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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소재의 본질 찾기와 해석
강 돈 묵
dmkang892@hanmail.net
수필은 생득적으로 작가의 삶을 토대로 하여 쌓아 올린 건축물이다. 그렇다고 하여 작가의 삶을 있는 그대로 쌓아 올린다고 한 편의 수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살아낸 삶은 개인의 단순한 일상에 불과하다. 그 일상에서 취택한 체험에 의미 부여가 이루어져 문학적 소재로 다시 태어날 때 소재로서의 자격을 획득한다. 진정한 의미의 소재는 문학적 소재이다. 그러니까 이 건축물에 소용되는 것은 소재의 본질 찾기 과정을 거친 자재만을 활용해야 함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자칫 작가의 삶을 토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자신이 경험한 바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줄글로 내리 적으면 수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문학적 소재로 바꾸어야 하고, 그것이 함유한 본질을 찾아 독자에게 제시하여야 한다. 그래서 수필이 완성되었을 때는 하나의 메시지를 위해 글 전체가 반응하고 움직여야 한다. 건축물의 각 부분이 나름은 아름답게 보여도 한 덩어리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성공한 수필이라고 일컫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붕 곡선의 아름다움이, 기둥의 멋스러움이, 벽체의 너그러움이, 정원 꽃의 어울림이 하나의 목적 앞에 질서를 유지하면서 배려하고 절제하고 조화를 이루었을 때 우리는 진정한 감동을 맛보고 그 작품에 오래 머물기를 소망한다. 또 작품 속의 요소들이 각각의 기능에 만족하여 주위를 살피지 않고 경직되어 있다면 유기적인 짜임새를 이루지 못해 미적 울림을 주지 못한다.
사건을 상세히 기술하고 배경을 세밀히 묘사한 것으로 작가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했다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독자를 위한 여백이 요구됨을 알아야 한다. 친절한 배려가 군더더기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하나의 수필을 완성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비록 배경을 묘사해도 내용을 암시하고 글의 흐름을 예측하게 하는 역할까지 맡아준다면 글의 완성에 보탬이 되고 기대 이상의 전달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어 독자에게 즐거움을 안길 수 있다.
이제는 수필이 단순구성에 짧은 글이라 하여 만만하게 여기고 준비 없이 독자 앞에 나섰다가는 외면당하기에 십상이다. 짧은 길이로 호흡이 긴 장편소설보다도 더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필가 중에는 이런 작가가 있기에 ‘에세이스트’를 존경하고, 많은 사람이 이 건축물 안에서 즐기며 오래 머무는 것이다.
이번 계간현대수필 127호(2023년 가을호)에는 작가의 삶에서 취택한 소재에 문학적 해석을 보태어 작가만의 의미를 표출한 글이 여러 편 독자의 시선을 끈다. 이같이 단순 일상에서 문학적 소재로의 환치는 남다른 통찰력으로 사유하는 작가적 능력에서 가능하다. 여기에다 적절한 구성으로 독자에게 공감을 주기에 생명력까지 얻는다. 우선 한경희의 <안개>에 시선을 집중해 본다.
가) 온통 희뿌옇다. 누군가 진한 쌀뜨물을 풀어놓은 것 같다. 자동차 전용도로는 거대한 그릇이 되어 이리저리 출렁이고 있다.
국도에서 전군도로로 들어서자마자 해풍에 눅진해진 밤안개가 차를 덮쳤다. 비상등, 미등, 상향등까지 켰지만, 이깟 것은 우습다는 듯 안개는 보닛 앞부분을 뭉텅 잘라 먹었다.
1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2차선으로 옮기려는데 녹록지 않다. 걸음마를 떼는 아이로 돌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희미한 앞차의 후미등을 따른다. 내 차도 누군가의 길잡이가 될 것이었다.
