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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도피처
True Refuge
타라 브라크
[6]
자기 몸에 깨어나기
너를 관통하여 흐르는 에너지를 신뢰하여라.
신뢰하여 더 깊이 굴복하여라.
에너지가 되어라.
어떤 것도 밀어붙이지 마라.
모든 감각을 좇아서,
그것들의 뿌리,
광대하고 순수한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다나 폴드
여기 이 몸에 거룩한 강들이 있네.
여기 해가 있고 달이 있고
모든 순례지가 있네.
내 몸보다 복된 다른 신전(神殿)을 나는 모르네. -탄트라 노래
내가 물었다. “그 답답함이 어떻게 느껴져요?” 제인은 한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모든 게 막혔어요. 아무것도 나오거나 들어갈 수 없어요. 두꺼운 담요로 가슴을 동여매놓은 것 같아요.”
한 주간의 코스 명상모임 사흘째 되는 날 제인이 내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 눈을 마주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짧게 자른 갈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러 해 전부터 이 모임에 올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더는 견딜 수 없겠어서 이번에 신청했지요. 아무래도 내가 걱정이 너무 많거나 기력이 다 빠진 것 같아요.” 그녀는 10년 넘도록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하지만 경쟁을 부추기는 직장생활이 갈수록 무의미해졌고 서서히 자기 내면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은 명상이 나를 좀 더 생기 있게 살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했지요.” 그런데 지금 제인은 여기 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잘못 온 거 같아요. 오늘 아침 모임에서 사람들은 자기 가슴이 열렸다고, 자기 안에 묻혀있는 슬픔을 보았다고, 뭐 그런 얘기들을 하던데 그런데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내 마음이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알아차리고 호흡을 따라가며 지켜보았지만 그저 답답하기만 하더군요.”
내가 물었다. “그 두꺼운 담요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어요?” 그녀가 외마디 소리로 외치듯이 “싫어요!” 하고는 나를 슬쩍 쳐다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전에 심리치료사가 말하기를 사물을 느끼지 못하는 가슴이 내 삶을 죄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뭘 추구하는지도 알 수 없어요. 내 속에 잡동사니들이, 내가 원치도 않는 쓰레기들이 있다는 건 나도 알아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도무지…”
내가 말했다. “제인,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해요.”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신은 당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인식했고 그것에 이름까지 붙여줬어요. 그게 바로 명상의 핵심이지요.”
나는 그녀에게 방금 ‘레인’의 ‘인식하기’(‘R’) 단계를 밟았으니 다음 단계인 ‘그냥 두기’(‘A’)로 넘어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다. “좋아요. 이제 생각을 멈추고 당신 몸에 의식을 집중하는 겁니다.” 한참 기다렸다가 물었다. “지금 당신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요?”
몇 차례 다리를 꼬며 자세를 고쳐 앉다가 제인이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보다시피… 난 지금 편치 않아요. 여기 이렇게 앉아있기가 힘드네요. 집에서 명상하려고 앉아 있을 때도 이랬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정리하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있고 싶은 거예요. 명상하려고 앉아있는 것만 아니면 뭐든지…”
내가 말했다. “불편하지요? 지금 당신의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불편함이 거기 그렇게 있도록 놔두고… 그리고 그것을 탐색할 수 있겠느냐고요.” 제인이 약간 웃었다. “예, 물론.” 내가 물었다. “좋아요. 자, 당신 몸 어느 부위에서 그 불편함이 가장 심하게 느껴지나요?” 제인이 깊은 숨을 쉬면서 한동안 눈을 감고 앉아있더니 앞가슴 명치 바로 위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내가 말했다. “제인, 지금 당신 손이 닿아있는 자리에 의식을 모으세요. 그리고 거기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말해줘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 바로 여기가 떨려요. 기분이 아주 고약해요.”
나는 그녀에게 이것이 바로 ‘레인’의 ‘탐색’(I)이라고 말해주었다. “오케이, 그 불쾌한 느낌이 거기 있게 그냥 놔두면 어떻게 되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잠시 살펴보세요.” 그녀의 손이 가슴에 얼어붙은 듯 멈춰있는 걸 보면서 말을 이었다. “손을 그 자리에 얹어두세요. 그리고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겁니다.”
제인은 손을 가슴에 대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분 남짓 앉아 있다가 나를 흘낏 보고는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모든 것을 포기한 투로 말했다. “처음에는 불안하게 떨리는 느낌이더니 그게 사라지고 다시 답답해졌어요.” 잠시 멈추었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역시, 나는 안 되나 봐요. 아무런 느낌도 없네요.”
