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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 성당 - 성서학자 선종관 신부를 길러낸 성당 |
주소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719-2 (도로명 주소 원주시 신림면 구학산로 1857)
교우촌에서 공소, 공소에서 본당으로
원주 신림면 용소막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는 대략 병인박해 무렵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해시기에는 교우촌을 형성하지 못하고 주변 산간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1880년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주변의 신자들이 촌락이 형성되기 쉬운 지역으로 모이게 되어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용소막에도 퍽 이른 시기인 1898년 당시 풍수원 성당 전교회장 최도철(崔道澈, 바르나바)이 이 마을에 들어옴을 계기로 많은 교우들이 모이게 되어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 마을에 와서 초가 10칸의 아담한 경당을 짓고 원주 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소를 설립한 뒤 초대 공소 회장을 맡았다. 공소가 개설된 다음 해인 1899년에 충북 제천군 송학면 오미(五味) 마을에 살던 백(白)씨네와 행주(幸州)에 살던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일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교우촌이 더욱 커지게 되었고 1900년 10월 24일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 경당을 축복해 주기까지 하였다.
이후 공소가 더 커지자 최도철 회장은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원주 본당에 청원하였다. 그러자 원주 본당의 르 메르 신부는 이웃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鄭圭夏, 바오로)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여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고, 마침내 1904년 5월 4일 뮈텔 주교가 이 건의를 허락함으로써 용소막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본당으로는 강원도에서 풍수원 성당, 원동 성당에 이어 세 번째였다. 초대 주임으로는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V. Poyaud, 表光東) 신부가 임명되었다. 관할 구역은 원주군, 영월군, 평창군, 제천군, 단양군 등 5개 군에 걸쳐 있고 사방 3백 리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본당의 발전 과정
1914년 4월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시잘레 신부는 새 성당 건립이 급선무임을 알고 그해 가을부터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공사를 담당하게 하는 등 성당 신축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최도철 회장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모든 신자가 적극 나서서 성당 신축 공사의 일을 열심히 도운 결과, 착공한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에 지금의 100평 규모의 아담한 고딕식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 당시의 총신자수는 2,081명에 달하였다.
1939년 4월 25일 춘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 · 신설됨에 따라 용소막 본당은 서울교구에서 춘천교구로 이관되어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7대 주임으로 부임한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갤라거(F. Gallagher, 갈) 프란치스코 신부는 1941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4년제 학교인 명덕국민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한 결과 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43년에는 태평양 전쟁을 벌이던 일본군에 의해 성당의 종을 공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0대 주임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때는 6.25 전쟁이 발발해 본당이 큰 피해를 보았다. 성당은 공산군들의 식량 창고로 전락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되었으며, 성당 천장도 총탄 세례를 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 아울러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 사목 문서도 모두 불에 타 버렸고, 회장이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숱한 고초를 당하였으며, 일반 교우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전쟁이 끝나가던 1952년 10월에 11대 주임 이종흥(李鍾興) 크리산도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원상 복구하고 강당을 신축하는 한편, 1953년 10월경에는 주보인 무염시태 마사비엘 성모상을 완공해 신자들의 신심을 성모님께 향하도록 함으로써 침체된 농촌 교회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 · 신설됨에 따라 용소막 본당은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로 이관되었다. 이후 용소막 본당은 관할 지역의 분할과 주민들의 도시 진출 현상으로 말미암아 교세가 크게 감소하여 갔다
28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태원(金泰元) 요한 신부는 1984년에 성당 내부를 대폭 수리하였다. 1985년에는 초가집을 매입해 피정의 집인 두루의 집으로 개축하였다. 아울러 1986년 7월에는 수녀원을 건립하여 성모 영보 수녀회 분원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1988년 11월에는 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영보 수녀회를 설립하고 성서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1976년에 선종한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을 설치하였다
용소막 성당은 1986년 5월 2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5월 5일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교구장 김지석 주교의 주례로 기념미사와 축하식을 거행하고 시설을 많이 개선했다.
성당 앞마당에 야외미사를 위한 제대를 만들고, 사제관과 성당 진입로를 정비했으며, 종탑과 종을 새로 교체하고 성당 뒷산에는 십자가의 길과 로사리오 동산을 꾸몄다. 그리고 예수부활상과 성모상도 새롭게 봉헌하였다.
도착하니 벌써 오후 3시가 다 돼 간다. 이 성지 다음에는 가장 큰 성지 배론으로 가야하기에 서둘러야 한다.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생가 터
주차장에 내리니 성당 언덕에 오르기 전에 이름도 성도 없이 생가터 표지판과 안내판이 먼저 나온다. 아마도 교우들은 생가 하면 다 알기 때문이다. 성가 터란 이 지역 출신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1915-1976)의 생가를 가리킨다. 그만큼 용소막 성당에서 선종완 신부는 절대적이다. 신부님의 부모는 행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수원에서 온 최도칠 가족과 제천에서 온 백씨 가족과 더불어 교우촌을 이끌었다고 한다.
선종완 신부님의 집이 바로 성당 아래여서 늘 성당이 놀이터가 되어 사제들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특히 8살 때 시잘레 신부의 총애를 받아 장차 신부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사제가 되어 성서 연구 및 번역 활동과 말씀의 성모영보 수녀회를 창립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선종완 신부 생가터를 뒤로 하고 약간 언덕길을 오르면 성당이 나타난다. 그리고 성당 앞쪽에는 다섯 그루의 큰 고목이 이 성당의 연륜을 말해주는 듯이 줄지어 서 있다. 150년이 되었다는 나무는 성당보다 먼저 이곳에 서 있었고, 성당과 함께 참혹한 시대를 살았고, 이제 성당을 수호하듯 건장하게 서 있다.
