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樂善齋)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석물·꽃담 굴뚝 등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한정당·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원래 왕의 연침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낙선재가 지어지고 이듬해에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 안에 사대부주택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낙선재와 연경당뿐이다.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에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 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여사가 기거하였다.
2006년 4월1일부터 15일까지 매화밭 일반인에 공개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소장 최종덕)는 봄꽃이 활짝필 시기인 2006년 4월 1일부터 4월 15일까지 보름 동안 낙선재 앞 매화꽃밭을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이번 공개는 봄철을 맞이하여 고궁에 피는 꽃을 감상하고픈 일반인들을 위해 특별히 공개하는 것이다. 그 동안 낙선재를 관람하면서 멀리에서만 꽃을 바라보았던 관람객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낙선재 앞에 펼쳐진 꽃들의 향연에는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 것을 시작으로 매화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그리고 5월경에는 철쭉이 참여하는 것으로 그 행렬이 이어진다.
창덕궁은 단체관람으로, 개별관람이 제한돼 창덕궁내 일부 지역이 관람동선에서 빠져 있어, 낙선재 매화밭도 그동안 관람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었다.
창덕궁 낙선재 매화밭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면, 관람객들의 사진촬영 장소 등으로 애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창덕궁관리소 김수현 연락처 : 02-762-4680, nicosia@ocp.go.kr
제78차 文化遺産踏査; 昌德宮-後苑-昌慶宮(4-3); 昌德宮 樂善齋
昌德宮 樂善齋 -보물 제1764호(2012.03.02)-
昌德宮과 昌慶宮의 경계에 있는 樂善齋는 憲宗이 한창 王權强化를 시도하던 시기인
憲宗 13년(1847)에 건립하였다. ‘樂善(善을 즐김)’이라는 명칭은 ‘仁義忠信으로 善을 즐기고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天爵(하늘이 내린 벼슬)이다’라는 <孟子>의 句節에서 비롯되었다.
(*爵: 벼슬 작)
樂善齋는 錫福軒과 壽康齋가 옆으로 길게 이어지며 建物群을 이루고 있어 이 일대를 통틀어 樂善齋라고도 한다.
각 건물 사이에 行廊과 담을 설치하여 공간을 독립적으로 구성하였으며 세 건물 뒤쪽으로 花草∙石物∙꽃담∙굴뚝 등으로 꾸민 아름다운 後園이 있고, 꽃담 너머에는 上凉亭∙閒靜堂∙翠雲亭 등의 亭子가 있다. (*閒: 한가할 한)
다른 宮闕의 寢殿建物과 달리 丹靑을 하지 않고 士大夫의 家屋形式으로 건축하였으나 여러 資材들을 高度의 기술로 다듬어 纖細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으며, 수준 높고 다양한 窓戶를 설치하여 궁궐의 權威와 威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궁궐 안에 士大夫 住宅形式으로 지은 건물은 樂善齋와 延慶堂뿐이다.
朝鮮 王家의 女人들이 寄居하다 生을 마감한 곳으로 國權을 빼앗긴 皇室의 마지막 역사를 담고 있으며, 朝鮮後期 匠人들의 蓄積된 技倆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로 歷史的∙建築的 가치가 커 2012년 3월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되었다. (*倆: 재주 량)
樂善齋는 조선시대에는 昌慶宮 領域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昌德宮에서 관리하 고 있어 창덕궁으로 입장해야 볼 수 있다.