기계적 반응의 사슬
내가 수련모임이나 상담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제인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자기가 삶에 연결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또는 자신이 두려움, 분노, 증오 따위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의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아니면 그것들이 아예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혼수에 들어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삶을 온전하게 살아내지 못한다.
불교와 서양 심리학 모두 감정적 반응의 혼수(昏睡)가 기계적인 반사작용(reflex)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좋거나 나쁘거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으로 본다. 갓 구워낸 과자, 그건 보나마나 좋은 것이다. 방금 있었던 논쟁에 대한 생각, 그건 불쾌하니까 나쁜 것이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 그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우리는 ‘좋은’ 것을 붙잡으려 한다. 그래서 갓 구워낸 과자를 사서 먹는 모습을 상상한다. ‘불쾌한’ 것은 그에 저항하거나 피하려 한다. 방금 있었던 논쟁을 생각하면 몸이 긴장되고 화가 난다.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것은 무시하거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려버린다.
이와 같은 정신적 정서적 반응이 반복될 때 그래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될 때 우리는 그것들과 자기를 동일화하기 쉽다. 예를 들어, 마음이 맛있는 과자―과자가 먹고 싶은데 당장 먹을 수 없는 상황―에 집중될 때 우리는 필요한 것을 채워주지 못하는 자아(wanting self)가 자기라는 함정에 빠진다. 마음이 방금 한 논쟁―상대의 말에 입은 상처와 그에게 해주지 못한 말―에 집중될 때 우리는 공격당해서 화가 난 자아가 자기라는 함정에 빠진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과 느낌들이 하나의 고리를 짓기 시작하는데 자기를 화나게 한 것을 생각할수록 그만큼 더 화가 나고 화가 나는 그만큼 분노에 찬 생각들을 더 하게 된다. 이렇게 기계적인 반응의 사슬에 묶여 혼수상태로 들어가서 참 자아에 대한 그리고 자기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에 대한 더 깊고 더 넓은 감각들이 마비되는 것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감각(感覺)에 마음 모으는 것으로 혼수에서 깨어나기를 시작한다. 감각은 우리가 삶(생명)을 경험하고 그것에 연결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들이다. 우리의 다른 모든 반응들―생각에 대한, 바깥 상황에 대한, 사람들과 감정들에 대한―이 몸의 감각에 따라오는 반응들이다. 무슨 일로 화가 날 때 우리 몸은 그로 말미암아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반응한다. 무엇에 마음이 끌릴 때 우리 몸은 호기심 아니면 욕심을 신호로 보낸다. 그 모든 감각의 바탕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을 이루고 있는 생각과 느낌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끊임없이 휘말려들 것이다.
바탕에 닿기
내가 명상수련 방법으로 배운 것들 가운데 하나가 태국 불교 스승인 아잔 붓다다사의 “너를 너한테서 떨어뜨려놓는 어떤 짓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몸은 언제나 현재를 산다. 당신 몸에 깨어있을 때 당신은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살아있는 현존에 연결된다. 몸을 알아차리는 것이 현존하는 진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참된 도피처로 들어가는 그 문이 붓다 자신의 깨달음에 결정적인 것이었다. 보리수나무―깨달음의 나무― 아래 자리 펴고 앉았을 때 싯다르타 고타마는 해탈을 얻기 전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마음을 모으고 생각을 비우면서 완전한 현존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의 방법이었다. 그때, 이야기에 따르면, 무시무시한 무기와 마법의 힘을 지닌 마라가 군대를 이끌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마라는 유혹하는 자(temper)다. 그 이름이 팔리어로 ‘현혹’(眩惑)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는 고타마 자신의 ‘그림자 자아’(shadow self)로 볼 수 있다. 마라의 의도는 고타마를 계속 혼수상태로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라는 고타마로 하여금 일어나서 싸우거나 도망치게 하려고 밤새도록 바윗돌과 화살과 끓는 진흙덩이를 퍼붓고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타마는 모든 것을 자애로운 현존으로 맞이하였고 온갖 무기들을 천상의 꽃으로 바꿔놓았다. 그러자 마라는 자기 딸들인 욕망과 탐심을 보내어 요염한 자태로 고타마를 둘러싸게 했다. 그래도 고타마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오자 마라는 최후의 무기―의혹―로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마라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으로 네 자비를 증명할 것인가? 네 마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무엇으로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마라의 목표는 고타마로 하여금 자기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작은 자아’에 낚여 그것으로 기계적 반응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었다.
