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장>
嶓冢에 導漾하사 東流爲漢하며 又東爲滄浪之水하며 過三澨하여 至于大別하여 南入于江하며 東匯澤하여 爲彭蠡하며 東爲北江하여 入于海하니라
파총산에 양수를 인도하시어 동쪽으로 흘러 한수가 되며, 또 동쪽에서 창랑의 물이 되며, 삼서를 지나 대별산에 이르러 남쪽에서 강수로 들어가며, 동쪽에서 돌아 못에 모여 팽려가 되며, 동쪽으로 북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느니라.
澨 물가 서, 물가를 메워 돋운 땅 匯 물이 돌아 합할 회
○漾은 水名이니 水經에 曰漾水는 出隴西郡氐道縣嶓冢山하여 東至武都라 常璩曰漢水有兩源하니 此東源也니 卽禹貢所謂嶓冢導漾者요 其西源出隴西嶓冢山會泉하니 始源曰沔이오 逕葭萌하여 入漢이라하니 東源은 在今西縣之西하고 西源은 在今三泉縣之東也라 酈道元이 謂東西兩川은 俱出嶓冢하여 而同爲漢水者 是也라 水源發于嶓冢爲漾하고 至武都爲漢하고 又東流爲滄浪之水라 酈道元이 云武當縣北四十里漢水中에 有洲曰滄浪洲요 水曰滄浪水 是也라 蓋水之經歷은 隨地得名하니 謂之爲者는 明非他水也라 三澨는 水名이니 今郢州長壽縣磨石山에서 發源하여 東南流者를 名澨水라하고 至復州景陵縣界來를 又名汊水하니 疑卽三澨之一이라 然이나 據左傳컨대 漳澨薳澨는 則爲水際하니 未可曉也라 大別은 見導山하니 入江은 在今漢陽軍漢陽縣이라 匯는 回也라 彭蠡는 見揚州하니라 北江은 未詳이라 入海는 在今通州靜海縣이라
○양수는 물 이름이니, 『수경』에 “양수는 농서군 저도현 파총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무도에 이른다.”고 하니라. 상거(291년 ~ 361년, 동진 때 사람, 字는 道將, 역사학자, 저서는 중국 서남방 지역의 풍토와 백성들의 삶을 기술한 『華陽國誌』가 있음)가 “한수는 두 개의 근원이 있으니 이것은 동쪽의 근원이니, 곧 우공에서 이른바 파총산에 양수를 인도한다는 것이고, 그 서쪽의 근원은 농서군 파총산 회천에서 나오니 시원을 면수라 하고, 가맹을 지나서 한수로 들어간다.”고 하니, 동쪽의 근원은 지금의 서현의 서쪽에 있고, 서쪽의 근원은 지금의 삼천현의 동쪽에 있음이라. 역도원이 “무당현의 북쪽 40리 한수의 가운데에 모래톱이 있으니 창랑주라 하고 물을 창랑수라 한다.”는 것이 이것이라. 대개 물의 경력은 지역을 따라 이름을 얻으니 ‘된다(爲)’고 한 것은 다른 물이 아님을 밝힌 것이라. 삼서는 물 이름이니, 지금의 영주 장수현 마석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것을 서수라 하고 복주 경릉현 경계에 이르러 오는 것을 또한 차수라 하니 아마도 곧 삼서의 하나인 듯하니라. 그러나 『춘추좌전』(文公16年, 宣公4年, 昭公二十三年)을 살펴보건대, 장서와 원서는 곧 물가가 되니, 알 수 없음이라. 대별산은 도산에서 보이니 강으로 들어간 곳은 지금의 한양군 한양현에 있음이라. 회(匯)는 돌음이라. 팽려는 양주에 보이니라. 북강은 자세하지 못하니라. 바다로 들어간 곳은 지금의 통주 정해현에 있음이라.
○今按彭蠡컨대 古今記載에 皆謂今之鄱陽이라 然이나 其澤在江之南하여 去漢水入江之處 已七百餘里요 所蓄之水는 則合饒信徽撫吉贛南安建昌臨江袁筠隆興南康數州之流하니 非自漢入而爲匯者라 又其入江之處는 西則廬阜요 東則湖口로 皆石山峙立하고 水道狹甚하니 不應漢水入江之後七百餘里에 乃橫截而南하여 入于鄱陽하고 又橫截而北流爲北江이라 且鄱陽은 合數州之流하여 豬而爲澤하니 泛溢壅遏이오 初無仰於江漢之匯而後成也라 不惟無所仰於江漢라 而衆流之積이 日遏月高하니 勢亦不復容江漢之來入矣라 今湖口橫渡之處는 其北則江漢之濁流요 其南則鄱陽之淸漲이니 不見所謂漢水匯澤而爲彭蠡者라 鄱陽之水 旣出湖口하니 則依南岸하여 與大江相持以東하니 又不見所謂橫截而爲北江者라 又以經文考之컨대 則今之彭蠡는 旣在大江之南하니 於經則宜曰南匯彭蠡요 不應曰東匯며 於導江則宜曰南會于匯요 不應曰北會于匯라 匯旣在南이면 於經則宜曰北爲北江이오 不應曰東爲北江이니 以今地望參校면 絶爲反戾라
