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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는 미제(美製)라고 하면 깜빡 숨이 넘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광복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남아난 산업이 없으니 국산품은 무엇 하나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미제는 튼튼하고 품질 좋은 우량품의 상징이었다.
이런 시절 헐벗은 우리 산에는 ‘리기다소나무’라는 미제 소나무가 이곳저곳에 심기기 시작했다. 미국 동남부지방이 고향인 리기다소나무는 대체로 일제강점기인 1907년경 우리나라에 처음 시집왔다.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창 복구가 시작된 1960~1970년대에는 산마다 리기다소나무 천지였다. 정부에서 공짜로 묘목을 나누어주었고, 인부까지 동원해 심어주었으니 산 주인이야 마다할 리 없었다. 자그마치 48만 헥타르의 리기다소나무 숲이 생긴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나무까지 미제를 좋아하여 우리 나무를 놔두고 이렇게 리기다소나무를 많이 심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때의 우리 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었다. 여름에도 산이 푸른 것이 아니라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비만 오면 흙이 흘러내려 강바닥이 농경지보다 더 높았다. 천정천(天井川)이란 이름의 이런 강은 홍수가 나면 금세 농경지를 덮어 버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산에 나무를 심는 일이 시급했다. 게다가 나무의 종류를 가려 심을 처지가 아니었다. 우선 뿌리를 박고 살 수 있는 나무가 최우선이었다. 비료 성분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곳에서도 자랄 수 있는 나무가 바로 리기다소나무였다. 리기다소나무라고 메마른 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잘 버틸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한계조건에서는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리기다소나무는 줄기 여기저기에 ‘맹아(萌芽)’라는 부정기적인 작은 새싹을 내밀어, 부분 부분을 털북숭이처럼 만들어둔다. 설령 윗부분이 말라죽어도 줄기의 어디에서라도 다시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 생명을 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토종 우리 소나무나 곰솔 등 다른 소나무 종류는 줄기에서 맹아가 돋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멀리서도 리기다소나무 숲은 금세 찾아낼 수 있다. 또 리기다소나무는 솔방울이 잔뜩 열리는 나무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그러하듯 리기다소나무 역시 삶이 편편치 않으면 우선 자손부터 퍼뜨릴 궁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리기다소나무의 환경이 이렇다 보니 좋은 나무가 될 수 없다. 리기다소나무의 정착 과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쓸모없는 나무를 심었다고 이제 와서 비판한다. 그러나 리기다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푸른 우리 산을 보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리기다소나무는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모두 끝내고 우리나라 숲에서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쓸 만한 다른 나무로 교체하기 위하여 잘려나갈 영순위 나무다. 관심은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다. 어렵게 생명을 유지하다 보니 그의 속살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우선 나이에 비해 나무 지름이 작고 온통 옹이투성이다. 또 원래부터 그에게는 송진이 많아 영어 이름도 ‘송진소나무’인데, 힘들게 살다 보니 더 많아졌다. 종이 만드는 회사에서도, 나무 켜는 공장에서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알려진 바로는 1헥타르에 자라는 30년생 리기다소나무의 값어치가 모두 합쳐 1백만 원 남짓이라 한다. 심을 때야 공짜로 심었지만 산 주인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웰빙 바람으로 사람들은 건강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무엇이든 건강에 좋다면 남아나지 않은 세상이다 보니 솔잎도 훑어가기 바쁘다. 리기다소나무보다는 진짜 소나무가 나을 터이니, 바늘잎이 세 개씩 붙어 있는 리기다소나무와 두 개인 토종 소나무는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