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피레네산맥만 잘 넘어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라고 한다. 그만큼 산이 거대하고 험난하며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그곳에서 조난을 당하거나 체력이 고갈되어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례를 종종 접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도 잘 해낼 수 있을지 가장 걱정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새벽에 길을 나서는 바람에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길로 이끄는 화살표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어찌어찌 무사히 한 고개를 잘 넘겼다. ‘걱정한 것보다는 쉽고 생각한 것보다는 어렵다.’라는 경험자들의 말이 딱 어울렸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순간에 뜻하지 않은 낭패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프랑스 길의 첫 관문인 피레네산맥은 두 갈래 즉, 나폴레옹 길과 발까를로스 길로 나뉜다. 나폴레옹 길은 험준한 데다 날씨 변덕이 심해서 통상 겨울철에는 닫았다가 4월 1일부터 연다고 한다. 반면 발까를로스 길은 우회도로가 있어 상대적으로 좀 더 쉬운 길이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종교적인 신념도 있지만 대부분 도전 의식으로 출발하는 것이라 나폴레옹 길을 걷고 싶어 한다. 하지만 길이 막혀 발까를로스 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며칠 전부터 폭우가 쏟아진 바람에 산길이 얼어붙어 트레킹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어제 만난 사람 중에는 혹시 길이 풀릴 것을 기대해 다음 날 출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내게도 아쉬움이 남았다. 수없이 피레네산맥을 넘는 상상을 했었기 때문이다.
비가 갠 아침은 상쾌했다. 얼굴에 스치는 기운이 온통 푸르렀다. 안개가 뭉실뭉실 피어나는 초록 사이로 예쁜 마을이 빠꼼히 얼굴을 보여 주었다. 푸른 밀밭과 목장이 펼쳐진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 소리와 흐르는 개울물이 만나 멋진 하모니를 이루었다. 신선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피레네 산자락을 걷는 일이 정말 기분 좋았다. 이곳이 머나먼 타국이 아니라 지리산 둘레길 어디쯤이나 되는 듯 정답기만 했다. 발까를로스라는 마을에 들어서니 큰 가게들이 몇 개 있었다. 그곳에는 등산객들이 꽤 보였다. 피레네란 요정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을 정도니 멋진 경관들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평생 돌아다녀도 다 볼 수 없는 지구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슈퍼마켓에서 물과 간식거리를 사고 나서 쉬고 있노라니 바욘 역에서 만났던 한국인이 지나갔다. 그는 튀니지 여행 중에 이곳으로 온 사람이었다. 함께 걸으며 여행담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악 소리가 났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다리에 쥐가 났거나 신경이 뒤틀린 것 같았다. 걷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남편은 가진 것을 모두 동원해서 다리가 풀리도록 도와주었다. 조금 나아지자 함께 천천히 걸었다.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은 상당히 지체되었으나 덕분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을 몇 개를 지나 목적지 절반쯤 왔을 때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보였다. 앞서가던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뭔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잘 몰라서 별 감흥 없이 경계를 벗어났다는 게 정말 아쉬웠다. 그곳엔 아무런 장치도 제재도 없었다. 새처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니 놀라웠다. 같은 나라인데도 철통같이 삼팔선을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는 무엇이란 말인가?
숨이 가쁘게 등성이를 오르고 나니 기념비가 몇 개 보였다. 오랜 역사와 전설이 깃들어 있는 산마루에서 그곳을 지나갔을 수많은 순례자를 떠올려 보았다. 긴 고리로 이어지는 인연을 느끼며 멀리 눈 덮인 피레네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추위가 밀려와 가지 못한 길의 미련을 떨쳐내 주었다. 이곳부터 내리막길이다. 목장 길과 숲길을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가볍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이 약 26km를 걸어 다다른 곳에는 중세의 신비를 간직한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이 우뚝 서 있었다. 스페인에서 만나는 첫 마을이었다. 몇백 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순례길이 활성화되면서 숙소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주변에는 매일 순례자를 축복하는 미사가 열리는 성당이나 레스토랑 등이 있었다.