나) 방심한 틈을 타 한 무더기의 안개가 다시 몰려온다. 종착지에 도착하기까지 한눈을 팔아서도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는 경고다. 언젠가는 안개 낀 여정도 끝이 날 것이다. 생각보다 짧게, 혹은 길게. 나만 그 길을 가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지만 가끔은 몹시 외로울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렁이는 운전대를 꽉 잡는다. 안개 낀 생을 응시한다. -한경희의 <안개>에서
작가가 체험한 안개 속의 상황에서 본질을 찾아 해석을 내림으로써 튼실한 문학적 소재를 만나는 글이다. 흔히 생각할 때, ‘안개’는 미혹의 세계이고, 불신의 경지이며, 불안을 초래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 상식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름의 해석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들의 눈에 섬광이 빛나도록 한다면 글의 정체성이 살지 않을까.
예문 가)는 이 수필의 시작 부분이고, 나)는 마무리 부분이다. 가) 부분은 단순 배경 묘사 같지만, 그 이상이다. 기왕에 ‘안개’를 미혹의 세계로 봤으니, 달려드는 안개는 인간사의 미혹함이다. 그러기에 그곳에서 헤어나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이깟 것은 우습다’고 내동댕이쳐진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토록 지난至難의 고통을 요구한다. 나름 헤쳐나 보려고 차선을 바꾸려 해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작가가 갇혀있는 안개 속을 그려준 듯하지만, 실은 미혹에 빠진 인간의 삶을 그려주고 있다.
나)는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한 예측이다. 스무 살 때는 살고 싶지 않았었는데 생의 반환점에 도달해 보니 깊은 안도의 숨도 내쉬게 된다는 작가는, 그래도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그렇게 순탄할 것이라고는 속단하지 못한다. 여전히 안개는 몰려올 것이고, 죽기 전까지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되고,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고 다짐한다. 또 이 길은 자신만이 홀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순간 외로움을 느낀다고 실토한다. 그게 인생이다. 언제나 우리가 갈 길은 안개 낀 생이다.
이제 박 모니카의 <어떤 결별>을 살펴보자.
작가는 숫자 6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고 산다. 그것이 심해져서 6을 만나면 불리를 예감했고, 심지어는 6이 겹치는 6월 6일에는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반전이 일어났다. 6월 경주 용장골로 산행 중, 식당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종아리가 올라붙으며 급격하게 경련이 일어난다. 고통이 심해서 고함을 지르며 데구르르 구르는데, 난데없이 승복을 입은 분이 나타나 응급처치를 해 준다.
그는 종아리를 잡고 엄지발가락을 쭉 잡아당기면서 여섯까지 세기를 여섯 번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엄지손가락에 자신의 침을 발라 작가의 콧등을 가볍게 톡톡 치는 시늉을 하면서 여섯까지 세었다. 그게 전부인데 아프던 종아리가 완전히 나았다.
내가 그토록 악연이라고 믿었던 6자를 어느 누군가는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의문이 내게 숙제로 남겨진 것이었다. 내 자신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6자가 두 다리를 쭈욱 펴는 듯했다.
확고한 내 안의 인식認識이 나와 전혀 다른 인식認識과 마주치면 사유思惟가 또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내가 느끼고 있는 나만의 사유思惟에 대한 개념이란 나비와 같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생각省覺을 논리論理가 있는 사고思考를 거쳐 명상冥想에 이르러서야 터득攄得하게 되는 이치理致라고 보고 있다.
그 사유의 방향이 다른 곳에서 손짓을 하게 된 반전의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것은 자신 안에 갇혀있던 답답한 공기가 창문을 활짝 열고 저 드넓은 푸른 창공을 날아다니는 신선한 공기와 뒤바뀌는 맛을 보게 했다.
