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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리 새벽 기도 득세 시간 동안 50여 기도학교 중에 저희가 새벽 기도를 한 한다고 교인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오늘날 하루는 별로 기대감 없이 있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너무 성도들이 꽉 차 있는 거예요. 게다가 너무 놀래가지고 그날 설교가 너무 힘들었어요.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이번 주도 놀라게 합시다.
기쁘게 인사하라는 소린데 웃지도 않으셔서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이번 주도 놀라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순종은 타이밍이다.’라는 제목으로 말씀 함께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때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순종이 왜 어렵냐 하면 항상 우리가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라고 하시기 때문에 순종이 어려운 거예요. 믿음이 자란다. 믿음이 성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냐 하면 이전에 내가 순종하지 못하던 것들을 이제는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전히 순종할 수 없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면 우리는 아직 믿음이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여러분과 저 앞에는 우리가 순종할 수 없는 것만 남아 있어요.
왜 그럴까요? 순종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했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순종에 대한 설교를 하면 되게 듣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순종할 수 없는 것만 남았는데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라고 하니까 순종에 대한 설교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믿음이 이렇게 멈춰져 있는 거예요. 순종과 믿음은 같이 가는 것인데 순종의 분량과 믿음의 성장은 같이 가는 것인데 우리가 순종이 멈춰지니까 믿음의 성장도 성숙도 멈춰져 있는 것입니다.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지금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순종이 멈춰지면 믿음의 성장도 멈춰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의 불량은 곧 믿음의 불량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는 것은 믿음이 성장했다는 거예요. 이전에 고민하던 것들이 이제는 고민하지 않고 순종하게 되어 그러면 여러분은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일을 경험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내가 이전에 할 수 없던 순종을 하게 됐다는 것은 내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일을 경험할 준비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곧 순종의 성장과 같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성숙과 성장은 자유율과 독립이에요. 근데 믿음의 성숙은 자율과 독립이 아니라 순종이에요. 더 완벽한 순종, 더 온전한 순종, 더 확실한 순종. 세상에 믿음이 자라고 세상의 사람들은 성숙하고 성장하게 되면 자율적이 되고 독립적이 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반대로 믿음이 성장하게 되면 더 많이 순종하게 되고 더 완벽하게 더 온전하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앞에 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상식을 넘어선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넘어선 요구를 하신 겁니다. 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셨을까요? 이게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종종 정말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순종을 요구하실 때가 있어요. 내가 교회 생활을 오래 했는데 신앙생활을 오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에게도 그랬어요. 아브라함이 100세의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은 100세에 낳은 그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어요.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도 순종하기 어려운 것이고,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고 한 것도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이삭에게 아브라함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때 가볍게 웃으면서 이렇게 하신 게 아니에요. 되게 진지하게 그래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도록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순종을 요구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인 거예요. 믿음의 조상이 되어서 믿음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믿음의 나라를 만들고 민족을 세우기 위해선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믿음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에게 특별한 것을 순종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리고성 앞에 있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곧 가나안의 주인이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는 하나님께서 이전과는 다른 것을 요구하셨어요. 다른 순종을 요구하셨어요. 왜냐하면 이 가나안 땅에 살기 위해서는 이런 순종의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가겠습니다.
새로운 시작에는 새로운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이크 좀 잡아주세요.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작스럽게 아무런 언급이 없으시다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1차적인 이유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길에서 태어난 그러니까 출애굽 2세대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2차적으로는 할례를 받지 않는 백성들이 언약의 땅에 들어가는 것,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언약의 백성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할례를 실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게 장소가 문제인 거예요. 요단강을 건너고 그 앞에는 여리고성이 있었습니다. 곧 전쟁을 해야 될 곧 전쟁을 시작해야 될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거예요. 만약에 가난한 사람들이 공격해 온다면 이스라엘은 꼼짝없이 다 당하고 말 그럴 상황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할례를 행하라 하신 거예요. 정상적이라면 전쟁을 준비하십시오라고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할례를 준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해야 될 타이밍에 한례를 행하러 가신 것이죠.