고타마는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명상으로 닦은 실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땅(바탕)에 손을 대고서 자기의 자비를, 참 자기가 누군지를 증명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땅이 진동하며 큰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너를 증명한다!” 그러자 마라와 졸개들이 겁을 먹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자기가 땅(바탕)에 속해있음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 고타마는 붓다―깨어난 이―가 되어 해탈하였다. ‘살아있는 전체’(living wholeness)를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동떨어져 존재하는 혼수(昏睡)의 마지막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붓다의 해탈 이야기는 우리를 근본적이고 놀라운 세계로 초대한다. 자신의 살과 피, 호흡과 공기, 자기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 자기 집인 땅에 연결되어 자기의 ‘생명기운’(aliveness)에 귀의(歸依)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도 붓다처럼 치유되어 깨어날 수 있다. 우리 몸의 살아있는 감각에 현존할 때마다 우리는 존재의 바탕(ground)에 가서 닿는다.
몸 안으로 들어감
제인으로서는 감각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모임이 끝나기 전, 명상하는 동안 몸이 안에서 밖으로 어떻게 살아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라고 권하였다. “눈을 감아요. 두 손에서 힘을 빼고 양쪽 무릎 위에 가만히 얹어놓아요. 자, 이제 당신 손바닥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느껴보는 겁니다. 거기에서 두근거리는 생명기운이 느껴지나요? 손바닥에서 맥박이 느껴져요? 거기가 서늘한가요? 아니면 따뜻해요? 무릎에 올려놓은 손의 무게가 느껴집니까? 손가락은 어디에 닿아있지요?”
제인은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가 말했다. “이제 같은 생명기운을 발바닥에서 느껴봅시다. 거기에서 두근거리는 맥박이나 진동을 느껴보는 거예요.” 조금 있다가 그녀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바로 그 생명기운이 당신 온몸에 두루 퍼져있어요. 이제 감각의 렌즈를 확대하여 몸 전체에서 생명기운을 느껴봅시다. 그 느낌이 기분 좋을 수도 있고 불쾌할 수도 있지만… 그냥 그것들은 왔다 가게 내버려두고, 당신 숨결이 어떻게 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지 느껴보세요.”
제인이 눈을 떠 나를 보았을 때 그 눈길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밝아진 것 같았다. 그녀가 주변 사물들―촛대, 시계, 휴지통 등―을 생전 처음 보듯이 둘러보면서 말했다. “타라, 몸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손바닥과 발바닥에서는… 그리고 숨결에서는 느낌이 확실히 있었어요. …음…실제로 거기에 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누구든지 몸의 감각에 마음 모으기 수련을 할 때 처음에는 배, 가슴, 목구멍의 감각들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계속해서 꾸준히 수련하면 온몸의 감각을 알아차리게 된다고 제인에게 말해주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제인은 손과 발의 감각에 집중하다가 차츰 몸의 다른 부위들에서 느껴지는 감각에도 마음을 모았다.
나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안, 슬픔, 증오, 분노 같은 것들이 마음을 힘들게 할 때 자기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라고, 그러면서 감정들 밑으로 일어나는 몸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도움을 주려면 호흡에 집중하라고 말해주었다. “특히 불쾌한 감정이 일어날 때 호흡은 안전한 집이 되어줄 수 있어요. …아주 좋은 동료지요.”
마음 모아 몸의 감각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레인’ 수련의 기본이다. 나는 사람의 마음상태가 생각으로 바뀌기 전에 어떻게 몸의 감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지 그것을 제인이 알았으면 했다. “당신의 모든 경험이 당신 몸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 경험들에 접촉하는―몸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것이 당신을 좀 더 바탕에 깨어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그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두터운 담요 같은 느낌까지도?” 내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것까지!” 나중에 제인도 알게 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정확하게 치유로 들어가는 문(門)일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이 격하게 느껴질 때
여러 해 전 비파싸나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받은 지침은 늘 같은 것이었다. 호흡에 마음을 모으되 격한 느낌이나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에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무섭거나 화가 날 때도 그러라고 했다. 많은 학생들에게 이 방법이 값진 깨달음을 가져다주었지만 치유되지 않은 커다란 상처가 있는 사람들한테는 오히려 해(害)가 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보다 격렬한 감정에 휩쓸려 자포자기 상태로 되면서 되살아난 과거 경험이 그들에게 무력감과 공포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내가 제인에게 자신의 홈 베이스인 호흡에 집중하라고만 일러준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여기 있었다. 그녀의 ‘답답함’이 그녀의 무엇을 보호하려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픔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시도는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경우 그것이 주는 두려움이나 생생한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강력한 자기-보호 방편이다. 하지만 상처가 낫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으면 거기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에너지가 우리 몸의 신경계나 조직계 안에서 계속 작용하게 된다. 그것들이 기회만 닿으면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자기를 표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느낌들을 기피하려고 몸을 긴장시키거나 답답하게 하거나 좋지 않은 생각을 하거나 중독된 행동을 반복하거나 공격적인 자세를 갖추게 된다. 몸의 감각에 마음을 모으다보면 자기-보호 전술이 해체되면서 자기분열의 격한 에너지에 휘말려들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해체과정’이 치유의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마음 모으기 에너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난날의 상처를 덧나게 하여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중에는 심한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인의 말대로, “안에 쓰레기가 쌓여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피해온 상처들에 연결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 자기 안에 묻혀있는 것들에 의도적으로 자기를 열어놓으면 혹시 정서가 마비되거나 기능을 상실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명상하는 것이 자기한테 옳은지를 묻는다.
