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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자 / 신 10:1-11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기도를 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비단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역시 기도라는 것을 한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다.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도를 한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으며, 그 원하는 것을 소원 형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는가? 자기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이 주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때로는 자기 포기를 위해서 기도하기도 한다고 하지만, 자기를 포기한다는 것 자체도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념무상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인간의 현재의 고통스러움을 벗어나기 위한 고급화된 자기를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그 외 다른 사람들과의 기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우리들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굳이 기독교를 택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종교를 택하여 동일한 내용으로 기도하면 될 것이 아닌가?
실제로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이 기도하여 부자가 되고 원하는 학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분명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른데, 도대체 그 다른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런 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교인들은 기독교의 우월성을 다른 종교를 믿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더 높아지고, 더 많아지고, 더 유명해지는 것들로 증명하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믿는 신들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야 매일 교인들을 만나니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일이 잘 풀리고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종교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 역시 자기 종교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접하기 때문에 그들이 더 많은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들의 본성은 보다 나은 환경을 위해서 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마음처럼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열심히 기도해도 안 풀릴 때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늘 십일조 잘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해서 축복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이 있다.
교회에서 굳이 십일조 열심히 하고 기도 열심히 했음에도 결과가 없는 그런 사람을 강사로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세우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기도를 하면서 낙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결과가 없는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주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많이 가지는 것이 축복이라면 바울 사도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한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떤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을까? 아무래도 혼자 기도하니까 그 열렬함이 약해서 자기들이 믿는 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편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는 것이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여럿이 힘을 모아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이해하고 있기도 한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열심히 기도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마치 혼자서는 큰 돌을 혼자 옮길 수 없으나 여럿이 힘을 합치면 옮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식으로 뭔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힘을 밀어주는 기도를 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이해하고 있는 현실이다.
어느 교단에서는 그동안 사용하고 있던 '중보기도'라는 말 대신 '합심기도'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중보기도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중보자 되신 분께만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심기도라는 것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함께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함께 바라보자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합심을 단순히 '마음이 하나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 됨'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의 하나님께 모음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지, 사람들끼리 하나 되어 하나님께 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계성 있는 인간이 하나가 된다 하여 어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전에 전두환 시절에 북한에서 물을 한꺼번에 방류하면 서울이 물에 잠긴다며 TV에서 가상하여 서울이 물에 잠기는 모습을 방영했다.
그런 모습을 본 교회에서는 '평화의 댐' 건립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뭉쳐 열심히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물론 일부는 맞는 말도 있었겠지만 서울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때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 되어(?) 기도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겠는가? 이처럼 인간의 하나 됨이란 분명 한계가 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 있고, 우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기도라는 열심을 통하여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 때로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힘을 합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것은 이방인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 가진 게 있으면 교만하고, 없으면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면 잠깐 동안은 감사하지만, 시간이 지나 주위와 비교하여 뒤지게 되면 또다시 불평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입장만 생각하기를 잘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잊어버린 채 자기 입장에서만 살아갔던 이스라엘은 마실 물이나 먹을 것이 없을 때 원망을 했다. 그들은 늘 자기들 입장만 생각했다.
급기야 그들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 우상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진짜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놓으시고는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이스라엘로 하여금 기다리게만 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오랜 동안 이스라엘의 진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자 기다림에 지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말았다. 그런 이스라엘은 진멸당해야만 했다. 실제로 하나님은 실제로 이스라엘을 진멸하시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진멸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왜인가? 우리들은 막연하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살려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 주신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살아남게 되었던 것은 죽임을 당해야 할 정도로 악화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문제'가 그 누군가에 의해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멸망당해 마땅한 이스라엘의 죄를 해결하는 데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그 누군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중보자인 모세였다. 그 모세가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해결해 준 덕분에 이스라엘은 살 수 있었던 것이었지, 결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 용서를 빈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듯이,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십 주야를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간구했다. 그런 모세의 기도 덕분에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되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중보자로서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한다. 중보기도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남을 위해서 힘을 합쳐 기도해 준다는 뜻이 아니다.
중보기도란 말씀을 파기한 쪽의 책임을 대신 지는 것을 말한다. 즉 중보기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린 사람들의 책임을 중보자가 대신 짐으로써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오늘날 중보기도는 주님 되신 예수님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잘되기를 구하는 기도를 뜻하지 않는다. 모세가 자신의 중보기도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자기가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결코 이스라엘이 백성들의 의로움이나 정직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중보기도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는 오직 은혜를 아는 자만 살 수 있는 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결코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내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던 것이었다. 본문 역시 이런 은혜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처음 돌판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돌판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올 때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그러자 모세는 그 돌판을 깨뜨렸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약속이 파기된 것이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만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돌판을 받을 때와는 차이가 있다. (출 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처음의 돌판은 모세가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모세는 산에 올라와 가만히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돌판은 모세가 다듬어 만들어야만 했다.
