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교역자 세미나에 다녀와서
- 유럽선교 발제를 하면서 든 단상
1. 지난 달 9월 17일(화)-20일(금),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감리교 유럽지방 교역자 세미나에 다녀왔다.
금년으로 벌써 열 번째 컨퍼런스를 섬기는 이병희목사님의 수고와 미주지역 UMC 목회 은퇴 후 유럽지방 교역자들을 위해 미주한인교회의 후원금을 모금해 해마다 컨퍼런스가 열리도록 선처해주신 뉴욕 박순종목사님의 후배들을 위한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한 번도 쉽지 않은데 두 차례나 교역자세미나 강사로 오셔서 목성연 기본과정인 출애굽기를 강의해주신 미국 텍사스의 달라스 중앙연합감리교회 이성철목사님과 런던에서 열린 세계감리교협의회 감독회의에 오셨다가 세미나에 합류한 중앙연회 이정원감독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2. 둘째 날 오후에는 본인이 ‘유럽선교- 유럽 현지교회와의 협력을 중심으로’ 라는 특강을 하였다. 금년 들어 세 번째로 이 주제에 대해 발제하는 셈인데 청중이 같은 교단 동역자들이라서 그런지 유럽지역 한인사역자 컨퍼런스로 모였던 유로비전포럼(프랑크푸르트, 5월)과 미션유럽컨퍼런스(파리, 7월)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교단의 유럽선교정책과 관련한 개인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학업과 병행해 초교파 한인교회를 몇 년간 섬긴 적이 있다. 목회현장에서 독일교회를 가까이에서 접하다보니 국내에서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독일사회가 세속화되어 있고 이를 영적으로 책임지어야 할 독일교회가 약체화되어 있으며 특히 선교무기력성에 빠져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공(公)교회의식을 저버리고 사사화(私事化) 된 개(個)교회주의와 과열된 교회성장논리에 물든 한국교회 병폐에 대한 대안을 종교개혁자 루터의 나라, 독일교회와 독일신학이 제시해 주리라는 기대로 국내 목회 5 년 만에 유학길에 오른 나로서는 그 실망감이 이만 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로 독일(유럽)교회가 영적으로 ‘잠들었다’ 심지어 ‘죽었다’ 라고 냉소적으로 방관만 할 게 아니라 이 교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한국교회나 독일(유럽)교회나 다 같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eine Leib Christi)에 속한 지체인데 더군다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개신교의 근간이 바로 독일(유럽)교회인데 이 교회들이 마치 타이타닉호와도 같이 가라앉고 있는 모습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생각과 기도가 자라 유럽교회의 회복, 유럽선교에로의 부르심(Call)을 입게 된다. 원래 학업을 목적으로 독일에 온 나로서는 유럽선교의 과업은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말 그대로 주께서 부여하신 붙잡힌 바 된 ‘사명’ 이었다.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 2000년 가을, 당시 교단 내 교역자신분인 ‘유학’을 접고 ‘선교사’로 파송받기 위해 본부 선교국에 선교사인준을 지원하였다.
외국에서 힘겹게 선교사과정을 반년 간 통신으로 수료하고 국내에 가서 집중훈련까지 마쳤는데 막상 선교국의 인준심사에서 탈락을 하였다.
당시 감리교 교역자로서 연급이 정회원 5년급 내지 6년급 이었는데 신학생도 아닌 정회원목사가 심사에서 탈락을 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3. 선교사 인준심사에서 탈락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서유럽지역은 교단의 선교정책 상 교민목회 위주 지역으로 현지인을 대상으로 사역하려면 알코올중독자, 약물중독자 등 사회적 소외자들 혹은 한국출신 입양아 등을 위한 정체성교육 등 특수사역이라면 모를까 한인교회 담임목회를 하면서 유럽(독일)현지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한마디로 목회든 선교든 둘 중에 하나만 전념하라는 주문이었다.
두 번째, 선교계획서에 기재된 유럽(독일) 현지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유럽 현지교회를 ‘회복’ 함으로 유럽선교를 접근하겠다는 선교계획에 대해 구령열에 불타는 자세로 선교를 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선교’냐 이런 건 교단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할일이지 선교사가 이것을 어떻게 사역으로 풀어낼 수 있느냐 라고 하며 결국 인준심사에서 탈락을 한 것 이다.
하긴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church)에 따라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의 선교적 교회화, 선교 거점화가 논의되고 있고 에딘버러 100주년을 기념해 서구와 비서구 교회 양측에 의해 에딘버러와 동경에서 열린 선교대회(Edinburgh 2010, Tokyo 2010)에서 유럽대륙이 선교지 임이 공식적으로 천명되었으며 에큐메니칼 선교진영(Mission and Evangelism, WCC, 1982)과 복음주의 선교진영(LCWE, Manila, 1989 & Cape Town 2010) 모두 유럽의 재복음화(Re-Evangelisation), 새복음화(Neuevangelisierung)에 대해 강조하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럽선교’ 라는 개념을 선뜻 수긍하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는 데 지금부터 13년 전의 선교국 인준위원들의 선교이해(Missionsverstandis)의 부족함을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4. 어쨌든 당시 6년간의 독일생활을 뒤로하고 일시 귀국해 선교사 훈련기관인 한국선교전략연구소(MMTC)에서 6개월간 선교사훈련을 받고는 이듬해 인 2001년 2월, 드디어 독일선교사로인준을 받아 그 해 4월, 파송예배를 드리고 독일에 재입국한 일이 있다.