이 중요한 질문은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렇다 할 분명한 명상법이 없을 때 몸의 감각에 마음 모으기를 하려면 충분한 안전성, 다른 말로 하여 몇 가지 안전한 도피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하였다. 마음 모으기와 트라우마 치료를 병행하려면 실력 있는 명상교사나 심리치료사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심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의 경우 함께 명상하는 모임이 있거나 믿을만한 친구나 심리치료사 또는 명상교사가 있으면 그들한테서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제인과 작업을 함께 하면서 나는 그녀가 나를 신뢰하는 만큼 용기를 내어 자기 경험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강력한 사랑의 도피처들 가운데 하나를 나는 “믿음직한 동료의 존재”라고 부른다.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챙겨주는 다른 누구의 현존은 우리 안에 있는 격렬한 에너지를 담아주는 ‘컨테이너’로 될 수 있다.
안전성에 대한 감각은 우리 안에 있는 재료들―몸과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의식을 집중하는 명상기술―을 배양하는 만큼 커진다. 여기서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현존할 수 있게 해주는 수련에, 그 진실에, 도피처를 마련한다. 예컨대 나는 제인과 함께 명상을 시작하면서 기분 좋거나 불쾌하지 않은 감각을 먼저 느껴보라고 권하였다. 이 기술에 익숙해지면 마음이 안정되고 차츰 자기 몸의 감각을 안전한 장소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의 닻(호흡)을 안전한 홈 베이스로 삼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격렬한 감정이 솟구칠 경우에도 스스로 자기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아야 했다. 나는 좀 더 상대하기 어려운 감정들에 자기를 열어놓을 때에도 그것(호흡)이 ‘좋은 동료’로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최근에 나는 이라크에서 복무했다가 전후-트라우마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젊은이와 상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발바닥 말고는 몸의 모든 부위에서 공포가 느껴지는 심각한 상태였다. 우리는 함께 작업하면서 두 개의 닻을 마련하기로 했다. 하나는 발바닥의 감각이었고, 그것이 그를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사랑어린 우주가 보호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주문(呪文) 또는 성경구절을 외는 것이었다. 여러 달 동안 그의 기본 수련은 주문을 속으로 거듭거듭 외면서 자기 발이 땅에 닿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섯 달이 지나자 그의 몸과 마음이 차츰 안정되었고 발바닥 아닌 다른 부위에서도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일컬어 “내가 다시 온전하게 살아있는 느낌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고 했다.
내가 지도하는 주말 명상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한 여성은 스스로 ‘불안의 목조르기’라고 부르는 ‘그것’으로 고생이 심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것’과 접촉하는 법을 배웠고 차츰 격렬한 감각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불안의 강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움켜잡음, 뒤틀림, 쓰라림에 자기를 열어놓았다. 그런 다음 강에서 걸어 나와 강둑에 앉아있는 자기를 상상으로 그려보았다. 그렇게 하여 자기 감각들에 의도적으로 깨어있는 순간들을 경험해보았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며 밖에서 들리는 소리, 공중에 떠다니는 냄새, 방 안의 허공과 그것을 가득 채운 공기, 자기 몸으로 드나드는 숨결, 엉덩이를 받쳐주는 의자의 쿠션 등을 감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그녀는 집중의 반경을 넓혀 자기를 움켜잡고 있는 불안까지,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앉은자리에서 강으로 걸어 들어가 거기 있는 불안을 직접 만나고 다시 걸어 나와 고요하고 넓은 강둑에 앉아있기를 여러 차례 반복할 수 있었다. 차츰차츰 그녀는 무섭기만 했던 자기 안의 에너지들이 티베트 불교 스승 최걈 트룽파가 말하는 “쓸모 있는 물건”인 줄을 알게 되었다.
육체의 아픔에 관해서도 정서적 아픔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학생들은 통증이 심해서 참을 수 없으면 명상을 중단해도 되는지 물어온다. “왜 이 지독한 편두통을 자원해서 앓아야 하나요?” “이 구역질과 복통을 참고 견뎌야 합니까?” “몸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이 짓을 해야 하나요?”
