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아함불자가 보는 반야심경 5. / 5온이개공" 에 대한 설명할 자리인데
'될수록 짧게'를 우선하다보니 그 과정에 오해와 곡해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여 아까운 지면이지만 <심경>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돌아보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공부와 관련된 얘기를 쏟아내련다.
<심경> 에서 12처와 18계, 5온의 순서는 공중 무색.. 으로
무 5온, 무 12처, 무 18계, 순서로 되어 있는데 왜 여기서는 그것을 무시하고
12처, 18계, 5온 순으로 설명했는가?..
그 이유는..
일반 세상 관점에서 볼 때 5온은 부정할 수 없는 실유다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작자인 나와 대상, 이 모든 게 실유가 아니라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가..
그럴 경우 5온 속에 6근이 있고, 18계는 여러 세계가 된다.
하지만 12처가 실유가 아닌 마음을 연해 생긴 것[심연생]이라는 세존의 가르침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면
12처에서 18계가, 18계에서 5온이 생기는 것을 이해할 길이 열린다.
'일체유심조'를 이해했다 하여 12처는 '심연생'임을, 12처에서 18계가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아니다.
(12처와 18계, 5온은 각자의 특징을 갖고 상대 근기따라 설한 게 아니라..
12처에서 세계와 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롤 보여주는 게 18계와 5온 설명이다)
12처는 6근6경과 이름이 똑 같은데.. 이름만 똑같은 게 아니라 작용이 똑같다.
'안과 색이 만나 안식이 생긴다'는 경을 보면서..
불제자들은 안근과 색경이 만나 안식이 생기다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안입처와 색입처가 만나 안식이 생긴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일부 아니 대다수의 불자는 6근6경은 12처와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잡아함경>에 불교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불제자들에게 세존께서는
"12처는 심연생"이라 가르치신다.
부처님 당시 조건은 보통 사람들이 12처가 심연생임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러나 현대는 물질을 쪼개어 물질이라 불릴 수 없는 지점까지 증명하고 있는 시대이다 보니..
'12처는 심연생' 이라는 사실을 체험으로 증명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는 이해는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런 시대이긴 하나 12처는 심연생을 이해하는 이들이 다수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고..
[심연생]은 여전히 이해가 어려운 불법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심연생 견해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이 있으니
과학의 법에 의지하는 유물론자들이 그들이고
하느님처럼 신을 실체적 존재로 믿고 있은 유신론자들이 그들이다.
12처와 6근6경과 차이는 무엇인가?..
6근은 5온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감각기관이며 능력이고, 6경은 6근과 관계없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요,
12처는 5온이 아닌 살아있는 마음[생명]에 의지하고 있다는 게 결정적 차이다.
그러기에 6근6경은 실유라 하고, 12처는 마음에서 생긴 마음임을 알 수 있다.
하여 <심경> 설명 시..
불멸 후 12처를 6근6경 실유로 해석하는 상좌부가 생겨났고,
그것을 부정하는 반야부는 상좌부에서 가르치는 실유인 온처계는 부처님께서 가르친것 과 다르기에
정법의 눈[공]으로 보면 상좌부 온처계는 부정되어.. 그런 것은 "없다"고 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 효진 설명이 부족해서인지.. 댓글을 보면 요령부득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문제는 문제인데 잘 풀어갈 자신이 없다.
의심으로 뭉친 마음을 풀어내는 건 정말 힘든 일이므로..
한편
석가세존은
고멸을 하려면
마음은 깨쳐야 할 것으로,
몸은 복종받아야할 것으로 가르친다.
해서 계율은 몸의 복종을 목적으로
선정은 몸의 복종과 마음의 깨짐[깨침]을 목적으로 하고
반야인 지혜는 복종과 깨침을 해야하는 목적과 방법이 내용이다.
그리보면 상좌부 불교는 계정혜 전통을 잘 지켜온다 하겠는데..
