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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독립과 사상의 창조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하늘의 발견
1910년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해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이 자기 문화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한글’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라는 사실이 그러하다. 그 이전까지는 ‘언문(諺文)’이나 ‘조선문자(朝鮮文字)’로 불리었다고 하는데, ‘언문’은 비하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한글’이라는 말에는 한문에 전혀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더 큰 글자’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실학자인 박제가가 ‘한문공용어론’까지 주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이 나라를 빼앗기자 비로소 자기 문화의 소중함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변화를 사상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10년 8월 15일, 한일강제병합 조약이 맺어지기 일주일 전에 천도교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가 창간되었다. 그런데 이 해에 나온 천도교회월보를 보면, ‘我天’(나의 하늘), ‘天心’(하늘 마음), ‘天氣’(하늘 기운)와 같이, 비록 한문으로 쓰여지기는 했지만 ‘하늘’ 개념을 사용하는 단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을 ‘하늘’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치 중국철학에서 도학(道學), 도덕(道德), 도리(道理), 도민(道民), 도성(道性), 도심(道心)과 같이 ‘도’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을 연상시킨다. 중국적인 도학(道學) 패러다임에서 한국적인 천학(天學)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의 독립
천도교회월보의 ‘하늘’ 용례는 그 이전의 동학 시대에 비해서 훨씬 세분화되고 전문화되고 있다. 중국의 개념을 빌리지 않고 뭔가 자기 언어로 철학을 시도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하늘’이 동사로 쓰이고 있는 대목에 이르면 절정에 이른다: “내 마음을 하늘같이 하고 내 기운을 하늘같이 한다(天我心天我氣).” 여기에서 “하늘같이 한다”는 사아(私我)를 끊고 공아(公我)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기적이고 편협한 ‘나’에서 하늘같이 드넓고 열려 있는 ‘나’로 거듭나는 것이 “하늘같이 한다”이다.
여기에서 하늘은 수양의 궁극적 목표로 제시되고 있다. 즉 하늘같이 되는 것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 지점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한국 역사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 동굴 속에서 인고하는 모습은 하늘같이 되고자 하는 수양의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석 유영모가 평생을 하늘을 명상하고 그리워하며 산 것도 하늘같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하늘같이 한다”는 말에는 한국인의 “하늘지향성”(손기원)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하늘같이 한다”를 줄여서 “하늘한다”라고 개념화한다면, “하늘한다”는 마치 ‘한글’처럼 새로운 개념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한글’이라는 명칭과 동시에 발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45년 8월 15일, 천도교회월보가 창간된 지 35년 뒤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서구적)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근대’란, 과학혁명·정치혁명과 더불어 철학혁명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이성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시대가 근대인 것이다. 그래서 흔히 근대를 열었다고 하는 데카르트의 ‘주체’ 선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일종의 “철학의 독립선언”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이 동사가 된” 1910년의 천도교회월보는 나에게는 일종의 “철학의 독립선언”처럼 보였다. 나라는 빼앗겼어도 생각은 지배당하지 않겠노라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물론 그 뿌리는 1860년의 동학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 그런 점에서 한국철학은 1860년부터 이미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학파의 부재
동학과 천도교는 모두가 ‘하늘’을 철학의 궁극적 경지로 본다는 점에서 하나의 ‘학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천도학파’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들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늘을 여는 것을 ‘개벽’이라고 불렀는데, 이 개벽운동은 이후로 증산교, 원불교 등으로도 이어졌다. 즉 좁게는 천도학파이지만 넓게는 개벽학파인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학파가 살아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시기에 역설적으로 학파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나라를 되찾자 학파는 희미해지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의 철학계에서, 또는 인문학계에서 동학이나 천도교와 같은 자생적인 ‘학파’가 있다는 말은 듣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서 몇 년 전에 어느 학회에서 “오늘날 한국에는 왜 학파가 없는가?”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린 적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퇴계학파니 율곡학파니 하는 학파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물음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왜 오늘날 한국에는 학연만 있는가?”