간혹 ‘아픔’(pain)이라는 관념 자체가 어떤 경험이 나쁘거나 너무 심하다는 추정(推定)의 산물일 경우가 있다. 아픔의 문제를 다룰 때 나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아픔’이라는 찌지를 달아준 감각들의 춤을 탐색해보라고 권한다. ‘아픔’이라는 ‘단단한 관념’ 밑에는 끊임없이 바뀌는 경험들―불타오르고 뒤틀리고 콕콕 찌르고 쿡쿡 쑤시고 압박하고 쓰리고 찌르는―의 무도(舞蹈)가 있다. 그 모든 감각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움직이고 사라지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더 심해지다가 덜 심해지는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경험들을 덜 자기 개인의 것으로 삼을 수 있고 그리하여 현존하는 당신 감각의 울타리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불쾌한 감각들을 탐색하기 전에 집중의 폭을 넓히라고 권할 때가 자주 있다. 통증이 우리의 초점을 좁혀서 다른 감각들을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몸의 나쁘지도 좋지도 않거나 기분 좋은 감각들을 스캔하면서 잠시 그 감각에 머물러 있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런 다음 그런 감각들과 불쾌한 감각들 사이를 오가며 탐색하는 것이다. 아니면 불쾌한 감각들에 휘말려들거나 저항하지 말고 그것들과 더불어 현존하는 좀 더 확장된 깨어있음에 자신을 열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픔에 집중하다가 오히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빚는 수가 있다. 그러기에 마음이 흥분되거나 혼란스러워질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이 좋다. 그러고서 집중 대상을 바꿔 호흡에 마음을 모으거나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주문을 외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평정이 회복되면 다시 부드럽게 좀 전의 집중으로 돌아간다. 아니면 아예 자리에 더 앉아있지 말고 마음을 모아 다른 방법―걷기 명상, 스트레칭, 차 한 잔 등―을 찾아본다.
고통스러운 감각과 더불어 현존하는 것은 인내력 테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성공했음을 증명해야 하는 또 다른 영역이 아니다. 때로는 안정된 바탕을 마련하고 좀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방편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통증이 심할 경우에는 30초나 1분 정도만 그것과 더불어 현존하는 방법도 있다. 언제나 유념할 것은 당신이 어떻게 통증과 ‘관계’를 맺느냐다. 도피처는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친절하고 부드럽게 받아들여 그것과 더불어 현존하는 지금 이 순간에 그것은 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인생
제인과 만난 지 이틀 뒤, 그녀가 자기 몸의 기분 좋은 감각과 불쾌한 감각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되었다고 쪽지를 보내왔다. 다음 날 늦은 오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녀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그날 오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늘 거리가 있었고 불편한 관계였지요. 어머니는 싱글 맘이었고 대학교수였고 당신 일에 늘 분주하셨고 그래서 내가 집안에 없는 걸 더 좋아하셨습니다.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별로 슬프지 않았어요. 명상 도중에 두터운 담요로 둘러싼 것처럼 답답함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나와 어머니, 나와 다른 모든 것 사이에 쳐진 담요 같은 것이었지요.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답답함과 무거움을 거기 그냥 있게 놔두고 그것이 어떻게 내 몸 안에 있는지 느껴보려고 했어요.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왔고 그래서 자꾸 침을 삼켜야 했지요. 그때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일이… 그게 생각나는 것이었어요.
“일곱 살 때였지요. 가슴까지 흘러내리는 금발머리 소녀인 나는 내 머리를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예쁜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아름다운 공주처럼 맴돌며 춤을 췄지요.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어머니는 내 머리가 ‘꼴불견’(nuisance)이라면서 함께 미용실에 가자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녀가 말하는 꼴불견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어요. 내 머리를 애완견 가게의 강아지처럼 가꿔주는 것 자체가 학생들 페이퍼에 점수를 매겨야 하는 당신한테는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었겠지요.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닫힌 문 안에서 혼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나는 울며불며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그냥 길게 기르겠다고 떼를 썼지만 어머니는 나를 억지로 차에 태우며 이제 꼬맹이 티를 벗을 때가 되었다고 하셨지요.
“미용사는 내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알면서도 웃으며 말했어요. ‘여름엔 시원할 게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내 긴 머리를 잘랐지요.” 제인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머릿결을 쓰다듬듯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날 예쁜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내 생각이나 느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내 안에 있는 무엇이 알았어요.” 제인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입은 다물어졌고 무릎 위의 손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쳐버린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그때부터 내 안에 있는 무엇이 살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 같아요.”