대승불교에서 특히 선종은 선정만 강조하고 있을뿐.. 계율은 심각하게 파계된 수준이 아니냐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요새는 재가자의 수눈이 높아져 교학을 깊이 공부하는 자들은 불교학자라 불리며,
재가 수행자도 적지 않다.
그럴 경우 계율은 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불교 사이트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이십 여년 전에 비하면 양반이랄 수 있지만..
자신과 다른 기반을 갖고 있으면.. 말은 사납지 않은 듯 하지만
댓글 등으로 소란을 피워 상대가 사라지도록 한다.
그와 같은 일이 판을 치는 것은 바로 계율에 대한 실천 부족이니..
못난 인간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질책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온처계에서 처는 분명 12처인데 망설임없이 6근경으로 설명한다
말은 처로 하지만 뜻은 근경으로 새기고 있다는 것.
처와 근경의 차이는 사소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차이를 사소하게 여기는 편견은 어디서 생긴 것인가?..
12처와 6근경은 별 차이 없는 것으로 설명하는 곳이 상좌부 시대 나온
세친 논사의 <구사론>이고, 붓다고사 논사의 <청정도론>이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수많은 논서 가운데 고작 두 권인데 하며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심각성은 이 두 논서가 현대에 이르는 모든 불교 교리에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방불교인 상좌부는 물론 대승불교와 선종 역시 <구사론>에 입각한 근본교리를 배우고 있다.
그러니 12처와 6근경의 결정적인 차이를 말해도
마치 <구사론>이나 <청정도론>으로 세뇌당한 자들처럼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함불자'라 한 이유는
12처를 마음에서 생긴 것 곧 심연생을 의심하지 않는 불자라는 의지를 보여준 것인데..
첫 반응이 아함이든 니까야든 무슨 교학이든 차이가 없는데.. 하는 거였다^^
그는 선 수행을 하는 자이고..
선 수행이라..
선은 불립문자가 바탕이다
그러기에 교학을 말하는 척하다가도 '말은 말일 뿐'이라는 메아리를 중얼거리며 불립문자로 결론을내린다
말이 전부라 할 수 있는 교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선 수행자는 침묵해야만 한다
마음에 들던 아니던
12처는 실유인 존재가 아닌 마음에 생겨 있는 존재가 된다
그 말은 12처는 비존재라고 하는 이유가 되는데..
'비존재'라는 말과 '마음에 생겨 있는 존재' 라는 설명이 모순처럼 보이지 않는가?..
존재냐 비존재냐 하는 언어보다..
[심연생]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해하고.. 이해한 바를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12처가 6근경과 달리 심연생이라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또는
심연생이 아닌 실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져야
둘이 별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할 것 겉은데..
그들은 둘 차이를 이미 깨닫고 있다는 듯 연기를 피우며..
"니가 뭘 아세요 처음부터 잘못알면서" 하는 식으로 분위기를 망쳐놓는다.
그럴 바에는..
교학에 대해 돌아서서 비웃음 짓는 자는 "아함불자가 보는.. " 여기서 떠나길 부탁한다.
교학 공부에 당신들은 도움이 아닌 피해만 줄 뿐이다.
반야부 제자에게 상좌부는, 또는 상좌부에게 반야 불자는 안티 대상이지만
교학하는 자리에 불립문자를 세우려는 자는 안티도 아닌 분위기 파괴자일 뿐이다
교학안에서만 해도
상좌부, 유식, 화엄, 법화 그리고 반야 등이 있어
이들 끼리만도 융합하기 쉽지 얺은데
전혀 결이 다른 선종에서나 통하는 설까지 섞이면
누가 정리할 수 있으랴
선수행을 하지만 교리를 알고 교리를 논하려면
선종의 옷을 벗고 나서야한다
대승경전인 화엄경에 일체유삼조가 나오는데 그 시발이 어디인지 밝혀준 분은 이중표 교수다.