스페인에서 맞이하는 첫날이자 공립 알베르게 이용이 처음이라 설렜다. 오스삐딸레로라 부르는 자원봉사자들이 힘들게 도착한 순례자를 악수나 포옹으로 따뜻이 맞이해 주었다. 그들은 미소를 띤 채 건물 구조와 규칙을 알려주고 침대를 배정하며 일회용 침대 커버와 순례 목적을 기록하는 종이를 나눠 주었다. 신발 안에는 신문지를 구겨 넣어 잘 마르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180개가 넘는 침대가 있었지만 늦게 도착한 바람에 우리는 지하에 묵게 되었다. 돌로 쌓아올린 오래된 벽에는 중세 시대 순례자들의 고단한 몸과 신앙의 열정이 깃들어 쌓인 듯 묵직해 보였다. 저녁 식사는 일곱 시에 모여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한 테이블에 열 명 정도 앉았는데 그만 감자가 떨어져서 먹지 못하고 짜디짠 대구 스테이크로 때워야 했다. 그것 때문에 순례길에서 함께 앉았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오 마이 포테이토!’라 인사를 나누며 웃곤 했다.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온 바람에 성당 미사를 놓쳤다. 첫날을 무사히 마친 것에 감사드리고 앞으로 펼쳐질 순례길을 축복받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그 후로도 정보를 몰라서, 상황이 안되어 놓치는 일이 종종 일어났고 생각지 못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날 새벽에 길을 나서는데 남편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새벽녘에 일찍 잠이 깨서 일어났다가 담배 피우러 밖에 나간 모양이었다. 뭔가 경고문이 붙어 있었지만 무시하고 나갔다가 들어오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가는 것은 자유로우나 들어오는 것은 누군가 열어주어야만 하는 시스템이었다. 바로 들어올 요량으로 스마트폰도 챙기지 못했고 피곤해 있을 봉사자를 깨우기 미안해서 냉장고처럼 차가운 댓바람을 맞으며 세 시간이나 떨었다고 한다. 그런 통에 감기에 덜컥 목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었다. 도저히 얇은 옷으로 한기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때야 벨을 눌렀단다. 나는 그때까지 세상 모르고 잠만 자고 있었다.
그는 코로나에 걸린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봐 사람을 멀리하느라 이중고를 견뎌내야 했다. 앞다투어 피어나는 들꽃과 경쾌한 가축들의 방울 소리도 아랑곳없이 콧물에 시달리고 기침으로 콜록거리며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걸어야 하는 고행이 시작되었다. 담배는 이래저래 해롭기만 하다.
첫댓글 버킷리스트에 한 줄을 차지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바람이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산티아나순례길 함께 걷는 것처럼 생생한 묘사에 대리만족 제대로 했습니다. 더군다나 배우자와 함께하다니요. 제게는 꿈같은 일이어서 한없이 부럽습니다. 잘 읽었어요.
선생님 여행길 신기해 하며 따라다녔습니다 . 고맙습니다.
정말 재밌어요. 고맙습니다.
에휴! 그놈의 담배.
고생 좀 하셨겠네요.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산티아고 가시더니, 작가가 되셔서 돌아오셨네요. 제가 산티아고 책 몇 권 읽었는데, 선생님 글이 더 재밌네요.
정말 표현도 멋지고, 같이 긴장하며 재밌게 읽었어요. 여행하면서 이렇게 풍부하게 느끼고 꼼꼼하게 기록하는 솜씨가 부러워요.
꼭 가보고 싶은 곳 산티아고,
언제쯤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먼저 순례합니다.
진짜 이번 글 엮어서 책을 내시면 좋겠어요. 감기 든 남편분이 가엽네요. 내내 고생하셨을 듯요.
나도 해외에서 문이 닫혀 발을 동동 구른 적이 있어 웃음이 나왔습니다.
정년하시더니 활활 나르시네요. 늦기 전에, 건강하실 때 많이 여행하시길 권합니다.
부부가 함께 걷는 순례 길 정말 부러워요. 꼼꼼한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길 위에 서리라.
다시 마음을 다집니다.
담배 때문에 선생님은 엄청 고생하셨을 텐데, 저는 왜 웃음이 자꾸 나오지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