제인이 다시 말을 이었을 때는 목소리가 겨우 들릴 정도로 여리고 작았다. “타라, 아시겠지만 여태 나는 그녀(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다)처럼 살았어요. 기쁨을 모르는 인생, 일에 몰두하고 늘 긴장해 있고 가슴이 메마른 여자. 아빠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문을 닫아걸었지요. 그러고는 자신의 상처와 욕구를… 내 것까지…모두 모르는 척 외면했어요.” 제인은 방금 말한 것을 스스로 되새기듯이 잠간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나도 문을 닫아걸었지요. 이제 내가 무엇을 겁내고 있는지 알겠어요. 그녀처럼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채 죽을까봐 그게 무서운 겁니다.”
칼 융은 “그들의 환경에, 특히 어린아이들의 환경에,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부모의 인생만큼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다.”고 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인생의 외부 영역(outer domain)에는 교육, 경력, 인간관계 부문에서 자기 능력을 펼쳐보지 못한 것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본인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살아보지 못한 인생의 내부 영역(inner domain)이다. 여기서 우리는 충분한 경험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의 갈망과 상처, 열정과 두려움의 거친 감각들을 만나게 된다. 자기 경험을 밑받침해주는 에너지 바탕에서 강제로 떨어뜨려질 때 우리는 삶의 진실에 등을 돌린다. 그리고 겁나는 흥정을 한다. 자기 아픔을 스스로 충분히 경험할 수 없는 그만큼 다른 사람과의 친밀하고 진실한 교제를 가능케 해주는 사랑까지도 경험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의 세계와 자기를 연결시켜주는 감각적 생명기운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그래서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 아직 남아있을 때 자기 자신과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보살펴줄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무시하려고 하는 그것은 제 방에 던져진 아이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다. 당신은 귀를 막고 방구석에 처박혀 바리케이드를 칠 수 있다. 하지만 당신 몸과 무의식은 그것을 잊지 못한다. 당신은 긴장하거나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아니면 제인처럼 남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거나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힘들어할 것이다. 또는 당신이 감당해야 하는 모든 일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당신은 당신 맘대로 자연스럽게 살지 못한다. 당신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당신의 절망하는 아이한테 몸과 마음이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무시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지만, 그래서 가슴을 두터운 담요로 답답하게 감싸보기도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와의 결속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질 뿐이다. 당신의 참 자아―당신의 정체―가 당신 삶의 중요한 부분을 밀쳐버리거나 그로부터 도망치려는 이런저런 경험들로 뒤범벅되어 있는 것이다.
제인은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머리를 강제로 잘리던 날의 슬프고 아픈 상처를 묻어버리려고 자기를 두터운 담요의 답답함 속에 가두었다. 하지만 그녀 안에 있는 무엇이 그녀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이리 와서 네 인생을 꽉 채우며 살아보라고! 그녀는 몸의 감각들을 통하여 자기 존재의 바탕에 접촉함으로써, 그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문을 조금씩 열어나갔다.
몸을 통해서 다시 삶으로
제대로 한번 살아보지 못한 채 죽는 데 대한 두려움을 말하고 나서 제인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나는 그녀에게 ‘레인’ 수련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다. “좋아요. 이제 그 두려움이 당신 몸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그녀가 자기 가슴을 가리키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말했다. “그것이 당신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나요?”
제인은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고는 숨을 깊이 쉬고 말했다. “발톱으로 가슴을 할퀴고 찢는 것 같아요.” 나는 그 감각들이 그냥 거기 있으면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스스로 말하게 놔두라고 했다. 그녀가 심호흡의 도움을 받으며 말했다. “발톱이 내 가슴을 찢어서 열어놨어요. …몹시 뜨거워요. …외마디 소리가 들려요. …저건, 저건 내 목소리에요. 엄마한테 소리 지르고 있어요.”
“제인, 그 목소리가 그냥 말하게 놔둬요.”
처음에는 눈을 질끈 감고 자기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는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미워! 왜 이래? 왜 내 머리를 엄마 맘대로 자르는 거야? 어쩌면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제인이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내가 귀찮았던 거야. 당신한테 나는 일을 방해하는 성가신 딸이었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고.”