물론 학파와 학연은 일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연만 있고 학파가 없다면, 학파의 탄생을 가로막는 것이 오히려 학연이나 학벌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학연은 학교와 학벌을 중심으로 뭉치지만, 학파는 문제와 학설을 중심으로 모인다. 시대에 대한 ‘물음’과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처방’이 학설을 낳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학파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철학계에 이렇다 할 학파가 없다면 그것은 ‘배움’(學)은 있는데 ‘물음’(問)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음’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답이 ‘학설’이나 ‘사상’으로 제시되는데, 애당초 물음이 없으니까 학설이나 사상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물음이 없다는 것은 문제의식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인들은 문제의식이 아주 강하다. 사회에 대한 관심과 비판의식도 투철한 편이다. 다만 그것들을 근원적인 차원으로까지 내려가서 ‘질문’의 형식으로 제시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물음의 상실
한국인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답’과 ‘방법’을 항상 밖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밖’이란 중국을 말한다(지금은 서양으로 바뀌었지만-). 그런데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북경이 함락되자, 한국인들에게는 ‘바깥’이 사라지게 되었다. 장자에 나오는 비유를 들면, 바람을 타고 다니던 열자(列子)에게 ‘바람’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동학이다. 여기서 ‘동’은 ‘한반도’를 가리킨다. 그래서 동학은 지금으로 말하면 ‘한국학’을 의미하고,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학문의 주체가 중국의 성인이 아니라 한국인들 자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학(聖學)도 아니고 서학(西學)도 아닌 동학(東學)인 것이다.
문제는 독립이 되어 나라를 되찾자 다시 ‘밖’이 생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중국을 압도한 서양이다. 이제 물음과 대답은 모두 서양에서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 과거의 ‘술’(述)의 전통이 부활한 것이다. 그래서 물음이 사라지게 되었다. 성학(聖學)의 틀에서 해방된 지 100년도 채 안 되어 다시 서학(西學)의 틀로 재진입한 것이다. 1910년과 정반대의 상황이다. “나라의 종속과 철학의 독립”에서 “나라의 독립과 철학의 종속”으로 - .
이런 종속적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학술대회나 포럼 형식이다. 몇 년 전에 국내의 한 중앙일간지에서 주관하는 비즈니스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다. 호텔에서 이틀간에 걸쳐 진행하는, 참가비만 해도 1-200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포럼이었다. 우연히 무료 티켓을 얻어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진행 형식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틀 동안의 발표자는 모두 외국의 유명한 학자나 경영인으로 채워져 있고, 한국 교수가 하는 역할이란 고작 영어로 사회보면서 질문하는 정도였다. 나중에 이런 소감을 어떤 분에게 피력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놀랍다.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요?” 참고로 이 분은 국내 최대 기업의 전자회사에 다니는 중견 간부이다. 초일류기업에 다닌다는 간부조차 ‘배운다’(學)는 마인드가 강한 것이다.
대학의 학술대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주제가 ‘정의’이면, 플라톤의 정의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아니면 퇴계의 정의론, 율곡의 정의론 등등. 특정 철학자의 전문가들이 나와서 그 철학자의 무슨 무슨 론을 소개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면 끝이다. 청중들은 그것을 열심히 듣고 배우고 공부하고...
그래서 한번은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말씀해주신 외국 철학자의 정의론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해하시는 모습이었다. 평소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물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물음
20세기 초에 서양의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왜 중국에는 근대 유럽과 같은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나?”라는 물음이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에 죠셉 니담이나 앵거스 그라함과 같은 학자들이 물음의 형태를 달리했다. “왜 근대 유럽에서만 과학혁명이 일어났는가?”라고-.
전자가 부정적인 물음이라면 후자는 긍정적인 물음이다. 후자가 유럽의 개성이나 특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전자는 유럽을 기준으로 한 중국의 단점이나 결점에 중점이 놓여 있다. 여기에는 다분히 유럽 우위적인 관점이 깔려 있다.
이러한 물음은 마치 “한국은 왜 일본보다 근대화에 뒤졌는가?”나 “한국에서는 왜 일본과 같은 근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과 유사하다.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이 이른바 ‘실학’이었다. 서구적 근대화의 맹아가 이미 있었는데, 일본의 방해로 좌절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적 ‘자기 위안’이다.
실학 담론은 일종의 물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바깥의 시선에서 던져진 물음이라는 점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즉 서양이나 일본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물음을 니담이나 그라함과 같은 식으로 바꾼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어떤 근대화를 하고자 했는가?”
이 물음의 중심축은 남이나 밖이 아니라 나나 우리에게 있다는 점에서 종래의 물음과 다르다. 즉 한국인은 서양이나 일본과는 다른 어떤 식의 근대화를 추구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것은 해월 최시형 식으로 말하면 향벽설문(向壁設問)에서 향아설문(向我設問)이라고 할 수 있다. 벽으로 상징되는 바깥의 관점에서 물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얼마든지 던져질 수 있다. 가령 최근에 나온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한국인은 무엇을 지향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다. 여기에는 중국이나 일본 또는 서양과는 다른 한국 사회의 특성을 한국 자체의 ‘시각’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 담겨 있다.
