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허_현진건
#단군성적순례
소설가 빙허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단군의 성적을 찾아 순례하였고, 그 여정을 ‘단군성적순례’라는 제목하에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
‘단군성적순례’는 해방후인 1948년에 예문각(藝文閣)에서 단행본으로 초판본을 발행하였고, 이후 이 책은 단군 유적 연구의 기본서가 된다.
>
현진건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에서 태어났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한말에 득세한 개화파 집안으로서, 대구 우체국장이었던 현경운(玄炅運)의 4남으로 태어났다.
>
1915년 이순득(李順得)과 혼인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조중학(成城中學) 4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1918년 상해에 있는 형 현정건을 찾아가 호강대학에서 수학하였다.
>
홍사용· 이상화 · 나도향·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
현진건은 동아일보사가 단군입론(檀君立論)에 앞장서는 한편 단군릉 수축 운동에 참여하면서 기획한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를 사회부장으로 취재에 나섰다.
제1차 취재는 1932년 7월 8일부터 22일까지 묘향산 · 평양 · 강동 · 강서 · 구월산 등지에 걸쳐 이루어졌고, 제2차 취재는 1932년 10월 23일 강화도 일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단군성적순례’는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
순례길에 오른 현진건은 우선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에서 수(隨)나라의 백만 대군을 무찌른 612년의 살수대첩 감회에 젖은 것도 잠시, 세 토막 난 채 흩어져 있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석상을 보고는 너무나도 무참한 현실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어 묘향산에 있는 단군굴(檀君窟)을 찾은 빙허는 단군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위대하고 찬란한 문화적 유업이 잘 보존되기는커녕 조락한 채 버려져 있는 사실에 대해 몸 둘 바를 모른다.
>
빙허는 “무슨 낯으로 무슨 염의로 무슨 주제로 여기 왔는고”라며 자책한다. 빙허는 행보를 대박산(大朴山)에 있는 단군릉(檀君陵), 구월산(九月山)에 있는 단군대(檀君臺), 마니산(摩尼山)에 있는 제천단(祭天壇)으로 이어질 때마다 송구스럽고 한탄스러움은 그 도를 더해 간다.
>
빙허는 평소 민족의 현실에 눈을 돌린 민족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많이 발표해왔다. 당시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2년 6월 10일 출옥한 형 현정건(玄鼎健)을 병석에 눕혀놓고 순례길에 올랐기 때문인지 단군을 흠모하고 국토를 아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빙허는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에는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다가 1943년 4월 25일 4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
그는 장편과 단편 20여 편과 7편의 번역소설, 그리고 여러 편의 수필과 비평문 등을 남겼다.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빙허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는 해방후인 1948년에 예문각(藝文閣)에서 단행본으로 초판본을 발행하였고, 단군 유적 연구의 기본서가 되었다.
>
아래 사진은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 제4회 연재분, 1932년 8월 1일자
「동아일보」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