제인은 자기를 껴안고 몸을 떨면서 계속 울었다. 나는 그녀에게 울고 싶은 만큼 울되 할 수 있거든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보라고 했다.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찌르는 것처럼 아픈 상처예요.” 1, 2분쯤 뒤,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말을 계속했다. “저 깊은 데가 …쓰라림 …아림 …슬픔.” 흐느낌이 잦아들었고 우리는 침묵 속에서 한동안 함께 앉아 있었다. 물을 조금 마신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타라, 방금 가만히 앉아 있는데 슬픔이 달콤하고 평화로운 에너지로 바뀌더니 그 에너지로 온몸이 진동하는 것 같았어요. 내가 옹글게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난생처음으로. 그러자 전에 듣지 못했던 음성이 부드럽게 속삭이며 이 생명기운 속에서 살라고 나를 축복해주는 것 같았어요. 그 속삭임이 참된 나한테서, 오랜 세월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는 살아있는 영(living spirit)한테서 오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어요.” 제인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영을 신뢰하고 진정한 나인 그와 연결되어서 살고 싶어요.”
이렇게 제인은 참된 도피처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세밀하게 깨어서 자기 몸의 감각을 탐색함으로써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자기 인생 속으로 작은 구멍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마침내 지혜롭고 희망에 찬 음성이 그녀의 깊은 데서, 오랜 세월의 힘들고 괴로웠던 잠에서 깨어나라고,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 자신을 우주에 심다
20세기 초, 시인 D. H. 로렌스는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산업주의에 약탈당한 풍토 속에, 마음과 몸의 철저한 괴리로 몸살을 앓는 문화 속에, 던져져 있는 자기를 보았다. 1931년에 출판된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그 절박함이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관계의 문제다. 우리는 관계 속으로, 코스모스(질서와 조화의 우주)와 유니버스(삼라만상의 우주) 사이의 서로를 살아있게 해주는 관계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자신의 더 큰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 채 우리 속을 길러주고 새롭게 해주는 근원으로부터, 유니버스 안에 영원히 흐르는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치명적으로, 인류가 죽어가고 있다. 뿌리 뽑힌 나무처럼, 뿌리를 허공에 드러낸 나무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유니버스에 심어야 한다.
몸에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를 인생의 다른 모든 것에 연결시켜주는 우리 존재의 뿌리로부터 단절된다. 뿌리 뽑힌 나무를 상상해보면 소속에서 단절된 존재의 고통, 부자연스러움, 부당함이 느껴질 것이다. 뿌리 뽑히는 경험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제인은 그것을 “내면의 죽음”으로 느꼈고 매일같이 기계처럼 그것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자기가 살아있지만 산 것 같지 않고 인생의 거죽을 핥고 있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위험한 무엇이 자기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사람이 삶의 고달픔에 지쳐 천길만길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을 호소한다. 그렇게 계속되는 고통과 긴장으로부터 달아나고 현존하는 순간의 삶에서 멀어지려면 적지 않은 에너지가 소모되어야 한다. 어떤 가짜 도피처도 그 빈 곳을 메워줄 수 없다.
수년 뒤, 제인이 나를 찾아왔다. 긴 갈색 머리를 어깨 너머로 출렁이며 내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녀를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편안하게 웃으며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는 자기가 미용실에서 온 게 아니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녀는 지난날의 불안과 절망이 느껴질 때마다 ‘레인’의 순서를 밟으며 자기 몸에 마음 모으기 수련을 계속했다고 했다. 아직도 불안하고 긴장될 때가 없지 않지만 그녀의 인생은 예상 밖으로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그녀 가슴에서 일어났다. “강제로 머리가 잘려서 울고 있는 아이한테 마음을 모으고 그 아픔을 몸으로 느낄 때 나는 쉬는 법도 모르고 사람답게 사는 법도 몰랐던 엄마를 위해서 울고 있는 나를 보았어요. 그녀의 고통을, 어쩌면 스스로 느끼기를 거부했을 그녀의 외로움과 슬픔과 상실감이 내 몸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이제 내 가슴에는 엄마를 받아들일 방이 있고 그녀가 살아있을 때에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랑의 느낌이 살아있어요.”
제인과 나는 한동안 마주앉아 말없는 교제를 나누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내 몸에 깨어있을 때는 내가 전에 생각이나 느낌으로 알고 있던 나보다 더 커져 있는 겁니다. 명상 중에 다시 연결된 ‘살아있는 영’이 진짜 나인 거예요.” 우리는 그녀의 깨달음을 몸으로 흡수하면서 한동안 말없이 더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
땅에 손을 얹은 붓다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주에 다시 심는 것으로 생명과 영을 회복한다. 이 일은 우리가 지금 자기 몸에서 구현되고 있는 진실에 연결될 때 비롯된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생명기운의 장(場)은 우리 자신의 생명기운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경험될 수 있다. 제인의 경우, 손바닥에서 생명기운을 느끼는 간단한 수련이 그녀의 살아보지 못한 생이 준 상처를 포용할 만큼 확장되었고 마침내 자기 가슴과 온몸에서 살아있는 생명기운에 자기를 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안에 살아있는 생명기운과 연결되고 지금 여기서 경험되는 진실에 온전히 현존함으로써 그녀는 자기 자신을 다시 우주에 심을 수 있었다.