마침 이번 교역자세미나를 현지에서 준비한 불가리아선교사 강윤식목사 내외가 당시 MMTC에서 선교사훈련을 함께 수료한 동기이고 그 때 간사로 사역하였던 유승찬목사 내외가 아제르바이쟌선교사로 교역자세미나에 참석하였기에 유럽선교발제를 하면서 더 이런 감회를 언급한 것 같다.
발제를 마치고 나니 세미나에 참석한 동유럽지역 선교사들이 유럽선교를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을 잘 정리하였다며 앞으로 본격적으로 ‘선교이론가’의 역할을 해달라고 격려를 하였다.
사실 가을에 갖는 이 세미나는 지방 내 다른 행사들과 달리 서유럽지역 한인교회 목회자들만이 아닌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터어키 등지에서 사역하는 동유럽지역 선교사들도 함께 참석하는 모임이라서 선교를 주제로 발제를 하기가 심적으로 부담이 되었었다.
그런데 선교일선에서 수고하는 현장사역자들이 격려를 해주니 발제하기 전날 내용을 점검하느라 밤을 샌 피로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5. 셋째 날에는 선교지 답사를 하는 날이었다. 오전에는 1393년-1878년, 무려 500 여 년 간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 압제 하에서도 불가리아 민족의 독립 혼을 지켜낸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을 방문하였다.
이 수도원은 불가리아 수호성인 성 이반 릴리스키(Sveti Ivan Riliski, 릴라의 성요한)에 의해 10세기 경 릴라산맥 깊숙한 산간에 세워진 이래 불가리아 각지의 120여 수도원의 영적 지휘부로서 불가리아민족의 영적, 정신적인 민족혼의 구심체 역할을 해왔다.
점심식사 후 소피아시내의 성 알렉산더 넵스키 대성당(St. Alexander Nevski Cathedral)을 방문하였다. 수년전 러시아 고려인선교를 위해 상트 뻬쩨르부르크를 방문하였을 때 같은 이름의 러시아 수호성인인 성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을 찾은 적이 있다. 범 슬라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러시아-터어키 전쟁을 일으켜 오스만 투르크의 압제에서 불가리아민족을 해방시킨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의 수호성인의 이름으로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1882-1912). 제 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의 구소련 위성국가 중 유독 불가리아가 가장 적극적으로 친소정책을 펼친 이데올로기 외적인 역사적인 이유가 이 정교회 성당에 담겨 있는 것이다.
오후에는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소피아(Sofia)라는 도시 명칭의 기원을 이루는 성 소피아교회(Basilica of St. Sofia)를 찾았다. 6세기 경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고질병을 앓던 자신의 딸 소피아가 불가리아에서 요양 중 치유된 것을 기념해 도시의 장벽을 쌓고 이 교회를 세움으로 이 때부터 비로소 세르디카라는 작은 마을이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실리카 외부나 내부보다도 1500 여 년 도시의 역사를 각 시대별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끔 고고학 발굴 유적지를 그대로 전시한 교회지하가 인상적 이었다.
무엇보다도 이태리 로마, 터어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독일 트리어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동일한 양식의 바실리카 예배당, 벽돌로 이루어진 벽면의 아치형 모양 등이 고대 로마제국시절 이 곳이 하나의 제국안의 같은 문화권에 있었음을 느끼게 해준다.
터어키 이스탄불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성 소피아성당(Hagia Sofia)과 도시를 두르고 있는 성벽잔해에서도 역시 로마제국 시대의 바실리카 벽면 장식을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벽면에 남겨진 아치형 모양을 보며 지금은 이슬람국가가 된 동로마제국의 옛 고토(故土)가 느껴져 서글픈 기분이 들었었다.
불가리아 소피아의 이 성당은 여전히 당당하게 정교회 성당으로 1500년의 세월을 헤치고 의연히 서 있어 주는 게 고맙기만 하였다.
저녁시간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롱박사교회(Dr. Long Church)를 찾아 현지교회 목회자로부터 공산정권 시절 교회가 어떻게 박해를 받았으며 그 당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루마니아감리교회가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소개를 받았다.
6. 넷째 날 모든 집회를 마치고 세미나 참석자들과 헤어진 후 공항에 가기 전까지 불가리아 김아엘선교사님의 안내로 소피아 3대 기독교 유적지 중 그 전날 못 본 세 번째 유적지인 성 게오르그 원형교회(Rotonda of St. George)를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고대 로마제국 특유의 목욕문화(제의)시설의 부속건물로 2 세기 경 지어진 원형건물(The Rotunda)이 후에 세르디카가 기독교화 되면서 이방신을 섬기던 제사공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이 교회는 동·서 로마제국으로 나뉘기 전의 로마제국의 역사적 흔적이며 동시에 불가리아 선교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영국 바쓰(Bath)와 독일 바덴 바덴(Baden Baden) 등지에 있는 로마제국 당시의 목욕문화(제의)시설과 소피아의 로툰다를 비교하며 미술사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리저리 설명을 하는 나에게 김성교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 이었다. “목사님이 불가리아에 대해 관심 갖는 게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불가리아를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주세요. 불가리아를 더 많이 사랑해 주세요.”
바로 전날 롱박사 감리교회에서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 교회, 이슬람 상황에 대해 브리핑을 하면서 “불가리아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나라” 라고 현지교회 목회자가 말할 때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들었는데 한국인 선교사가 이렇게 말하니 이게 바로 선교사의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500년 압제 하에서 그리고 세계의 화약고라 불린 발칸반도 격변의 근대사 속에서 또한 제 2차 세계대전 후 유달리 친소노선을 견지한 공산체제하에서도 기독교 신앙과 경건을 굳건히 지키며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한 나라 불가리아에 대해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김아엘선교사님이 전해준 감동 덕분이다.
(20. 09.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