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한수(金漢洙) - 개척자의 고난과 영광
9. 내조자 아내의 노고
1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부인의 해산 일이 가까워 왔다. 너무 굶주려서 병이 들어 몸은 퉁퉁 부어 제대로 해산할 것 같지 않았다. 마침 산파일을 하고 있는 교회 집사 한 분을 알게 되어 우리가 전도 나온 취지와 목적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니,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나오신 분들인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외상으로 그것도 약값 5백 원만 받고 돌보아 주겠다는 언약을 받았다. 여간 감사하지 않았다.
2 드디어 1963년 7월 31일 해산을 하였다. 산모를 위해 쌀 한 말을 마련해 놓았으나 예정일이 훨씬 지나 해산했기 때문에 그간 다 먹어버렸고, 죽조차 끓일 쌀 한 되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남은 책 몇 권을 팔아서 우선 죽을 한번 끓여 주었지만 대책이 막연했다.
3 세 끼를 굶고 난 산모는 정신을 잃었고 옆에 아기는 울고 있었다. 협회본부와 지구본부에서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염려하실까 하여 되도록 이 고생스러운 생활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고가는 식구들에 의해 보고가 되었던 모양이다.
4 당시 지구본부도 옥수수죽으로 연명을 할 때였지만 황환채 지구장님께서 쌀 한 말과 나무 한 단을 사주셨다. 이기재 씨도 보다 못해 자기 집에 가서 미역과 쌀 두 말을 가지고 와서 우선 어려움은 면했지만 그길로 산모는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자주 정신을 잃는 혼수상태의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
5 더 버틸 수가 없어 나는 마침내 동네에 자리 잡고 있던 문익상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이 모든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 의사가 하는 말이 평생에 외상 왕진하여 치료해 본 일은 없지만 젊은 청년의 그 씩씩한 모습을 보아서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며칠간 치료를 받은 산모는 차츰 회복되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6 세월은 흘러 어느덧 추석이 다가왔다. 모든 사람들은 추석 준비에 분주했지만 우리는 내일 아침 끼니를 어떻게 연명하느냐가 문제였다. 저녁 일찍 문을 닫고 누워 있으니 창가에 스며드는 보름달은 유난히도 밝아서 실신하다시피 누워 있는 산모의 창백한 모습을 비추었고 천지를 모르고 누워서 발 장난만 치는 어린 생명의 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그 아기의 이름은 해식이었다.
7 지금 숙성한 맏딸을 쳐다보노라면 그때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소리 죽여 불러보며 나의 신앙을 다지고 있다. 고생 가운데 낳은 아기라서 튼튼하게 잘 자라라고 선생님께서 심을 식(植) 자를 붙이셨다고 후일 최원복 선생님께서 전해 주셨다.
8 해식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철없던 학생 식구들도 교회 살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도의 문도 열리기 시작하였다. 10여 명의 학생들은 아침 등교 시에 교회에 들려 기도를 드린 후 자기들이 먹어야 할 점심 도시락을 갖다 놓고는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 다시 교회에 와서 강의를 듣고 빈 도시락을 가지고 갔다.
9 혹시 학생들이 몸이라도 아프면 한창 자라날 때에 제대로 먹지 못하여서가 아닌가 생각되어 가슴이 아플 때가 있었다. 얼마 후 학생 식구 50여 명, 청장년 식구가 30여 명으로 늘어나자 교회는 늘 사람으로 붐볐으며 다시 5만 원의 헌금을 하여 넓은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청년 식구들을 양성하여 각 구역으로 배치했는데도 지역본부엔 항상 청년들이 10여 명씩 나왔다.
10 다시 식구들의 헌금으로 전세 8만 원의 집을 얻어 교회를 옮겼으며 부흥회를 자주 하고 식구도 늘어나 교회는 늘 차고 넘쳤다. 1966년 1월 27일, 협회장님께서 주시는 전도상을 경남에서 내가 받게 되어 정말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1968년 2월 5일에는 7년노정대상을 받았다.
11 어느덧 김해지역에 부임한 지도 5년 4개월이 흘렀다. 식구는 90명으로 늘었고 학생 부흥이 잘되어 70~80여 명이 항상 교회에 와서 강의를 들었으며 이들이 교회 운영까지 전담하게 되었다. 더욱이 피와 땀을 같이 흘리면서 정성을 들이던 이들, 그중에서도 도시락 클럽들의 정성을 잊을 수가 없다.
12 한편, 승공 강의에 힘을 쏟은 결과 각 기관과 협조가 잘 이루어졌으며 도지사 상을 비롯한 여러 장의 표창장을 받게 됐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