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8-10절)『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중 두번째의 비유이다. 첫번째 비유는 백마리의 양 중 한마리를 잃어버려 그 목자가 한마리를 찾으로 나가는 비유이다.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목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마리를 찾으로 가는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두번째 비유는 어느 여자가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이야기이다.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셔서 여자인 교회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죽어있는) 동전을 찾는 이야기다. 두번째 비유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영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역사만으로 영을 살리는 일이 가능하다. 이 두가지 비유의 마지막 귀절은 다 똑 같다.『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목자를 잃어버리는 것이 죄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상태가 두번째의 비유에 이르런다.
인간의 영은 어두움 속에서 죽어있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부활)이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는데, 교회는 주님의 피값으로 사서 주님이 세우신 것이다. 교회는 교회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을 의미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마른 뼈들이 붙고 거기에 가죽이 붙고 힘줄이 붙고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성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일어난 것이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죽은 자가 영적으로 살아나고,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성전이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모든 사람들이 죄와 허물로 영이 죽어있는데, 죽은 영이 사랑을 베푼다고 살아나지 않는 것이다. 죄로 죽은 영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노아는 의를 전파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노아는 의의 전파자였다.
우리의 목표는 의인(부활)이 되는 것이다. 의인이 되어야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게 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를 막는 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오늘날에는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는 자들이 스스로『의롭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두가지가 부딪히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할 때 주님은 의인을 찾는다. 의인이 열명이라도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의인이 중요하다. 의가 사랑보다 먼저다. 의가 없는 사랑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선지자들의 모든 말씀은 먼저 공의를 구한다. 그 다음에 긍휼과 사랑이 뒤따른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말하는 실정이다. 의가 없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왜 회개하면 화해가 일어나는가? 주님이 의롭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는 노아를 의의 후사라고 했다. 즉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말이다. 의롭기 때문에 방주를 허락하셔서 노아를 살게 하셨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탕자의 비유는 아들 둘 다 부패했다는 말이다. 둘 다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선하게 보이는 자나 불의한 자나 둘 다 부패한 것이다. 탕자는 사랑의 아버지를 버리는 것이다. 사랑받고 있는 동안 아버지를 버린다. 예수님은『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 때라』라고 했다. 회개하는 자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음성을 들을 때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부활)이다.
이 말은 여자가 등불을 켜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회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절반만 맞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돌이키는 것(회개: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도에게 부활시켜주신다.
구원의 조건은 사도행전 20장 21절에서『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부활)이다. 우리가 예수 믿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앞의 두가지 비유에서는『죄인이 회개하면』이라는 조건이 있지만, 탕자의 비유에서는 조건이 없다. 탕자의 비유는 하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권세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부활)을 입히는 것이다. 이 옷은 돌아온 아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락지를 끼워주는데, 이 가락지도 아들의 신분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에는 권리를 말하고 있다. 『네 발에 신을 벗어라』는 말이 있는데, 권리를 포기하라(십자가의 죽음)는 말이다. 신을 신는 것은 권리가 회복(부활)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는 하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없이는 거듭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