-박 모니카의 <어떤 결별>에서
이 글에서 작가는 6자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게 단순한 6자일까. 이 6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부정적 요소라 칭할 수 있다. 사람들은 반복된 체험 속에서 부담스러운 존재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것은 항상 의식 속에 버티면서 주인을 괴롭힌다. 6이 그런 존재로 환치된 것은 선택한 소재에 대한 작가의 해석에 따라 문학적 소재로 만들어졌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제는 6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한마디 강조한다. ‘자, 지금부터 내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하며 그 부분에 밑줄을 긋다시피 하였다. 느닷없이 사용하지 않던 한자漢字를 동원하여 독자에게 경각심을 요구한다. 의도는 알겠지만, 독자 중에는 더러 이런 친절에 귀찮아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마지막으로 한 편 더 살펴보자. 임이송의 <불안을 편애하다>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깊이 고뇌하는 일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감정의 밑바닥에 쟁여 있는 것은 언제나 ‘불안’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깊이 성찰하는 항목이기도 하다. 편애라 했지만, 어쩌면 자신이 가장 관심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정보가 되기도 한다. 작가 스스로도 ‘내가 그런 사람과 꽃을 좋아하는 것은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어서이다.’라고 실토하고 있다. 작가는 여러 현상을 반추하면서 그 원인을 ‘불안’에 선을 대고 있다. ‘왜 나는 이렇게 불안에 깊이 빠져 있는가’를 가늠해 보고, 그곳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듯 자신을 관찰해 나간다. 평소 가장 많이 느끼는 ‘불안’을 태생적이라기보다 환경적 요인으로 파악한다. 그 원인도 어느 날 갑자기 평화가 깨졌고 안정감이 사라졌고, 그리고 가족 중 누군가가 죽어서 생긴 환경적 요인으로 인식한다.
편애 중에 가장 편애하는 건 나 자신이다. 때론 가장 편애하지 않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래서 나를 무작정 방치할 때가 있다. 그 방치 속에는 불안이 가득하다. 불안 속에 또 불안이 들어 있을 때가 많다. 두 겹의 불안은 종종 평정심을 잃게 한다. 그 증상들은 대체로 나와 가족의 생사가 달린 경우에 나타난다. 그 고통을 극복한 후 찾은 일상은, 그만큼 깊고 평화로워진다. 그럴 때 남들은 나에게 ‘진국’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역설적으로 지독한 불안을 편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나를 지탱하고 긴장케 하고 살아가게 하는 힘인 걸 보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나는 다만 남들보다 조금 더 불안한 상태일 뿐이다. 어쩌겠는가. 나를 점거하고 있는 성분이 그러한 걸. -임이송의 <불안을 편애하다>에서
수필은 어차피 사람의 이야기다. 돌을 이야기하든 나무를 이야기하든 궁극적으로 수필은 사람의 이야기와 닿아 있다.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어느 작가는 사물을 끌어오기도 하고, 혹자는 사건을 당겨오기도 한다. 또 작가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야기로 소곤거리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감정을 밀쳐놓고 무정한 듯 이야기를 끌고 가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틀을 짜면서 독자의 신뢰를 얻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인간형과 싫어하는 인간형을 열거 대비하여 자신을 간접 표현하고 있다. 대개가 요란하지 않고 작으며 차분한 것을 선호하고, 그 반대인 것에는 너그럽지 못하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향을 남에게 쏟아내지도 못한다. 혼자 삭일 뿐이다. 삭인 후 안정을 되찾으면 담근 김치를 떠올린다. 이삼 일간 발효시켜 익은 김치를 맛보며 느끼는 성취감과 같다. 이게 삶이 아닐까.작가가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은, 마음의 평화와 몸의 평화와 관계의 평화이다. 사람 속에 뒤섞여 살면서 관계의 불화는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다. 여하튼 글쓴이가 마지막으로 터득하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또 존재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편의 수필은 체험 속에서 취택한 소재에 작가의 진지한 해석이 가해져 얻어진 것들이다. 수필이 체험의 단순 기술이 아님을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문학적 소재로 환치하여 사용할 일이며. 소재에서 본질을 찾아 해석해 내는 작가만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 모든 문장은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데에 몰두해야 한다. 수필에 동원된 어휘는 첫 문장, 첫 단어부터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얼개를 짤 때도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일이다. 수필은 여러 요소가 함께 유기적으로 결합한 하나의 멋진 건축물이다.
교수님 수필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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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대에 읽었던 김승옥 작가님의 무진기행에서도 안개가 나오는데 그 때 읽었던 내용들이 항상 마음 속에서 맴돌고 있어서 언젠가는 저도 그런 마음을 울리는 글을 하나 정도는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글 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건축물의 뼈대를 세우고 외관을 붙여나가는 작업이 그저 그런 작업이 아니고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