근데 이게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종종 우리의 인성을 벗어난 순종을 요구할 때가 있어요. 도 교회 전체적으로 봐도 이해가 안 되고 내 개인적으로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순종을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는 전쟁이 더 중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할례가 더 중요해서 거예요. 그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두 가지를 할례를 통해 가르치기 위함이었어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떤 자세를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그 가나안 땅에 오래 거주할 수 있고 그 가나안 땅을 지킬 수 있고, 그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 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전쟁보다 중요한 것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미래를 결정하는 요소일 거예요. 뭘까요? 만약에 하나님과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이런 요구를 하신다면 정말 중요해서 반드시 필요해서 요구하신 걸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을 쓸모없는 걸 요구하셔서 우리의 시간이 낭비되기를 바라는 분이 아니기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꼭 필요하셔서 하나님이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이게 뭘까요? 첫 번째로는 계속해서 들었던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오래 거주하는 약속의 땅에 오래 거주하는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첫 번째 자세예요. 하나님과의 언약에 순종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주신 율법에 순종하라는 거예요. 위험해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순종하라는 거예요. 전쟁할 때도 순종하라는 거예요.
가나안 땅을 지키는 비결 이 땅에 오래 사는 비결이 순종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서 가나안 땅에 살기 위해서는 순종의 주체가 바뀌어야 돼요.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왕 바로에게 순종했어요. 그러니까 바로에게 순종했기 때문에 애굽 땅에는 안전하게 살았던 거죠. 나올 때 순종하지 않고 뛰쳐나온 거잖아요. 애굽 땅에 살기 위해서는 바로에게 순종했어요.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 순종해 있냐 쉽게 순종하느냐 하면 세상의 소리에 바로의 소리에 세상 임금의 소리에 훨씬 잘 순종하도록 길들여져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거예요. 근데 가나안 땅에 살기 위해서는 순종의 주체가 바뀌어 대상이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바로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한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길들여졌어요.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되는데 이 일이 쉽게 될까요? 아니요. 여러분이 세상에 20년 30년만 살아도 예수 믿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여전히 어렵잖아요.
근데 400년 동안 바로 왕에게 순종하는 길들여진 백성이라면 어떻게 단번에 순식간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더 강력한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했어요. 사인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것만 보면 순종해야 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어떤 징표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순종의 대상이 바뀌는 것이 쉬울까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아서 강력한 임팩트가 있는 어떤 사건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적군 앞에서 할례를 행하라
여러분 그때의 긴장감이 얼마나 강력할까요? 전쟁하려고 준비하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하고 전쟁을 해야 될 남자들이 다 누워 있어요. 그때의 긴장감은 말로 할 수 없을 거예요. 이 긴장감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몸에 새기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순종하며 살라고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그들의 삶과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몸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새긴 거죠.
이게 할례예요. 원래 할례의 본 뜻은 있지만 이 가난을 앞에 둔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행한 이 할례에는 이런 메시지도 함께 담겨 있다는 거예요. 가나안은 순종의 땅이다. 너희가 순종해야 살 수 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강력히 순종해야 그 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주 강력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에도 심고 마음에도 심고 몸에도 표시하게 한 거죠.