성전
이 성당은 1915년에 지었으며 정면 중앙부에 높은 첨탑을 갖춘 고딕식 건물로, 성당의 평면은 삼랑식(三廊式)이다. 삼랑식이란 중앙 제대와 신자석 양옆에 좌우로 회랑을 두는 방식을 말한다.
정면 출입문은 셋이 있는데 모두 청동문이다. 가운데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자상 양쪽에 천사가 꽃을 봉헌하는 아치형 부조가 문짝위에 있고, 좌우의 작은 문에도 천사가 영광을 드리는 장면이 그려진 부조상이 있다.
아름다운 청동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성전 안쪽문 밖 좌우에는 성수대가 있는데 오른쪽 성수대 위에는 2015년 성전 건립 100주년 기념 때 성전 시설 봉헌자 명단이 있고 그 옆에 모금함이 있다.
성전 내부는 가느다란 열주에 의해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이 구분되고, 정면에 제대부가 있는 서양식 성당 건축의 일반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궁륭천장에 정면 벽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다섯이 있는데 가운데에는 고상이 위치하고 벽에 바싹 옛 제대가 붙어 있다. 그리고 좌우 회랑 앞 벽에는 성모상과 예수성심상이 높이 걸렸다.
양쪽 좁은 측랑에는 간이 의자가 몇 개씩 놓여있다. 벽에는 은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사이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채색 성화 형식으로 걸렸으며 천장과 벽이 온통 흰색이어서 소박하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성전 밖에 나오니 이곳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경치가 너무 좋다. 정자라도 하나 짓는 다면 그대로 명소가 될 법하다. 용소막 성당이 원주팔경에 들어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본당 설립100주년 기념비와 100주년 기념미사 강론비도 있다.
용소막 성당 터의 전설 - 처음에는 용소막 성당을 신림역 쪽에 지으려 했는데 어느 날 수염이 긴 할아버지가 나타나 “앞으로 30년 후에는 이곳에 철마가 지나갈 터이니 여기 성당을 짓지 말고 저쪽 산밑에 지으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 이 장소에 지었는데 과연 30년 후에 중앙선 철도가 처음 지으려던 곳을 통과해 역이 생겼다고 한다. 만약 첫 장소에 지었다면 성당이 헐려 역이 되었을 것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당시 교우들은 모두 이를 믿고 그 할아버지가 아마도 성 요셉이 아닌가 했다는 것이다.
강론비는 위에서 정리한 용소막 성당의 내력을 밝힌 것이다. 용소막이라는 이름도 용소(龍沼) 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막, -막이, -메기 등은 모두 두메 촌락을 의미한다. 부근에 용소가 있는지 모르겠다.
성전과 사제관 사이 언덕에는 성모상과 촛불 봉헌대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게시판이 있는데 왼쪽에 일반 홍보판이고 가운데는 성당 안내도, 맨 왼쪽은 교육관과 수녀원 건립 모금 게시판인데 제목이 유달리 커다랗다. 내용인즉 현재의 교육관인 두루의 집이 리모델링도 못할 정도의 노후 건물이라서 이것을 헐고 2층집을 지어 1층은 수녀원으로 2층은 교육관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겨울철이면 수녀님들은 냉동고에 산다는 말이 매우 절박한 느낌을 준다.
언덕 따라 난 길 안쪽에는 선종관 신부 유물관이 있다. 언덕 쪽에는 사제관으로 오르는 오르막 계단이 있고 줄곧 가면 성체조배실, 더 가면 두루의 집과 피정의 집이 나온다.
선종관 신부 유물관
선종관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히브리어와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의 원문을 번역한 성경학자다. 1962년에 폐회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내용 중에는 자국어를 사용한 미사의 허용과 분리된 개신교를 형제로 인정하는 교회의 연합 등이 있었다. 이때부터 세계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한국에서는 선종완 신부가 이미 10년 전부터 한국어로 단독 번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고 최초로 창세기가 출판된 것이 1958년이었다.
1968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한국가톨릭교회와 갈라진 형제인 개신교들과의 일치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일환으로 성경을 공동번역하게 되었다. 구약을 번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 즉 고고학·히브리어·희랍어에 능통한 이는 가톨릭 측에서는 유일하게 선종완 신부였고 개신교 측에서는 문익환 목사였다. 1968년 11월부터 1976년 7월 초까지 9년 동안의 번역 작업이 끝나갈 무렵 선종완 신부는 간암 말기임을 알게 된다. 그는 성모병원에 입원해 1주일동안 하루 1시간 잠을 자면서 교정을 하였고 마지막 교정을 마친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유물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낡은 책상을 비롯한 유품 380여점과 각종 서적류 300여권이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유물관이 잠겨 있다. 부착된 안내문에는 분명 지금은 여는 시간이라 담당자 전화번호가 있길래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조금 더가면
피정의 집과 교육관을 지나 뒤편 언덕을 오르면 십자가의 길이 이어지고 끝에는 성모동산이다. 용소막에서 꼬리를 용소에 담근 용의 머리는 이 언덕일까? 용의 머리를 오르는 길이 바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다. 고적한 숲길로 언덕마루에 올라 예수성심상께 참배하고 조금 더 가면 너른 숲 광장 한편에 성모상을 만난다.
용소막 성당의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다.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한 기적의 성모 마리아, 신앙이 주는 믿음과 용기는 아마도 성모의 기적인지도 모른다.
오후 3시40분 마지막 행선지 배론 성지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