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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The Fortresswkf
한국영화, 장르:드라마 개봉:2017.10.03
감독:황동혁, 각본,원작:김훈, 제작:싸이런픽쳐스
주연:이병헌,김윤석,박해일,고수,박희순, 관객:3,848,014명(2017.11.29.현재)
1. “병자호란”(丙子胡亂)
“병자호란”(1636년)은 1627년에 발생한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치욕적인 역사다. 조선 인조(16대왕,1623~1649년)반정이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이른바“친명배금정책”을 앞세웠다. 후금 누르하치의 후왕인 태종은 1627년1월, 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1월25일, 황주에 이른 후금에 후퇴를 거듭한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로 급히 피난하고 소현세자는 전주까지 피난을 가야만 했다. 단번에 정복할 것 같았던 조선은 정봉수, 이립과 같은 의병으로 인하여 지체되고 “명”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후금의 입장에서도 유리한 측면이 없었다. 이에 3월3일, 후금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을 규정하고 명과의 관계도 현재를 유지한다는 화의가 결정되었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군신의 의를 요구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조선의 자존심은 그것을 수용할수 없었다.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한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조선은 매년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국가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렀다.서인정권의 숭명배금(崇明排金)사상 또한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632년, 만주와 내몽골을 정벌한 후금은 북경을 공략하면서 조선을 더욱더 압박해 들어갔다. 후금의 태종은 “형제지맹”의 금조관계를 “군신지의”(君臣之義)의 주종관계로 변경하고 세폐를 확대하여 금 1백냥, 은 1천냥, 각종직물 1만2천필, 말 3천필과 정병 3만명까지 요구하는 등 압박수단을 높여 갔다. 그후 곧바로 후금은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조달하라는 요구까지 하자 조선 조정은 화친관계를 중단하고 군비를 갖추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636년,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 등 후금의 사신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를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조정과 신하들은 후금의 사신을 죽이려는 계획과 동시에 척화를 주장하였다. 인조는 후금의 조서를 거절하고 사신들을 감시했다. 후금의 사신이 도주하자, 조선은 의병모집과 함께 의주와 서도(西道)에 병기를 확대하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이때 도주하던 후금의 사신이 유서를 확보하고 조선의 전쟁결의를 알게 된다.
1636년4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변경하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로 하였다.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은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조선 사신들을 통해 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 하며 조선의 왕자를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청태종의 국서에 분노한 조정의“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나덕현을 유배하고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과 “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하였다. 그해 11월, 청태종은 조선조정의 분란을 이용하여 왕자와 주요척화론자들을 압송하라는 협박을 종용하고, 12월2일, 조선침략을 강행하였다.
청태종은 명나라가 바다를 이용해 조선을 지원하는 배후지원망 차단을 목적으로 별군을 조직, 랴오허 방면에 배치하였다. 만주족과 몽골족과 한인으로 구성된 2만명의 대군이 9일, 압록강을 도하했다. 맹약위반의 명분으로 조선침략을 획책한 청태종은 조명연합전선을 조기에 분쇄하고 중국지배강화의 수단이 목적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장군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호위하며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청나라 장수,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직행, 선양(瀋陽)출발 십여일 만에 개성을 점령하고 서울 근교에 진입했다.
12월3일, 혼란한 정세속에 조선조정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해 청군이 안주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12월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은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세자빈 강씨, 원손(元孫),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을 호위하며 강화로 향하게 하였다.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임명하는 등 발빠른 대응에 나섰다. 그날 밤 인조 또한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마포대안)까지 왔다는 보고를 듣고 야심을 틈타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남한산성내 1만3천여 명으로 성을 사수토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 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 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남한산성내 군량은 2만3,800여 석으로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만4천여 명의 성내 인원이 50일을 버틸수 있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2월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를 이어 더 많은 군사들이 집결하며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남한산성내의 상황은 남은 식량과 원군이 도달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청군의 포위 속에서 성내는 겨울의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내의 분위기는 최악에 이르렀다. 그저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남한산성의 포위망을 차단해 주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12월18일, 어영부사 원두표군이 성외곽에서 당시 순찰중이던 청군 6명을 죽이고, 20일에는 훈련대장 신경진이 출전해 30여명을 사살하였으며, 21일에도 어영대장 이기축이 서성으로 출병하여 10명을 죽이는 등 작은 승전소식이 있었으나 전후 상황이 호전되지는 않았다.