昌德宮 樂善齋 사진
(93) 昌德宮 樂善齋 全景
(95) [長樂門] 扁額 -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 글씨-
(96) 昌德宮 樂善齋 -보물 제1764호-
樂善齋는 임금의 書齋 겸 사랑채로 조성되었으며, 國喪을 당한 王后들이 素服을 입고
隱居하는 공간이었다고도 전한다. 1884년 甲申政變 직후 高宗이 執務所로 사용했으며,
日帝强占期에는 純宗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1963~1970년 英親王 李垠,
1966~1989년에는 英親王의 夫人 李方子 女史가 寄居한 곳으로, 두 사람은 이곳에서
他界했다. (*隱: 숨을 은 *垠: 지경 은)
(97) 樂善齋 樓마루
(98) [樂善齋] 扁額 -淸 葉志詵 글씨- (*葉: 땅이름 섭)
*遂翁 葉志詵(1779~1863)은 淸의 金石學者로 19세기 韓中 文化交流의 한 軸을 차지하던
翁方綱의 자리를 承繼했다. (*遂: 드디어 수)
섭지선은 朝鮮文人들과 인간적으로 소통하면서 19세기 燕行使들과 폭넓게 交流한 인물로,
金石學 ∙書籍購入 ∙醫學情報 등 知的인 窓口 역할을 했다. 葉志詵을 통해 조선에서 새로운
문화적 기류가 흐르게 되고 韓中 文人交流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102) 昌德宮(樂善齋) 錫福軒
樂善齋, 壽康齋와 연해있는 공간으로, 낙선재 동쪽에 있다. 1993년 복원공사 때 발견된
上樑文을 통해 憲宗 14년(1848)에 重建한 것을 알 수 있다.
錫福軒은 憲宗이 後孫을 보기 위해 맞아들인 後宮 慶嬪 金氏를 위해 마련해준 處所였다.
憲宗은 錫福軒을 짓기 한 해 전에 자신의 개인 휴식공간인 낙선재를 먼저 지었다.
조선의 마지막 皇后인 純宗 妃 純貞孝皇后가 1966년 他界할 때까지 거처했던 곳으로
낙선재 일대의 復元 작업을 마친 후 2006년부터 공개되었다.
수강재(壽康齋)
수강재는 남휘와 정선공주가 살았고 이어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수강재에 이어하였으로 수강궁이라 하였다.
正祖 9년(1785)에 건립했으며, 端宗이 머물렀던 옛 壽康宮 자리에 세워 ‘壽康齋’라고 이름 붙였다.
純祖 27년(1827)부터 代理聽政 했던 孝明世子(追尊 翼宗)의 別堂이었으며, 憲宗 14년(1848) 헌종의 祖母 純元王后의 居處로 重修 하였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흘러 조선왕조 말기에는 마지막 황실 가족인 덕혜옹주(1912~1989)가 머물렀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얻은 아주 귀한 딸이었다.
그녀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귀하게 자랐으나, 안타깝게도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볼모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후 대마도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다케시(宗武志)와 강제 결혼하여 딸[宗正惠]을 낳았는데, 정신분열증으로 도쿄 인근의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이듬해에 이방자(李方子:1901~1989) 여사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부인으로 마지막 황태자비였다.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각각 낙선재와 수강재에 머물면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러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함께 생활하던 덕혜옹주가 떠나서일까? 열흘 사이로 4월 30일에 이방자 여사도 눈을 감았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한 덕혜옹주.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 장은 낙선재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조선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壽康齋는 2006년부터 공개하고 있다.
자료 제공 :한국문화재재단 http://www.chf.or.kr
제2차 선조 유적 탐사 - 창덕궁 수강제, 남이장군 집터
참석자 (9명)
남영우38년생 계후손 상계동 010-3117-6331
남상구39년생 붕후손 상계동 010-7721-8558
남택수 48년생 충간공 이판공파 양천구 010-6344-0754
남상기 유계공파 010-5216-4234
남상구 부천 010-6364-1159
남상직 010-3950-5013
남기택 효자공파 고 남해우 자 서울 대학병원 점심 대접, 010 -5284-9238
신영현 신자승 후손 종친회 회장
남인우 47년생 기획 및 가이드 010-3885-0484
좌로부터 남상구(총경) 남택수(충간공 아판공파) 남상구(붕후손) 남상기(국정원) 남영우(계후손) 남인우(본인) 남기택(27회 남해우 자) 남상직(소령) 신영현(신자승 종중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