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다음의 두 항은 어지러운 우리나라 사회에 빛을 주시는 말씀으로 여겨져서 함께 나눕니다. : )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182항 –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운 앞날의 발전에 의해 논해지고, 또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에 대해 우리는 구체적이지 않을 수 없다. – 세부 사항에 대해서까지도 주장하지 않더라도 – 왜냐하면 주요 사회적 원리들은 아무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일반적인 방향 제시로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에 대해 “오늘날의 복잡한 상황들에 효과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실질적인 결론을 도출해낼 필요가 있다.
사목자들은 다양한 학문들의 도움을 받아들여, 사람들의 삶에 대한 모든 것에 의견들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복음화의 과업은 모든 인간 존재의 온전한 발전을 함의하고 또 요구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만 스스로를 국한시켜야 한다든지 영혼들을 하늘 나라에 갈 수 있게 준비시키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 영원한 완성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 이 지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진정 ‘모든 이’가 모든 것을 ‘풍성히 누리도록’(1티모 6,17)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특별히, 사회적 질서와 공동선의 성취와 관련된’ 삶의 영역들과 측면들을 다시 살펴보기를 요구한다.
183항 – 따라서 누구도 우리에게, 종교는 사회적 국가적 삶과의 어떠한 관계도 없이, 시민 사회의 기관들의 건강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것도 없이, 또 시민들이 관심을 갖는 사건들에 대해 자기 의견을 표현함도 없이, 그저 사람들의 내적 성역에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캘커타의 복녀 데레사의 메시지를 성전에 가두고 침묵하게 하겠는가? 프란치스코 성인과 데레사 복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 그것은 절대로 편안하거나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 항상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가치들을 전해주려는, 우리 지상 여정 이후 어떤 것이라도 더 나은 것을 남겨주려는 깊은 바람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살도록 하신 이 참으로 아름다운 행성을 사랑한다. 또 우리는 여기에 사는 인류 가족을 그들의 모든 희로애락, 노고, 열망, 희망, 가치들, 그 연약함과 더불어 사랑한다. 지구는 우리 공통의 집이고 우리 모두는 형제들이다.
만약 ‘사회와 국가의 의로운 질서가 정치의 주요 과업’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 변두리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목자들을 포함하여,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일에 매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이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것이고, 제안적이며,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에서 솟아나오는 희망의 상징이 되기를 그치지 않는다. 동시에 교회는 ‘교리의 성찰 단계든 실천 단계든 사회 분야에서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의 노력에 기꺼이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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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들은 다양한 학문들의 도움을 받아들여, 사람들의 삶에 대한 모든 것에 의견들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누구도 우리에게, 종교는 사회적 국가적 삶과의 어떠한 관계도 없이, 시민 사회의 기관들의 건강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것도 없이, 또 시민들이 관심을 갖는 사건들에 대해 자기 의견을 표현함도 없이, 그저 사람들의 내적 성역에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캘커타의 복녀 데레사의 메시지를 성전에 가두고 침묵하게 하겠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목자들을 포함하여,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일에 매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만약 ‘사회와 국가의 의로운 질서가 정치의 주요 과업’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 변두리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