성외부, 조선팔도의 상황도 순탄치 않았다. 도원수와 부원수, 감사와 병사(兵使)의 군사들은 청과 접전하는 가운데 도주하거나 흩어져 버리는 등 패전의 소식이 거듭될 뿐이었다. 그 가운데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 광교산에서 적장을 죽이는 승리가 있었지만 바로 역습을 당하여 후퇴하고 말았다. 민간 의병은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소수의 원병을 차출했으나 먼 바다의 풍랑으로 인해 회군하고 말았다. 10여만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된 남한산성내 기류는 자포자기 상태로 돌아갔다. 급기야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뚜렷한 난국타개책을 펼치지 못했다.
1637년1월1일, 남한산성 인근 탄천(炭川)에는 12만명(일부에서는 20만으로 추정)의 청나라 대군이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날인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문서를 보냈지만 청군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1월20일, 청나라는 인조가 성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그 이전에 주모자 3명을 체포하여 보내라는 국서를 인조앞으로 보냈다.
1월22일, 세자빈궁과 대군을 호위하던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의 수비대가 무너지고 강화가 함락되었다. 세자빈궁과 대군 등 200명의 포로가 청군에 이끌려 남한산성으로 호송되는 등 전세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조선의 자존심은 남한산성으로 집중되고 있다. 당대 최고의 명장 임경업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청나라와 조선은 아래와 같은 굴욕적인 화의로 상호합의하였으며 이것으로 조선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➀“군신지의”(君臣之義), ➁ 명나라 연호사용금지, ➂ 명나라 국교단절, ➃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게 바칠 것, ➄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고관대신들의 자제를 청나라에서 교육(인질)받게 할 것, ➅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을 것, ➆ 만수, 천추, 동지, 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동일하게 할 것, ➇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내고, 청군이 회전하며 가도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➈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➉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할 것, ⑪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신축하지 말 것, ⑫ 조선내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쇄회)할 것, ⑬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⑭ 1639년(기묘년)부터 매년1회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화의가 끝난후 청태종은 청으로 돌아갔다.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은 인질이 되어 선양으로 갔다. 청군이 회군하며 가도의 동강진을 공격하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이 합류하여 명나라 동강진 군대는 점령을 당하였다.
병자호란후 조선은 명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청과의 사대관계과 형성되며 조공을 바쳐야만 생존이 가능하였다. 중국에 가는 사신은 황제와 황후에게 별도의 공물을 바쳐야 했고, 공식적인 세폐 또한 조선의 경제를 파탄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사신과 동행하는 동안 일정한 교역이 공인되었지만 오히려 조선의 경제적 후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특별히 전쟁포로를 속환하는 속환가의 단가가 너무나 비싸서 이 문제는 끊임없는 충돌의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청과의 사대관계가 유지되었으나, 조정내에서는 숭명배청사상이 더욱 확고해져 가는 기초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1639년, 청나라 출병요구에는 불응하였고, 명나라와의 전쟁때에는 임경업장군이 전선120척과 병사 6천명을 군량미 1만석과 함께 출병시켰으나, 도중에 고의로 30여척을 파괴하고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정보를 사전에 알려 줌으로서 양측의 전쟁을 가늠할수 없게 하였다. 1643년, 이러한 조명통교가 드러나 임경업과 최명길이 체포되었으나 1645년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김상헌이 귀국하는 등 일련의 변화가 있었다.그후 종전직후 무리하게 책정된 조공품목들이 일부 조정되었고, 1649년, 효종대왕은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을 수면위로 올려 놓았다.