게다가 하나님은 돌판만이 아니라 나무궤까지 만들라고 하셨다. 그러면 도대체 돌판과 나무궤를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전에는 친히 만들어 주셨던 돌판을 모세로 하여금 만들게 하셨으며, 나아가 전에는 언급하지 않으셨던 나무궤까지 만들게 하셨던 것인가? 처음의 돌판이 깨지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약속 파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다.
만일 멸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스라엘은 돌판이 깨어지게 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스스로 그런 책임을 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모세로 하여금 돌판을 다듬어 만들도록 하셨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돌판이 산밑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돌판을 깨뜨린 책임을 대신 진다는 의미가 있다.
말씀을 어긴 죄의 책임을 땅에서 누군가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시키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보자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돌판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이며, 나아가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책임지시고 해결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은혜가 지속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죄는 누군가가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런 사실을 알면 무엇 때문에 완전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는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죄의 속함을 받았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
'대속'이란 글자 그대로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여기에는 1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무궤를 만들라고 하신 이유가 나와 있다. 이 말씀을 보면 나무궤의 용도는 돌판을 넣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을 나무궤에 넣으라고 명하셨고, 모세는 그 말씀을 따라 돌판을 나무궤에 넣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모세가 처음에 들고 내려왔던 돌판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모세가 다듬은 돌판에 씌어진 율법은 준비된 나무궤에 넣어져 보관되어져야만 했다.
그 이유는 돌판을 그대로 둔다면 또 다시 깨뜨려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변한 게 없이 죄의 상태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다시 하나님께서 쓰신 그 계명의 말씀이 공개된다면 이스라엘을 도무지 심판을 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8절을 보면 그 돌판을 넣는 나무궤는 '언약궤'임을 알 수 있다. 언약궤는 속죄소 또는 시은좌, 화해 덮개라고 하는 것으로 덮어두었다. 속죄소(시은좌)란 죄를 대속해 주는 장소로 '하나님의 자비가 내려앉는 자리'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씩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에 피를 들고 들어가서 언약궤의 뚜껑 곧 속죄소에 뿌렸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이스라엘은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렇게 피(생명)를 흘려주는 책임을 진 덕분으로 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게 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죄는 말씀을 지킴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죄는 그대로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이 필요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신 덕분에 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신 것이다. 우리 인간의 본질은 죄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인간이란 없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만을 구해야만 한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오직 이 믿음만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믿음이란 우리 인간이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구하고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도 모르는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무식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율법을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하게 된다는 말씀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약 2:10).
하나님께서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판단하시는 기준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다. 사람의 행위란 다 거기에서 거기이다. 오십 보 백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지고한 기준에는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의인과 악인의 판단 기준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분명 도덕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창기와 세리들보다 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속죄의 피의 의미를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오늘 예수님의 보혈의 의미가 믿어지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엡 2:8). 이 은혜를 아는 자들은 결코 자기의 업적을 자랑할 수가 없다. 자랑하다가도 말씀을 생각해 보면 다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어느 안전에서 감히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채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고 드러낸다. 그리고 자기들이 잘한 만큼 하나님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아직도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이다.
성도는 모든 일을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지 않는다. 자기 입장으로 세상을 볼 때 모든 행동은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되어질 수밖에 없다. 회개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게 되고, 기도나 교회 출석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도록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존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예수님의 보혈만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은혜를 아는 자들의 삶이다.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은혜 가운데 주님의 피만 높이고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8-9)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하나님은 레위지파 사람들을 구별하셨다. 레위지파 사람들이란 언약궤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로 부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땅에 기업이 없었다. 오직 여호와가 기업이었다.
그들의 삶은 땅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들은 이런 삶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이다. 전도란 것도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전도란 교회에 나오면 부자가 되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나와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그 반대로 돈을 까먹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피만 높이기 때문에 비록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 백성의 삶인 것이다. 전도 역시 복음을 통하여 이렇게 하나님이 중심된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입장만을 내세웠다. 이러한 태도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야 할 태도였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가르쳐야만 했던 것이었다. 이 말씀은 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라는 당부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잊지 말고 살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보혈은 하찮은 우리의 행위를 내세우지 않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적으로 볼 때는 쓰러져야 할 자리에서도 쓰러지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 된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중보자인 모세의 기도 때문에 살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완전한 중보자이신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서 벗어났으며, 또한 지금은 예수님의 중보기도 덕분에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꾸 행위나 종교적인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 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바꾸어질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다만 우리의 할 일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예수님의 중보기도 덕분에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알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