내가 알기로 동양 삼국 교학자 가운데 12처는 심연생임을 최초로 밝혀 발표한 학자가 이중표 교수라는 것.
근대 불교 교학은 일본이 최고라 하니 혹 일본 학자가 심연생을 이중표 교수보다 먼저 발견하고 발표한 게 있다면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만일 그것을 증명해 주는 분이 나타나면.. 두고두고 감사하는 자세로 살겠습니다..()..
나는 12처는 심연생임을 밝혀..
"아함불교[근본불교]는 심학"임을 처음 증명한 분은 이중표 교수님이라 알고 있다.
이렇듯 <잡아함경>에 나오는 삼연생을 발견한 것은 20세기 말엽으로..
그리 오래 전이 아닌데
내가 심연생을 말하면 상대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것 처럼 자리를 깔고
심연생 뜻이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고 나에게 물으며.. 오히려 내게 훈수를 두려한다^^..
앞으로 나오는 무 4성제와 12연기 조차도 내가 설명하면..
뻔뻔함으로 무장하고 깐죽거리거나 훈수를 두려하겠지..
4성제 등은 각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코끼리 만지고 그것을 설명하는 장님 말이 부딪치지만.. 틀린 것은 아닌 것처럼..
"당신(효진)은 알고 있나요".. 간주를 넣어가며..
나는 우리 전통 불교인 선종이 우뚝 서 세계인이 존경하는 불교로 자리잡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 되려면 선종에 대한 교학적 접근이 3D로 연구되어 세계에 발표되어야 하리라.
수행자는 수행하는 목적을 잊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면 된다.
세존과 모든 대중들은 신서림에 도착해 나무 아래에 앉으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손에 나뭇잎을 움켜쥐고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손안의 나뭇잎이 많은가, 저 큰 숲의 나뭇잎이 많은가?"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손안의 나뭇잎은 매우 적습니다. 저 숲의 나뭇잎은 한량이 없어 백천억만 배나 되며, 나아가 숫자로도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모든 비구들아, 내가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스스로 본 법을
남에게 설한 것도 이 손안의 나뭇잎과 같으니라.
왜냐 하면 그 법은 이치에 도움이 되고, 법에 도움이 되며, 범행에 도움이 되고, 밝음[明]·지혜[慧]·바른 깨달음[正覺]이며, 열반으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잡. 365. 신서림경> 에서
그런데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새존은 열반하시기 전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있으면 생각해 보시길
<신서림경>에 나오듯 세존께서 설한 것은 "이 손안의 나뭇잎" 이 사실일까? 아니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가 사실인지를..()..
첫댓글 요새 이웃 카페에 "아함불자.. " 올리고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묵묵부답이지만 댓글을 다는 자는 일단 안티로 무장하고 달려든다.
안티의 핵심은 지 생각과 다르다는 것.
어느 카페는 니까야가 아닌 내용은 아예 락을 걸어 버렸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불교라는 커다란 범주는 같지만.. 니까야 세계도 잘 모르는데..
아함이나 반야니 화엄이니 하는 세계를 섞어 놓으면 죽도 밥도 아닌 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공부를 할 때 개론부터 시작하는 이유도.. 시대별로 종파별로 주장하고 가르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함이다.
그런데 천방지축인 어린 송아지들은 불교라는 말만 보이면 죄다 지가 아는 거[지가 불교]랑 같은 줄 알고
그 하나로 달려든다.
그러다 [지가불교]랑 다른 것처럼 보이면.. 그때부터 상대는 사도나 외도가 된다.
물은 흘러 하류로 나아가지만.. 상류,중류, 하류는 항상 있다.
칭찬.. 그럴만 한 게 없으니 문제인데.. 띠워주고.. 그러다 군밤 주는 방편을 섞어 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럴 수준이 아니니..
옆 가지에 쏠려 본 줄기를 놓칠까.. 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