남한산성은 서울 동남방향 24km지점 경기도 광주시 21만평 규모로 위치해 있다. 해발500m에 12.4km로 조성된 남한산성은 1621년,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석성으로 개축되어 1626년에 완공되었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더욱 확고해져 현재의 높이와 규모로 조성되었다. 1971년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조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2.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조대왕은 서인들이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후 옹립하여 조선의 16대왕으로 1623년에 즉위, 1649년에 임종(인조27년)하였다. 서인권력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박해일역)는 중화사상을 중시하는 서인의 영향으로 친명배금정책을 지향하였다.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쟁과 패배로 기록된 병자호란, 그 가운데 1636년12월14일에서 1637년1월30일까지 47일간의 여정을 그린 남한산성에서의 조선정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면서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중국 명나라의 쇠퇴는 여진족 후금이라는 작은 나라를 강성대국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청나라로 개명한 청태종은 만주 끝 조선반도가 명 점령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생각에 잠을 청하지 못한다. 결국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전쟁을 개시한다. 전쟁 개시 1주만에 한양도성 코앞에 도달한 청군은 기세등등한 위치에서 조선의 백성과 대신들을 조롱하고 있다.
인조의 눈 앞에는 두 명의 조선책사가 있었다. 후일을 도모하며 지금은 후금과 화친하기를 원하는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역)과 끝까지 싸워 조선의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역)이 바로 그들이다. 때는 12월,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의 중심에 서 있다. 추위와 굶주림이 예상되는 절대적인 열세 가운데 21만여평의 남한산성은 조선반도 유일한 독립국이었다.
송파강을 모두 얼려버린 1636년 겨울의 남한산성길에 예조판서 김상헌이 “늙은사공”(문창길역)과 함께 걷고 있다. 그가 유일한 송파강의 안내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보통 백성이었고 그에겐 어린 손녀가 하나 있다. 그러나 그는 인조를 안내할 때 한끼의 식사도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 있다. 그래서 후금의 군사가 지날 때 한끼의 끼니라도 준다면 그를 또 안내해 줄것이라고 김상헌에게 고백한다. 이 일로 그는 김상헌의 칼에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의 백성은 전쟁과 명과 청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주린 배를 채워줄 사람이 필요한 것 뿐이었다. 그것이 죄라면 죄라 할 것이다.
임금의 임시궁전이 들어온 남한산성엔 주인이 바뀌었다. 본래 살던 사람에겐 더 세찬 바람과 혹독한 굶주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태가 이토록 심각한 상황속에서 나라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보여준 것은 당파싸움 뿐이었다. 남한산성의 문턱에서 길을 멈춘 여진족 후금의 “용골대”(허성태역)는 인조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의 노비로서 후금으로 망명한 “정명수”(조우진역)는 용골대의 통역사를 자처하며 조선의 사신 최명길과 담판을 벌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그저 인조의 항복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뿐이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인조는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중심을 잡지 못한다. 최명길의 타협책을 들으면 그것이 옳은 듯 하고, 김상헌의 강경책을 들으면 그 또한 옳은 듯 하니 죽어나는 것은 오직 백성들 뿐이었다. 영의정 “김류”(송영창역)의 카멜레온 같은 비겁함은 국정의 끝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시백”(박희순역)장군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이미 기울때로 기울어져 마지막 운명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내부의 혼란은 날이 갈수록 거듭되고 있다. 남한산성내 소문난 대장장이 “서날쇠”(고수역)는 처자식을 잃고 의형제인 “칠복”(이다윗역)과 함께 전쟁의 소용돌이로 내몰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동사하는 일이 발생하자 서날쇠는 예조판서 김상헌을 찾아가 가마니를 이용해 군인들의 동사를 막아야 한다고 제안하고 김상헌이 그의 지혜를 받아 들이며 눈여겨 바라본다.