[명상실습: 통증에 ‘레인’ 적용하기]
우리는 불쾌한 감각들에 저항하기를 멈추고 그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있는 그대로 현존케 함으로써 통증에 수반되는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이 명상은 보통의 통증이 느껴질 때 특히 유효하다. 특정 부위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지면 당신을 편하게 해주고 진정시켜줄 만한 다른 것으로 집중을 돌린다. 그런 뒤에 준비가 되면 직접 통증에 마음 모으기 명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
편한 장소를 찾아 앉거나 눕는다. 자연스럽게 숨 쉬면서 긴장을 풀고 잠시 고요한 시간을 가진다. 마음 모아 부드러이 몸에 집중하면서 이마와 턱, 어깨, 손바닥의 긴장을 풀어준다.
몸을 스캔하여 불편함이나 통증이 어느 부위에서 느껴지는지 알아보는 ‘레인’(RAIN)의 ‘인식’(R)을 시작한다. 불편함이나 통증이 느껴지면 그 불쾌한 감각에 집중한다. 그것과 함께 현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찾아봄으로써 ‘레인’의 ‘인식’을 계속한다. 그것을 밀쳐내려는 시도가, 미세하게라도,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이 있는가?
불쾌한 감각들에 저항하려는 성향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현존하는 ‘레인’의 ‘그냥 둠’(A)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기 위하여 파란 하늘을 상상하며 그 드넓음에 마음이 섞여 하나 되게 한다. 감각의 문을 열어 들리는 모든 소리를 받아들인다.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들이 나게 하는 열린 공간을 느껴본다. 손, 발, 뺨, 눈두덩 등에서 일어나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감각과 기분 좋은 감각들까지도 깨어서 느껴본다.
‘레인’의 ‘탐색’(I)은 더 깊은 집중이다. 감각이 가장 격하거나 불쾌한 부위에 집중한다. 느끼기가 힘들어지면 불쾌한 감각이 있는 부위 언저리로 잠시 집중을 돌린다. 저항 없이 불쾌한 감각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통증과 통증 부위 언저리를 오락가락한다.
어디에 불쾌한 감각들이 있는가? 어떻게 아픈가? 얼마나 아픈가? (가장 심한 통증을 10점이라고 하면 몇 점인가?) 어디에서 어떻게 얼마나 통증이 느껴지는지 살펴보며 과연 “좋아.” 또는 “동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래서 저항하지 않고 당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아본다. 통증과 통증의 배경을 함께 계속 느껴본다. 불쾌한 감각들에 저항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의 깨어있음으로 하여금 이슬비처럼 부드럽게 통증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당신의 열려있음이 아픈 감각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줄 수 있는가? 아픈 감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 몸을 넓은 공간으로, 거기에서 온갖 불쾌한 감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굵어지고 가늘어지고 움직이고 변화되는 공간으로 만든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고 긴장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지 계속 탐색한다. 모든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통증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는 당신의 ‘자아’가 느껴지는가? 온갖 모양으로 쉬지 않고 바뀌는 파도 같은 감각들을 모두 포용하면서 그 어느 것과도 동일화되지 않는 깨어있는 바다처럼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이 ‘레인’의 ‘동일화하지 않음’(N)이다. 그 무엇과도 당신을 동일화하지 않을 때 그때 당신은 마침내 진정한 현존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명상실습: 붓다의 웃음]
많은 조상(彫像)과 그림에서 붓다는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 작은 웃음 하나가 기계적인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편안함과 행복을 느끼는 쪽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규적인 명상 시간이나 하루 일과 중 어느 때라도 다음의 간단한 웃음 명상을 할 수 있다.
§
눈 감고 심호흡 하면서 숨을 내쉴 때마다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해준다. 눈 꼬리를 살그머니 들어 올리며 가볍게 눈웃음을 짓는다. 입술에 웃음을 머금고 그 웃음이 입 안으로 스며들게 한다. 턱의 긴장을 풀고 뺨과 입술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한다.
웃음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것을 상상한다. 웃음이 가슴과 명치 부근에 가득 차는 것을 상상한다. 웃음이 가슴을 관통하여 아랫배로 내려가는 것을 상상한다. 잔잔한 웃음 물결이 아랫배를 채우고 그 부근의 긴장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것을 상상한다.
이제 당신의 온몸이 그대로 한 송이 웃음꽃으로 피어나는 것을 상상한다. 그런 상태를 가능한 만큼 오래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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