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배운 수업에 대학 복습이라고나 할까요,, 인터넷에서 찾아봤어요 ^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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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파는 정치적인 결정에 있어서 원로원의 권위가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서 대표자는 술라와 키케로를 들수가 있습니다.
민중파는 이와 달리 정치적인 결정에 있어서 원로원보다는 민회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서 대표자는 카이사르와 마리우스를 들수 있습니다.
원로원파와 민중파가 생겨난 원인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그라쿠스 형제는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과 민회를 이용하여 개혁을 시도하다 실패하였으나 이는 후에 민중파가 생겨나게된 원인이 된 것입니다.
마리우스는 평민출신의 장군으로서 유구르타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위세를 떨쳤고 이후 군제개혁을 통해 무산자를 지원병으로 채용하게 되어 종전의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마리우스는 병사들이 퇴역한후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고 병사들은 무력으로서 지지하는 것 이외에 민회의 투표권을 통해 마리우스의 큰 지지자가 됩니다.
마리우스는 이후 술라와의 다툼으로 아프리카로 도피했다가 술라가 미트라다테스와 전쟁중인 틈을 타 로마에 돌아와 술라파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게 됩니다.
마리우스는 술라가 복귀하기 얼마전에 병사하게 됩니다.
술라는 몰락한 귀족집안 출신으로 그 역시 유구르타 전투에서 술라의 막료로 공을 세웁니다.
킴브리 족과의 싸움, 동맹시 전쟁 등에서 공을 세워 집정관에 선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정벌군의 지휘를 둘러싸고 마리우스 일파와 대립하게 되자 로마로 진군하여 호민관 술피키우스를 살해하고 마리우스를 아프리카로 추방해 버립니다.
그가 미트라다테스 정벌에 나선 사이 마리우스가 복귀하여 정권을 잡자 미트라다테스와 휴전을 맺고 귀환하여 마리우스파를 몰아냅니다.
이 과정에서 살생부를 작성하여 체제에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등 공포정치를 펼칩니다.
술라는 독재관이 되어 로마를 통치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호민관과 민회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원로원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후 독재관을 사임하고 은퇴해 버립니다.
술라는 원로원 지배체제 강화를 위해 당시까지의 공직 취임에 있어서의 나이 제한을 명확히 규정하여 지키게 합니다.
하지만 이는 후에 유명무실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민중파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술라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술라의 체제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폼페이우스로 그는 술라의 체제가 무너지는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술라의 체제는 나이 제한을 지키고 연공 서열에 의한 국가 경영이었으나 당시 혼란한 국경상태에서 폼페이우스만한 장군이 없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에 전선의 방위를 위해 대권을 부여받기도 합니다.
카이사르는 유서깊은 귀족집안 출신이지만 정치에 있어서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낸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술라에 의한 민중파의 숙청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카이사르도 숙청 대상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술라 주변의 사람들은 이를 만류했고 술라도 어쩔수 없이 카이사르를 죽이지 않고 카이사르에게 민중파의 거두 킨나의 딸인 아내와 이혼하라고 합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술라의 명령을 거부하고 로마에서 달아나게 됩니다.
술라 시절 민중파로 불리우던 사람들 대부분이 숙청 당했기 때문에 살아 남은 사람중 민중파로 이끌어 나갈 인재로 카이사르가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정책 결정 기관으로서의 기능에 있어서 지나친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인데 이는 원래 집정관에게 원로원이 권고를 하여 사안을 처결한다는 형식이었으나 이 시대에는 원로원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원로원 최종권고'는 국가 반역죄에 있어서 선포되며 이는 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단죄하는 형식이 취해졌습니다.
원로원이 본래 취지에서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기능을 약화시키려 했고 이 과정에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의 삼두정치가 행해지게 됩니다.
이후 크라수스가 죽은후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는 원로원파의 공작으로 인해 깨져 내전이 발발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의 수를 900명으로 늘려 갈리아 속주의 로마 시민권자에게도 원로원 의원 자리를 주는 등 원로원을 약화시키는데 주력하고 로마를 새로운 통치체제, 즉 제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파르티아 원정을 나가기 얼마전에 브루투스 일당에 의해 암살되게 됩니다.
키케로는 제2계급인 기사계급 출신으로서 로마가 아닌 지방출신의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와 아테네에서 공부했고 그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 계기는 변호사로서입니다.
당시의 변호사는 정계진출에 있어서 군대와 더불어 엘리트 코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변호사로서 명성을 쌓은 후 정계에 진출했고 원로원 의원에 이어 집정관에 선출되기에 이릅니다.
키케로가 집정관에 있는 동안 카틸리나의 음모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키케로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이용하여 카틸리나의 음모를 분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원로원 최종권고의 문제성에 대해 역설하나 카토(소 카토)의 반론으로 원로원 최종권고가 발효되어 카틸리나 일파에 대한 사형이 집행됩니다.
키케로는 무기가 아닌 필설로서 로마를 평안하게 했다는데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고 원로원파의 중심인물로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의 내전에서 폼페이우스가 패해 카이사르가 승리자가 되자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 암살 이후 브루투스 일파를 공화제를 위한 영웅들이라 하며 그들에 대한 지지를 표했고 이후 안토니우스를 탄핵함으로서 그의 원한을 사게 되어 안토니우스의 부하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카이사르와 키케로는 각각 민중파와 원로원파로 나뉘어지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카이사르는 제정파, 키케로는 공화파로 보는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