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不空, 산스크리트어 asunnata)>
불공(不空)이란 여래장(如來藏) 계열의 경전이나 논서 등에 많이 등장하는 말인데, ‘공이 아니다, 공이 없다’ 그런 뜻이 아니고, ‘비어 있지 않다’ ‘헛되지 않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공(空)을 말하면, 그에는 항상 불공(不空)이 전제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텅 비었으면서도 무량무변한 에너지가 가득 찬 불공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공(空)과 불공(不空)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공은 항상 불공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불공(不空)이므로, ― 비어있지 않으므로 공(空)에서 온갖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즉, 법의 바탕이 공이어서 망념이 없고, 진심의 깨끗한 법이 늘 가득 차 있기에 불공이라고 한다. 이는 마음으로 원하는 바가 공(空) 해서 헛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모든 분별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분별 망상이 끊어진 상태에서,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파악되는 현상을 말한다.
따라서 유념해야 할 것은, 불공은 ‘공(空)’ 개념의 반대말이 아니고, 공 개념을 결코 부정하는 말도 아니다. 흔히 공을 설명함에 있어서, “공은 비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공은 진여로 꽉 차 있기도 하다.”라고 한다. 여기서 ‘꽉 차 있다’는 말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불공이다. 때문에 불공은 공의 반대말이 아니라 오히려 공을 설명하는 말로 동원되는 말이다. 그러니 공과 같은 맥락의 말이라 하겠다.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진여 ― 만공덕으로 꽉 차 있다. 꽉 차 있으므로 비어있지 않다, 그래서 불공이란 말이다.
이와 같이 공과 불공을 긍정적 의미로 함께 다룰 경우 이를 여래장(如來藏)사상의 관점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공(空)여래장과 불공(不空)여래장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여래이신 부처님의 성품은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공이며, 무루의 지혜광명이
다 갖추어 있다는 의미에서 불공이라는 것이다.
불교경전엔 부정적 표현이 많다. 특히 <반야심경>의 경우, 아니다(非), 없다(無), 않는다(不) 등의 말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론 부정을 통해서 불교의 정신을 체득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여래장(如來藏)사상이다. 모두에게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자는 것이다. 부정적 표현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철저한 긍정에 기초할 때이다. 처음부터
부정으로 일관한다면, 수행의 힘이 부족한 초심자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이 땐 따뜻한 격려가 오히려 초심자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승만경(勝鬘經)>의 경우에는 공(空)여래장과 불공(不空)여래장을 말하면서, 공여래장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불공여래장은 번뇌에 벗어나게 되면 모든 뛰어난 공덕을 간직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나오는 말이다.
「불공(不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법의 본바탕이 공(空)이어서 망념(妄念)이 없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곧 진심(眞心)이다. 진심(眞心)은 늘 변하지 않고 깨끗한 법(淨法)이 가득 차 있기에 불공(不空)이라고 한다. 또한 취할 수 있는 어떤 모습도 없으니, 생각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한 사람이라야 서로 응하는 까닭이니라.
- 所言不空者 已顯法體 空無妄故 卽是眞心 常恒不變 淨法滿足 故名不空. 亦無有相可取 以離念境界 唯證相應故」
진여(眞如)의 모습에는 공(空)과 불공(不空), 두 가지 모습이 있다고 했다.
불공(不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법의 근본인 ‘진짜 마음(眞心)’은 망념(妄念)이 없는 공(空) 인데, 이 진짜 마음(진심)에는 항상 변하지 않고 깨끗한 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비어 있지 않다(불공 不空)”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은 공(空)과 불공(不空)을 함께 얘기하신다. 대체로 마음에 불순물을 가진 것이 사람이고 그를 비우는 것이 공이지만, 불공은 비우지 말 것을 말한다. 공덕, 복덕, 지혜, 발보리심, 청정심, 원력 같은 것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공이면서 불공(不空), 불공이면서 공이라 하는 것은 여여(如如)의 뜻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대승불교의 바탕은 공사상이다. <반야심경>에서 보듯 제법공상(諸法空相)이다.
그러나 이 공을 평면적인 공, 무자성(無自性)만의 공으로 이해하면 큰 오해를 한다. 따라서 종내는 허무주의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대승에서 공을 말하면 그에는 항상 불공이 전제돼 있다. 텅 비었으면서도 가득 찬 무량한 공덕으로서의 불공이다. 즉, 무량무변한 에너지로서의 불공이다. 밖으로 공을 깨닫지 못하면 번뇌 망상이 생기고, 안으로 불공을 깨닫지 못하면 무명이 깊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空)과 불공(不空)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 도리를 떠나서는 결코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밀교의 경우, 불공(不空)을 아모가(amogha)라 한다. 아모가(Amogha)란 확실한,
헛되지 않은, 또는 공하지 않다, 공이 아니다 빈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공이란 ‘나’를 비우라는 것이다. 무아(無我)가 되라는 것이다. 왜 ‘나’를 비우라는 것인가?
‘나’ 때문에 참된 나를 모르는 어리석음(我癡), 나에 대한 사랑(我愛), 나의 교만(我慢), 나의 고집(我執),
‘나’라는 자존(我相) 때문에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영원, 완성, 조화, 통일, 성취가
가득한 “옴(Om-진리의 핵심)”의 자리와 하나가 되지 못한 채 괴롭고 덧없고 슬프고 비참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허공처럼 탁 트인 대 우주 법계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허공에 떠있는 고무풍선처럼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 자아에 갇혀 살고 있다. 불공은 빈 것이 아니라 꽉 차 있다는 것이다. 영원, 생명, 행복. 무애자재. 청정무구, 정(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대자비, 대지혜, 대평화가 꽉 차 있다는 말이다.
‘나’만 비우면 자아의 고무풍선만 터트리면 “옴”의 아모가(不空)가 그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원효대사께서 <대승기신소>에서 법신(法身) 그 자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크나큰 지혜요 광명이며 세상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비추며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맑고 깨끗한 마음을 본성으로 하고 있으며,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재하고 번뇌가 없으며, 인연에 따라 변동됨이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덕성을 갖춘 것이 법신이다. 광명진언(光明眞言)을 외우는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법신 비로자나불의 대 지혜광명이 늘 우리를 비추고 있으며, ‘자아’의 고무풍선을 터트린 우리 자체가 바이노차나라는 것을!”
이와 같이 불공(不空)이라고 말한 까닭은 바로 진심(眞心)이 항상 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만족하기 때문에 불공(不空)이라고 이름 한다.
그리하여 비록 불공(不空)을 말하기는 했지만 상(相)이 없기 때문에 불공은 공과 다르지 않으니 분별하여
반연함을 여윈 경계는 오직 무분별지(無分別智)로 증득함으로써 그에 상응(相應)하기 때문이다.
허니 공(空)은 무조건 없다는 무(無)와는 다른 것이란 말이다. 그 모습은 변화로 생기는 허상이지만 그 속에는
진여가 있기 때문에 불공(비어 있지 않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옳다 그르다“ 등의 생각을 떠난 경지에 이르는 사람이라야
“비어 있지 않다(불공)”는 의미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공(空)과 불공(不空)은 둘이 아니고 하나여서 따로 설명할 것이 없는 것인데 모르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