실체다. 저것이 육체적이라면 이것은 영적이다. 이러니 어떻게 복음을 구약교회에 담겠는가?
오, 이렇게 진리가 자명한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구약교회를 선호하고 부러워하며 본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럴싸한 모방품 교회를 좋아한다. 목사가 제사장이니 목사만이 성찬을 인도할 수 있고 목사만이 축도할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구약 모방품인 것은 알고 있는가?(민 6:24, 고후 13:13) 도대체 언제부터 신학교 졸업장이 제사장 권위의 근거가 되었는가? 세속화도 이런 세속화가 없다.
헌금을 제사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둔갑시키고 각종 절기와 날도 기독교식으로 비슷하게 만들었다. 정말 근사하다. 그러나 유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조잡한 짝퉁일 뿐이다. 적어도 초대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을 부러워하고 시기했는데(행 13:45), 오늘날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복음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교회관도 중요하다. 복음과 교회는 무척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주님께서 죽으심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심일진대, 우리가 어떻게 교회관을 가볍게 생각하겠는가? 부디 올바른 교회관 지식을 가지려고 힘써라. 신약교회는 구약교회를 모델로 하면 안 된다.
주님, 제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대로 분별하고, 제대로 실천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