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세우라]
삼상 8:1-22
성경은 차례 자체가 구속사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출애굽을 통해 재창조하여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통해 우리를 양육하셨습니다. 이어 여호수아에서 전쟁마다 승리하게 하시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시대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부적처럼 여겨 20년 이상을 빼앗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엘리제사장시대를 겪고, 사무엘을 통해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영적각성도 이루어지며 올바른 기도를 하게 되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겨 이제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으로 결론 나야 하는데, 도리어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에게 더 큰 권세를 달라고, 열방과 같은 왕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른 제목은 “떼 부리는 기도”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왕을 세우고 싶고 떼를 부리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우리의 기복신앙 깊은 곳에 내 자녀를 왕으로 세우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성경은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의 악함에 대해 엘리가 아들을 하나님보다 중히 여겼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사무엘도 그의 의로운 삶과는 달리 장자 요엘(여호와는 나의 힘)과 아비야(여호와는 나의 아버지)는 사무엘의 뒤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자녀교육이 중요하지만 신앙은 철저히 개인 구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영혼으로 좋고 나쁜 것이 없고 힘든 자녀일수록 상급이 크며 좋은 자녀일수록 도리어 위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삶의 결론으로, 자녀교육의 기본은 부모의 신앙고백입니다. 자녀를 주 안에서 객관적으로 보고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 오직 구원이 목적이 되는 사랑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곧 나이고, 내가 우상이기에 쉽지 않습니다. 자녀도 고난이 와야 믿게 된다는 것에 ‘옳소이다’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의 왕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린 분은 사무엘 속에 계신 하나님이었는데 블레셋도 이기고 먹고 살만하니 사무엘의 아들을 빌미로 사무엘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대단한 인간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이 어떤 말을 해도 안 들을 것을 아셨고, 또한 창세기49장과 신명기17장을 통해 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나 그들의 동기가 악하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왕을 세움으로 그들을 처벌하십니다.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성도는 항상 조심하고 망할 것 같이 조심해야 함에도 교회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꼭 하나님의 뜻이고 자신의 사명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큐티를 하면서 늘 자신의 죄만 치열하게 보면 됩니다. 사무엘 선지자처럼 내가 옳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왕 세우는 자에게 혹독한 실패가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백성이 세운 왕이 백성을 압제하고 백성의 모든 소유를 착취하며 무엇보다 백성이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 하십니다. 내가 세운 배우자, 자식, 돈, 권세, 가치관의 세상 왕이 결국은 나를 압제하며 착취합니다.
넷째, 우리가 세상 왕을 세우는 이유는 말씀이 들리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백성이 듣기를 거절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돈이 있어야 되고, 학벌이 갖춰줘야 하며, 부자남편과 불신결혼 하겠다고, 공부 잘하는 자녀가 최고라며 말 듣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가짜 왕으로 망해봐야 진짜 왕을 찾는 인생의 연약함을 아시고 왕정을 예비하셨으며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때가 아니니 기다리시는 겁니다. 떼 부리는 기도의 응답은 그저 외형적인 응답일 뿐입니다. 사무엘은 자기의 생각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가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삶의 절정에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사모되고 말씀이 들려 진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