두 번째는 뭘까요? 순종 순결입니다. 정결함 하나님은 적군들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가난한 백성들과는 구별되게 살라는 거예요. 가난한 땅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는 거예요. 애굽에서는 애굽의 백성으로 살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가나의 백성으로 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거예요. 가나안 땅은 가나안 족속들과 구별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땅인 거예요. 그 땅에 다 들어가서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족속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문화를 즐기고 그들의 신을 섬기면 살 수 없는 땅이 가나안 땅인 거예요. 그래서 이 할례를 통해서 정결해야만 살 수 있는 땅이라는 메시지를 그들에게 주시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적군이 눈앞에 있는 이 상황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경험이 있는 거죠. 그래서 멈춰 서서 적군을 눈앞에 두고 싸울 준비를 한 상태에서 이들은 다 할례를 행하고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순결하지 않는 공동체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순결하지 않는 공동체는 세상의 메시지는 강력하게 들려도 하나님의 메시지는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명령은 순결하지 않아도 더러워도 지킬 수 있어요. 직장은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 수 있어요. 직장은 횡령을 하고 다닐 수 있어요. 안 들키면 평생 멋지게 명예롭게 은퇴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순결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어요.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순결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는 거예요. 교수인 친구가 소논문을 이렇게 보고서를 쓰고 있는데 이게 이제 교육자 수급에 관련된 보고서예요. 작년 총회 보고서 우리가 매년 총회 보고서를 올리는데 그 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한국 우리 교단의 담임은 만 1235명이라고 합니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데 월요일날 발표될 거예요. 친구랑 대화하다가 제가 좀 자료를 필요해서 먼저 달라고 한 거예요.
현재 부교역자는 6,876명이랍니다. 이외에 이제 무의의로 있는 분들만 치면 훨씬 더 많긴 하지만 그러니까 숫자상으로 드러난 단임은 11,235명, 부교역자들은 6,876명. 근데 2030년 되면 3천 명 정도의 담임들이 은퇴를 하게 된대요. 문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2030년부터 담임 목사를 구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지금은 부교역자를 구하기가 되게 어려워요.
여러분 우리 교회 지금 부교역자분들이 네 분이 있는데 여러분 이거를 기쁘게 감사하게 여기셔야 돼요. 왜냐하면 못구하는 교회가 너무 많기 때문인 거예요. 서울도 못 구해요. 근데 지방인 좀 작은 도시인 구미에서 교역자를 다 이렇게 모셨다는 건 요즘은 진짜 기적 같은 일이에요. 안 돼요. 그만큼 절대적으로 교육자 수가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2038년이죠. 2038년 2038년이 되면 교회의 50%가 담임을 못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도 제가 은퇴하면 담임을 못 갈 가능성이 되게 높아요. 주로 서울 경기에 있는 교회들이 다 담임을 구하게 되고 나머지는 담임을 못 구하는 일이 일어나요. 이미 섬에는 담임을 못 구해서 은퇴한 목사님들이 10년씩 목회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 하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말하고 싶었어요. 왜 이런 결과가 왜 교회의 사명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을까? 제가 내린 결론은 한국교회가 순결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인구가 줄어든 것도 맞아요. 사회적인 구조에 문제가 생긴 것도 맞아요. 교회가 시대를 못 따라가는 것도 맞아요. 교회가 너무 중구난방 많은 것도 맞아요. 그건 세상이 보는 결전이고 제가 그냥 담임 목회자로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에 생각나는 것은 사명자가 적은 것은 순결하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 순교를 잃은 공동체는 사명자를 배출할 수 없습니다. 이걸 아셔야 돼요. 교회가 순결함을 잃으면 그 교회에는 헌신자와 사명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가 순결을 잃으면 교회를 통해 좋은 목회자가 나올 수가 없어요.
목회자들이 순교를 잃었는데 과연 이 사람들이 사명을 위해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명이 그들의 가슴에 떨어져도 움직이지를 않아요. 지금 이 시대는 정말 사명을 받은 사람이 많아야 할 정도로 하나님이 주신 미션들이 정말 많은 시대예요.
여러분 우리 교회도 지금 해야 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걸 해야 교회가 생존할 뿐만 아니라 생존과 달린 문제들이에요. 지금은 다음 세대를 이어갈 뿐만 아니라 이 교회가 없어지지 않고 100년 200년을 유지할 수 있어요.