이시백 장군이 성밖으로 출정해 작은 승전을 거두고 돌아오자 성내 군인들의 사기가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듯 하지만 말이 죽고, 사람이 죽고, 식량이 고갈되어 가면서 성내 민심은 임금과 조정대신으로부터 이반되기 시작했다. 말이 먹이가 없어 죽자, 군인들이 쓰고 있던 가마니와 초가지붕을 뜯어 말에게 주고, 백성들이 얼어죽고, 말도 죽자, 그 말을 다시 구워 사람에게 먹이는 악순환이 거듭되며 민심과 군심은 완전히 돌아서 있었다.
후금의 총공격에 맞설 비장의 카드는 남한산성 밖에 있다고 믿는 김상헌은 밀정으로 서날쇠를 보낸다. 그러나 성밖 도원수와 조선의 장수들 가운데 인조의 충신은 없었다. 그저 자신만의 안위를 생각할 뿐이었다. 후금의 세상속에서 서날쇠는 생명을 건졌지만 성내에 머물고 있었던 칠복이는 끝내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는 김상헌이 남긴 “나루”(조아인역)가 있었다. 나루는 늙은 사공에게 남겨진 유일한 혈육이었지만 김상헌이 후한을 생각해 사공을 죽여 버린 것이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립은 끝이 없다. 인조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 영상 김류가 전선의 선봉에 서서 전쟁을 감행 하였지만 한명의 생명도 구하지 못한채 전멸을 당하고, 후금의 “칸”(김법래역)이 남한산성의 눈 앞에서 인조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과 인조에겐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칸은 인조에게 서신을 띄웠다. 이제 칸의 노여움에 인조가 답신을 보낼 차례다.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 옵니까?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수 있는 것이 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칸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전하를 칸의 신하라 부를 것이옵니다. 정녕 전하께서는 칸의 신하가 되시겠습니까?”
칸의 분노가 남한산성으로 울려 퍼졌다. 다급한 인조는 무너져 내리는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최명길에게 답신을 쓰게 하고 인조의 직인을 찍은 서신은 최명길의 말발굽속에서 환급을 다투는 생명선이 되었다. 결국 인조는 칸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고 치욕의 역사는 인조와 최명길과 조선의 조정을 비난하고 있다.
영화는 끝이 났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역사를 넘어 5천년 역사속에 가장 치욕적인 시대의 첫 번째 장면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한일합방에 비교될 만한 치욕은 아니었다. 두가지 치욕적인 사건의 중심에는 우유부단한 지도자와 당파분쟁에 골몰하는 부패한 권력자들의 욕망이 있었다. 백성들만이 희생자가 되었고 전쟁 후 그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최명길과 김상헌, 누가 옳고 지혜로운 참모가 되는가? 나라를 위한 애국심은 두 신하 모두 한결같다. 한사람은 화친과 치욕을 교훈으로 나라를 세우려 하고, 또 한사람은 죽음으로서 나라를 구하려는 민족적 자긍심을 앞세우고 있다. 결국 인조는 최명길의 손을 들었고, 김상헌은 자결로서 자신의 자긍심을 지키려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무엇인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인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하며 치욕의 눈물을 흘릴 것인가? 일제 신사참배를 통해 나타난 두가지 장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신앙의 길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최명길의 길을 가지 않고 김상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길은 정치와 다르고 현실과 맥락을 동일하게 검토하는 것이 아니다.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순간의 치욕을 감수하며 살아남는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길은 세상의 이치와 전혀 다른 길이다. 순교해서 다 죽으면 누가 신앙을 이어갈 것인가 말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하나님에겐 길이 있고 복음은 결국 살아 남는다. 초대교회때도 그렇고 홀로코스트에도 그렇고 누군가는 이어가고 생명의 빛은 어둠을 뚫고 나타난다. 어떠한 악조건과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신앙이 바른 이치와 정통성과 진리의 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