반면에 한국학계에서 이런 식의 물음이 안 나오는 것은 항상 남의 시선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선 상에서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 시선이 과거에는 중국에서 지금은 서양으로 바뀌었을 뿐, 밖에서 바라본 타자화된 자기라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남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유행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인문학계가 서양 사조의 유행에 민감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나’를 표현하는 소년들
최근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K-pop 가수 중에 ‘방탄소년단’이라는 소년 그룹이 있다. 영어로는 ‘BTS’라고 알려져 있는데, 올해에 권위있는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1위를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이 쌩뚱맞게 들렸는데, 그들의 노래를 듣고 춤을 감상하다 보면 점점 빠져 들게 된다. 여기에서 ‘방탄(防彈)’이란 “탄알을 막는다”는 뜻으로, ‘탄알’은 어른들의 편견과 사회적 억압을 상징한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사회적 탄알로부터 막겠다는 것이 그들의 포부이다.
그래서 가사도 가히 충격적이다:
“언론과 어른들은 의지가 없다며 우릴 싹 주식처럼 매도해. 왜 해보기도 전에 죽여 걔넨 enemy enemy enemy“(<쩔어>)
젊은이들을 매도하는 언론과 어른들을 ‘적’이라고 말하는 노래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매우 도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의 입장에서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다. 그 물음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그냥 저항적이고 도발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밤새 일했지 everyday. 니가 클럽에서 놀 때 yeah...아 쩔어 쩔어 쩔어 우리 연습실 땀내. 봐 쩌렁 쩌렁 쩌렁한 내 춤이 답해...난 희망이 쩔어...하루의 절반을 작업에 쩌 쩔어.“(<쩔어>)
이들은 사회적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도덕’을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저항은 ‘도덕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물음과 해답이다. 일종의 저항적 물음과 도덕적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은 이들의 성공요인을 분석하기 위해서 어느 언론에서 종래의 K-pop 그룹들과 비교를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다른 그룹들은 노래 가사에 ‘허니’나 ‘베이비’와 같은 밝고 귀여운 단어가 가장 많이 나왔는데, 방탄소년단의 가사에는 ‘나’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를 “만들어진 아이돌”이 아닌 “자율형 아이돌”이라고 규정지었다. 실제로 이들 소속사의 방시혁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방탄소년단을 아티스트로 대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아티스트’는 기획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이돌이 아니라, 스스로 예술활동을 하는 작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가사에 ‘나’가 제일 많이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들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인 소속사 대표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유행’에 민감하지도 않고, 남의 스타일을 흉내내지도 않는다. 그냥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자기 스타일대로 표현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성장할 수 있었고, 지금도 성장 중이다.
한국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약 35년 전, 한 권의 책이 한국사회를 강타한 적이 있다. 당시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김용옥 선생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서양철학과 맑시즘이 대세이던 한국의 인문학계에 동양학 붐이 일어났다. 젊은이들이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서점가에 논어나 노자와 같은 중국고전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성공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떻게’라는 ‘물음’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시각에서 묻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자신의 관점에서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철학에 대한 탁월한 해설이나 고전에 대한 간명한 설명과는 차원이 다른 접근이다. 해설이나 설명[述]이 아닌 현실문제에 대한 문답(問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세대에게서 더 이상의 물음과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의 다음 단계로서의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모처럼 서양에서 중국으로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켜 놓았는데, 정작 중국에서 ‘자기’로의 시선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서양과 중국 사이를 오가며 표류하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설령 조선을 본다고 해도 그것은 조선 그 자체를 보기보다는 중국화된 조선 또는 서양화된 조선을 보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철학의 종속과 사상의 부재라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사상가’라고 인정할만한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철학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상가가 부재하다는 것은 한 사회를 이끌어갈 나침반이 부재하다는 것과 같다. 정신적 표류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종속과 표류는 동전의 양면이다.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데, 외부에 종속되어 있으니까 정신이 방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곤경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철학의 종속 상태에서 벗어나서 우리에게 맞는 사상을 창조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답은 ‘나’로부터의 진지한 물음에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동학‧천도교나 방탄소년단이 그랬듯이 말이다.
출처: <동양일보> 2018년 8월 13일(월)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