근데 사명자가 나오지 않아요. 헌신자가 나오지 않아요.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가 순결을 이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른 이유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오늘 말씀을 한국교회 상황에 대조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순결을 잃은 공동체는 사명자를 배출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세대에서 사명자들이 날아와요. 부모 세대가 거룩해야 그 교회에서 사명자들이 나오고요. 지금 여러분과 제가 거룩해야 우리 교회에서 사명자와 헌신자들이 나와요. 사명자가 헌신자가 어떤 사람일까요? 더 크게 순종하는 사람들이에요. 더 놀랍게 순종하는 사람들이에요. 이 순종하는 사람들은 결국 순결한 공동체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자들이 헌신자들이 이 땅에서 사멸해지는 이유가 아닐까요? 만물에 더렵혀지고 권력에 의해 더렵혀지고, 성에 의해 더럽혀지고, 악한 문화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에 우리가 사명을 회피하는 거예요. 교회가 사명을 회피한다. 그것은 우리가 순결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순결을 하지 않으면 사명이 보이지 않아요.
아무리 많은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도 그 사명이 보이지 않아요.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봐야 될 공동체예요. 누가 봐요? 하나님의 사명을 하나님의 명령을 누가 듣냐고요 길거리 가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요. 무당들이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요. 세상의 권력가들이요. 그 사람들은 사명을 못 봐요. 누가 사명을 봐요? 우리가 사명을 봐야 되는데, 우리가 언제 이 사명을 볼 수 있느냐 순결한 공동체가 될 때 사명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정결해야 가나안 땅도 정복할 수 있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정결해야 가나안 땅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순결하지 않을 때 항상 하나님의 명령에 역행했어요. 이스라엘 사례를 보면 열왕기상하, 사무엘상하, 역대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순결하지 않는 공동체는 항상 하나님의 명령에 역행했어요.
이 시대가 하나님의 명령을 역행하는 것은 교회가 순결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떠나 이방을 섬겼어요. 교회를 떠나요. 사명을 잃은 공동체는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순종해요. 이상하죠. 우리가 고백하면 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다 말해요. 교회 처음 온 분들도 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말을 해요. 그래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거의 없어요.
그런데 불순종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는데 불순종해요. 왜 그럴까요? 뭐 때문일까요? 우리가 불순종한 이유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에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리고를 앞에 두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명령보다 더 크고 위대한 명령이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순종했던 거예요. 만약에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크고 위대한 미션이 있었다면 이들은 결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당시에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큰 미션은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이들이 순종하고 말도 되지 않은 할례를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해야 할 시간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지 못해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지 못해요. 왜 그럴까요? 순종할 때 순종하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 돌아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일하신 것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신 것들, 여러분 그런 경험이 요즘 많으신가요? 별로 없을걸요. 왜 없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에 우리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공동체에 나타나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순종하는 가정과 사람들에게 나타나요. 근데 순종하지 않고 역사를 바란다는 건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의 방법에 내가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에 내가 엎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내가 주저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란다는 건 틀린 거예요. 기도가 응답되길 바라는 것도 잘못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지금 지금 이 시간부터 하나님의 순종과 하나님의 이끄심에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했기 때문에 가나안 정복이라는 새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새 역사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한 번 따라합니다.