○이제 팽려를 살펴보건대, 고금의 기록에 모두 지금의 파양이라 이르니라. 그러나 그 못은 강의 남쪽에 있어 한수가 강수로 들어가는 곳과의 거리가 이미 7백여 리이고, 모인 곳의 물은 요신 휘무 길감 남안 건창 임강 원균 융흥 남강 등 여러 주의 물이 합하였으니 한수로부터 들어와 돌아 모인 것이 아니니라. 또한 강수로 들어온 곳은 서쪽은 곧 여부이고, 동쪽은 곧 호구로 모두 석산이 우뚝 서있고, 물길이 매우 좁으니, 한수가 강수로 들어간 뒤 7백여 리에서 마침내 가로질러 남쪽으로 파양으로 들어가고 또 가로질러 북쪽으로 흘러서 북강이 되었다는 것과는 응하지 않느니라. 또 파양호는 여러 주의 물과 합하여 모여서 못이 되니 넘쳐서 막은 것이고, 처음부터 강수와 한수가 합한 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따를 수 없음이라. 오직 강수와 한수만을 따른 바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물이 모인 것이 날로 막히고 달로 높아졌으니 기세가 또한 다시는 강수와 한수가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음이라. 이제 호구를 가로질러 건넌 곳은 그 북쪽은 곧 강수와 한수의 탁류이고, 그 남쪽은 곧 파양호의 푸른 넘실거림이니, 이른바 한수가 모여 못이 되고 팽려가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없음이라. 파양의 물이 이미 호구에서 나왔으니 곧 남쪽 강안에 의지하여 대강과 더불어 서로 유지하면서 동쪽으로 흐르니, 또한 이른바 가로질러 북강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없음이라. 또 경문을 살펴보건대, 지금의 팽려는 이미 대강의 남쪽에 있으니, 경문에 곧 마땅히 남쪽에서 돌아 팽려로 모였다고 하고, 동쪽에서 돌아 모였다고 한 것과는 응하지 않으며, 강을 인도함에 곧 마땅히 남쪽에서 돌아가서 모였다고 하였고 북쪽에서 돌아가서 모였다고 한 것과는 응하지 않음이라. 돌아 모인 못물(匯澤)이 이미 남쪽에 있으면 경문에서 곧 마땅히 북쪽에서 북강이 되었다고 할 것이고, 동쪽에서 북강이 되었다고 한 것과는 응하지 아니하니, 지금의 지형으로 참고하여 비교해보면 매우 어긋나게 되니라.
贛 줄 공, 하사할 공, 물이름 감 仰 믿을 앙, 따를 앙 漲 불을 창
今廬江之北에 有所謂巢湖者하니 湖大而源淺이라 每歲四五月間에 蜀嶺雪消하여 大江泛溢之時에 水淤入湖하고 至七八月하여 大江水落이면 湖水方洩하여 隨江以東하니 爲合東匯北匯之文이라 然이나 鄱陽之湖는 方五六百里니 不應舍此而錄彼에 記其小而遺其大也라 蓋嘗以事理情勢考之컨대 洪水之患은 惟河爲甚하니 意當時龍門九河等處에 事急民困하여 勢重役煩일새 禹親莅而身督之하시니라 若江淮則地偏水急하여 不待疏鑿하고 固已通行일새 或分遣官屬하여 往視亦可라 況洞庭彭蠡之間은 乃三苗所居요 水澤山林이 深昧不測이라 彼方負其險阻하여 頑不卽工하니 則官屬之往者도 亦未必遽敢深入이라 是以로 但知彭蠡之爲澤이오 而不知其非漢水所匯하며 但意如巢湖는 江水之淤而不知彭蠡之源爲甚衆也라 以此致誤하여 謂之爲匯하고 謂之北江이니 無足怪者라 然則鄱陽之爲彭蠡는 信矣니라
이제 여강의 북쪽에 이른바 소호라는 것이 있으니 호수가 크면서 근원은 얕으니라. 해마다 4, 5월 사이에 촉령의 눈이 녹아서 큰 강이 넘칠 때에 물이 호수로 흘러 들어가고, 7, 8월에 이르러 큰 강의 물이 떨어지면 호수물이 빠져서 강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니 동쪽으로 돌고 북쪽으로 돈다는 문장과 맞느니라. 그러나 파양의 호수는 사방 5, 6백 리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기록함에 그 작은 것을 기록하고 그 큰 것을 버린 것과는 응하지 않느니라. 대개 일찍이 사리와 정세로써 살펴보건대 홍수의 재난은 오직 하수가 심하니, 아마도 당시에 용문과 구하 등지에 일이 급하고 백성이 시달려서 형세가 중하고 부역이 괴롭기 때문에 우가 친히 가서 몸소 감독하셨으리라. 강수와 회수 같으면 땅이 기울고 물이 급하여 소통시키고 뚫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진실로 이미 통하여 흐르기 때문에 혹 관속을 나눠 보내서 시찰케 하여도 가하니라. 하물며 동정호와 팽려호의 사이는 더구나 삼묘가 거주했던 곳이고, 수택과 산림이 깊고 어두워 헤아리기 어려웠느니라. 저들이 그 험조함을 믿고서 완악하여 공사에 나아가지 아니했으니, 관속들의 간 자도 또한 틀림없이 급하게 감히 깊이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라. 이로써 다만 팽려가 못이 된 것과 알았지 그것이 한수가 돌아서 된 것이 아님은 알지 못했으며, 다만 아마도 소호가 강수가 흘러들어가서 된 것처럼 팽려의 근원이 매우 많다는 것은 알지 못했음이라. 이로써 잘못되어 ‘돌아서 되었다’라고 말하고 북강이라고 말했으니 족히 괴이할 것은 없음이라. 그렇다면 파양이 팽려가 됨은 확실하니라.
출처 : 『書經講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