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김성춘
폭설이었습니다.
축복 같은
그 때, 그 순간
잎이 올 때
당신은 전신으로 눈부셨습니다
한 생이
날카로운, 첫 키스처럼
별의 똥처럼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아, 당신
폭설이었습니다.
경주 4
초속 5 센티미터로 벚꽃이파리들 떨어지는 마을
자전거 타고 애인과 시간여행 떠나기 좋은 마을
막걸리 집 춘화가 막걸리처럼 걸려있는 마을
일 미터만 파 내려가도 신라가 탁, 얼굴 내미는 마을
삼층 석탑 보다 펜션이 더 우글거리는 마을
유신과 천관녀의 그리움이 아직도 피 흘리는 마을
왕릉이 사람 위에 우뚝 서서 폼 잡고 있는 마을
영원이 순간처럼 순간이 영원처럼 사라지고 있는 마을
이웃집 처용과 원효가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마을
젊은 연인들 눈부시게 뒤엉키는 황리단길 골목이 있는 마을
이리 가도 능 저리 봐도 능
생과 사가 뒤엉켜 기기묘묘 굴러가고 있는......
경주 5
초속 5 센티미터로 벚꽃이파리들 떨어지는 마을
막걸리 집 춘화가 막걸리처럼 걸려있는 마을
자전거 타고 애인과 시간여행 떠나기 좋은 마을
일 미터만 파 내려가도 신라가 탁, 얼굴 내미는 마을
삼층 석탑 보다 펜션이 더 우글거리는 마을
유신과 천관녀의 그리움이 아직도 사무치는 마을
왕릉이 사람 위에 우뚝 서서 폼 잡고 있는 마을
영원이 순간처럼 순간이 영원처럼 껴안고 있는 마을
이웃집 처용과 원효가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마을
젊은 연인들 눈부시게 뒤엉키는 황리단길 골목 숨 쉬는 마을
이리 가도 능 저리 봐도 능
생과 사가 뒤엉켜 오늘도 기기묘묘 굴러가고 있는....
차이꼽스키와 톨스토이
-안단테 칸타빌레*
내가 좋아하는
차이꼽스키 씨는 눈에 물이 많습니다
톨스토이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열린 ‘음악회’를 찾은 그 날
그곳 교수였던 차이꼽스키 씨, 자신보다 열두 살 연상인 톨스토이
옆 자리에 앉았습니다
음악회에선 그의 현악 4중주곡 제1번이 연주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런데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를 듣고 있던 톨스토이의 눈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우수에 젖은 슬라브 풍의 눈물이
슬라브풍의 선율 때문이었을까
48세의 중년 남성 톨스토이가 어린애처럼 눈물을**
그날, 차이꼽스키씨는 일기장에 적습니다
-오늘은 영광스러운 날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기쁜 것은
나처럼 눈물이 많은 한 남자가 세상에 또 있다는 사실이다.
*안단테 칸타빌레: 노래하듯이 천천히
** ’스토리 클래식‘에서 인용
레퀴엠, 레퀴엠
포레의 레퀴엠, 레퀴엠의 여왕
추억은 저녁놀 처럼 슬프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눈부시게 빛나는 모든 색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예술을 당연한 이치로 여겼고, 영화를 위해
존재했고 카메라는 모든 각도에서의 그의 삶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모든 예술을 사랑했지만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했고
아버지의 손가락이 천상의 이슬처럼
마치 흐르는 물처럼 연주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자석처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끌어당기는 힘을 내는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의 정신적 구세주였습니다
이제 어머니 손을 놓아 드립니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 이 글은 향년 79세, 타계한 故 윤정희 씨의 딸 백진희 씨(바이올리니스트)가 파리
인근 벵센 노틀담 성당, 어머니 장례식 날 낭독한 추도사를 인용함.(뉴스1. 이준성기자)
*배우 윤정희 씨는 2023년 1월 19일 새벽, 그녀가 40년 이상 살았던 프랑스 파리 인근 벵센에서
따님의 바이올린 연주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하직함
황혼
오후 5시, 어김없이 산사의 범종소리 들림
황혼이 왔음
골짝 가득히 번지는 종소리
해는 저물고 나도 저물었음
슬퍼할 틈도 없이 속절없는 하루
백팩 메고 일몰의 계단에 서서
골짝 가득히 번지는 황혼의 뒷모습
망연히 바라봄
돌이킬 수 없는 허방 뿐인 생
황혼의 시뻘건 칼에 가슴이 베임
해는 저물고 나도 저물었음
골짝 가득히
어디론가 떠가는 오후 5시의 발소리
괴로워 하지마시라 그대
생은 어차피 한번 왔다가 가는 뜬 구름
고독한 종소리가 내 귀에 속삭였음
악마처럼.
(2023년 ’암브렐라‘ 봄 여름호 발표)
<김성춘 약력>
1974년 박목월 추천으로 ’심상‘ 제1회 신인상
시집, 방어진 시편, 길위의 피아노외 다수
최계락 문학상, 한국가톨릭 문학상, 한국 펜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