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의 큰 섬으로 이뤄진 일본열도. 가장 북쪽에 있는 홋카이도(北海島), 가운데 긴 섬이 혼슈(本州), 혼슈 옆의 작은 섬이 시코쿠(四國), 그리고 가장 남쪽에 규슈(九州)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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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는 또 쓰시마(對馬島)를 비롯해 남쪽으로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 오키나와(沖繩) 등 1천400여 개의 작은 섬들을 아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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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와 시코쿠를 남쪽으로, 혼슈를 북쪽으로 양 섬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본의 지중해,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가 해상교통의 대동맥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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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500여년 전, 금관가야(김해)와 아라가야(함안)는 물론 백제.신라를 뒤로하고 왜와의 해상 교역권을 장악한 대가야.
당시 대가야는 금(동)관 등 장신구, 토기, 철을 일본열도에 뿌렸고, 야광조개와 스에키(須惠器;왜 토기), 바람개비 모양 청동기 장식(巴形銅器) 등 왜 문물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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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유물은 왜 야마토(大和) 왕권의 근거지인 나라(奈良)와 오사카(大阪)를 향해 흘러들었다. 특히 일본열도의 서쪽으로는 규슈 지방의 후쿠오카(福岡), 구마모토(熊本), 사가(佐賀), 가고시마(鹿兒島)현, 시코쿠 지방의 에히메(愛媛)현에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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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본열도에 나타나는 대가야 유물은 도대체 어떻게 전해졌을까. 경북대 박천수(고고인류학) 교수는 쓰시마에서 동해와 세토나이카이를 잇는 교통로 주변에 유물이 집중 출토되는 점에 주목, 대가야와 왜 사이의 활발한 교역활동의 결과로 분석했다. 즉, 대가야의 교역선이 세토나이카이를 헤치고 들어가 왜의 각 세력에 직접 문물을 전파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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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대가야에 자주 드나들었던 왜인이나 왜로 옮겨간 대가야인들(渡來人)이 전한 문물로 보는 시각도 일본 학계에 존재하고 있다. 이는 대가야 토기가 왜의 집단 유적지보다 무덤 속에서 주로 나오고 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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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 지방 도쿠시마(德島)현 도쿠시마대학의 사다모리 히데오(定森秀夫) 교수는 에히메현 이마바리(今治)시 가라코다이(唐子臺) 80지점에서 나온 토기를 예로 들어, "동일 기법으로 만든 뚜껑있는 굽다리접시가 2점 출토된 것으로 미뤄 유물 주인공은 도래인일 개연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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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지방의 서쪽 허리에 해당하는 구마모토현 야쓰시로(八代)시 류호쿠(龍北)정. 지역 사무소에서 5km쯤 떨어진 산기슭에 길이 62m의 대형 무덤이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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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노미야구라(物見櫓) 고분'. 앞쪽이 직사각형, 뒤쪽이 원형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양식이 일부 보이는 전방후원분은 200년대 말부터 500년대 말까지 축조된 전형적인 왜 지배층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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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를 뜻하는 이 무덤에 올라서니 200여년 전 에도(江戶)시대에 바다(八大海)를 메워 만든 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졌다. 왕이나 호족이 묻힐 만한 명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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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5년과 96년 류호쿠정사무소가 발굴한 이 무덤에서는 스에키를 비롯한 왜계 유물과 함께 대가야 양식 목짧은 항아리(短頸壺) 조각 2점, 손잡이 있는 그릇(把手附椀) 조각 1점이 나왔고, 금 귀고리 1점이 채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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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바깥에서 발견된 금 귀고리는 도굴과정에서 흘린 것으로 추정됐다. 한 쌍으로 묻혔을 귀고리의 다른 한 쪽은 어디에 있을까. 이마다 하루요(今田治代) 류호쿠정 교육위원회 문화재위원은 "위치나 규모, 유물로 봐 500년대 초반 규슈의 유력한 두 호족 중 한 일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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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다 위원은 야쓰시로 주변에 당시 토기를 만든 공인의 취락지나 무덤이 나타나지 않는 점을 들어 대가야 양식 단경호와 파수부완이 왜인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직접 만든 뒤 전해진 유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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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쓰시로시 류호쿠정의 또 다른 무덤, '오오노이와야(大野窟) 고분'. 가로로 입구를 낸 횡혈식(橫穴式)인 이 무덤은 현실(玄室) 길이가 5m, 폭 3.5m로, 왜 무덤 중 천장(높이 6m)이 가장 높은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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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것은 이 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널이 경남 의령(부림면)에서 확인된 경산리 고분의 돌널(石棺)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경산리 고분은 현실 안 거대한 돌널, 문지방 돌, 봉분(封墳)의 지붕 덮개돌(楫石)과 구분쌓기(段築) 등으로 봐 왜계 무덤 양식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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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야쓰시로시의 오오노이와야 무덤과 경남 경산리 무덤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야쓰시로시에서 북쪽으로 20km쯤 떨어진 타마나(玉名)시 '텐자야마(天座山) 고분'에서는 대가야 양식 귀고리가, 타마나시 기쿠수이(菊水)정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즈카보우즈(塚坊主)'에서는 대가야 양식 귀고리와 F자모양 말 재갈 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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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자 모양 재갈과 칼끝 모양 말띠드리개(杏葉)의 조합은 경북 고령과 경남 합천(옥전)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권 말장구 양식이다. 오사카를 기준으로 일본열도 서쪽에는 규슈 상당수 지역, 시코쿠의 에히메현, 혼슈의 시마네(島根)현과 와카야마(和歌山)현에 대가야 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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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에는 후쿠오카현 무나카타(宗像)시 '이케우라(池浦) 고분' '이이모리(飯盛) 유적'과 구마모토현 지배층 무덤 5곳에서 굽다리 접시, 항아리 등 토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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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슈에서는 시마네현 하마타(浜田)시 '모리가소네(森 會根) 고분', 와카야마현 오오타니(大谷) 고분 등에서 원통모양 그릇받침(筒形器臺), 창, 말장구 등 대가야 위세품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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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코쿠의 경우 에히메현 세토나이카이 연안에서 대가야 토기가 쏟아졌다. 400년대 중반 이후 500년대 중반까지의 왜 유적지에는 금관가야, 아라가야, 신라, 백제계 유물을 합친 것보다 대가야 유물이 압도적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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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제대로 발굴조사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열도 26개 지역에서 30종류 이상의 대가야 유물이 나왔다는 사실은 당시 대가야와 왜의 교역이 광범위하게, 또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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