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교회는 오늘 교회의 위대한 학자이자 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완성한 성인 아우구스티노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축일 하루 전인 어제 8월 27일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 축일입니다. 어제가 주일이라 기념일을 건너갔지만 교회가 기억한 성녀 모니카의 아들로서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과 이단 종교인 마니교에 빠져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걸은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신심으로 회개하여 사제가 되었으며 주교 암브로시오의 뒤를 이어 히뽀의 주교로 활동한 그는 이성의 탁월한 능력을 통해 교회의 교리적 기초를 완성한 성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기억하는 오늘, 제 1 독서의 말씀은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편지 시작입니다.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를 향해 다음과 같이 인사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1테살 1,2-5)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그들이 보여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 그리고 희망의 인내를 기억한다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향주삼덕, 곧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대표되는 것으로서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느님께 대한 세 가지 덕,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지키며 살아감으로서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하느님의 놀라운 힘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였음을 밝힙니다.
한편 오늘 복음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반어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반복적으로 불행의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런 불행을 초래한 이유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표현을 빌어 이야기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위선과 위악을 눈이 멀어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자신의 그 같은 처지와 상황을 모두가 다 알고 있음에도 유독 자신만 그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인도자의 역할을 하고자 덤벼들고 있는 상황.
이 안타까운 상황을 두고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뿐만 아니라 그를 믿고 있는 모두가 함께 불행해지는 것이라 저주의 말씀을 퍼붓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일 발생하고 만 것일까?
우리는 신체구조상 우리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거울에 비쳐지 모습으로만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외적인 모습은 거울에 비쳐진 모습으로 인지될 수 있지만, 우리의 내적인 모습은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현재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라는 거울이 내 영혼의 상태, 내 내면의 상태를 비추어 바라보게 해 주는 유일한 거울이 되어 줍니다. 그래서 내가 맺고 있는 관계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계라는 거울을 통한 이 비추임의 시간을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나의 있는 그대로의 민낯은 내가 보고 싶지 않고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대면해야만 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낼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지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되며, 그것을 시작으로 하느님이 원하고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면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비난받는 이들의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작업을 거부하고 외면한 자들이 마주하게 될 처참한 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곁에 있는 이웃 형제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 사랑의 표현으로 그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임을,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이임을 증명합니다. 내 바로 곁에 있는 이웃과 나누는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꽃을 피우며,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과의 사랑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내 곁에 이웃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그들이 설사 나와 마음이 맞지 않더라도, 또 그들이 설사 나에게 미움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들을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십시오. 이웃 형제와의 관계 안에서 피어나는 이 사랑의 작은 노력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이, 그 분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이 전하시는 이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