순종해야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근데 순종은 타이밍이 있어요. 보통 우리는 순종조차도 나의 타이밍에 나의 시간에 하려고 해요. 이것도 틀린 자세예요. 순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되지만, 순종하는 타이밍을 놓쳐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순종하되 순종의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돼요.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의 타이밍을 놓쳤다면 우물쭈물하다가 한 달 후에 순종했다면 가난은 이미 전쟁 준비를 다 했을 것이고, 그리고 누워 있는 그들을 공격했을 거예요. 네 가나안 땅에 입성하자마자 할례를 행한 거라 가난한 백성은 아직 살필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다 남성들이 완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은 타이밍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앞에 또 우리 교회 앞에 멋진 것들을 준비해 놓고 순종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순종해야 새 역사가 시작되고 순종해야 새 일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순종해야 우리의 삶에 수치가 거둬져가요. 성도로서의 수치가 있어요. 여러분 목사도 수치가 있어요. 제가 말씀을 정말 힘있게 전하는데 이 말씀이 성도의 삶에 안 이루어져요. 성도들이 막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그러면 여러분은 제 표정을 다 보지 못하겠지만 저는 정말 어찌할 줄 모르겠어요. 부끄럽기도 하고 속이 막 복잡하기도 하고 어떨 때 내가 이렇게 목회를 정말 내가 계속해야 되나 고민하기도 하고 목회한 지가 3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그래요. 순종하지 않으면 목회자에게도 수치가 있어요. 그런데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수치를 거둬가지 않아요. 순종하는 공동체의 수치를 걷어가고 순종하는 성도에게 수치를 거둬갑니다. 우리는 항상 능력이 부족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목사님 저는 저는 힘이 없어서요. 목사님 우리 교회는 돈도 없었어요. 목사님 우리 가정은 뭐가 없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돈도 부족한 것도 아니고 순종이 부족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돕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돕는 거예요. 하나님이 손이 짧은 것이 아니라 짧아서 못 도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도우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순종할 때를 기다리는 거예요. 여러분 앞에 서서 언제 순종할까 그 때와 그 방법을 지금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순종하면 예비한 것들을 주시려고 순종, 예비한 것들을 축복으로 주시려고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명령에 우리가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 교회가 가장 순종해야 될 사명은 뭘까요? 전도인 거죠. 전도와 기도 두 가지예요. 20일 남은 50일 기도 학교와 이제 한 두 달 가까이 남은 행추카 여러분 주버에 이런 것이 늘 꽂혀요. 다음 주까지 아마 고칠 거예요. 근데 꽂는 저도 마음이 엄청 부담스러워요. 왜 제가 사람들의 반응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거든요. 봉투를 헌금 봉투도 우리가 절기 때는 꼭 꽂아드리죠. 잊어버리거나 하지 말라고 이것도 마음에 늘 주보를 열어볼 때마다 부담이 돼요. 이거를 계속 성도들이 알아서 봉투를 가져와 헌금을 하면 안 될까 이 생각도 하다가 이것도 그냥 놓아두면 그냥 가지고 가서 VIP를 적어서 제출하면 얼마나 좋을까 온 생각을 다 하고 제가 주부의 삭제예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막 고민 없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부담되어도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과 우리에게 우리 교육게 원하는 미션은 두 가지예요. 기도와 전도 기도로는 요즘 가끔 저를 놀라게 하시니까 하나님도 아마 놀라실 거예요.
왜 이렇게 많이 왔지? 이렇게 그건 이제 여러분 순종하기 시작하셨으니까 이번 주 다음 주 한 남은 20일 동안 그런 일들이 몇 번 더 일어날 거라고 믿어요. 할렐루야
두 번째로는 전도의 미션에 순종하는 거죠. 여러분 순종합시다. 저도 전도하면 정말 힘들어요. 저 구미에 누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요즘 옆에 CU에 있는 사장님한테 음식도 갖다 주고 음식 얼마나 파는 게 많아요. 음식도 갖다 주고 인사도 하고 그 앞을 청소한 건 한참 됐어요. 청소도 하고 뭐 지워주고 왜요? 저도 전달 대상이 이미 15년 살다 보니까 많지를 않아요. 그래서 주로 거래하는 분들을 지금 VIP로 두고 기도하고 있어요.
저도 순종하는 사명인 거예요. 여기에 사명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제 목회와 제 삶도 축복하시는 겁니다. 확실하건데 지금의 우리의 미션은 기도와 전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번 따라 하겠습니다.
지금은 순종할 때입니다. 할렐루야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