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상담실을 비워두자 - 청소년 상담실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 -
‘상담실을 비워두자니? 안 그래도 이용자가 많지 않아 걱정인 상황에서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나도 전에 청소년상담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분들의 이런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청소년 상담을 망치기 위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여전히 상담에 종사하면서 상담이라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담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 이런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상담을 공부한 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실(학교 상담실이든 혹은 학교 밖의 전문 청소년 상담기관이든)에 근무하게 된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운 상담이론과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상담 실제 간에는 큰 괴리가 있음을 곧 깨닫게 된다. 먼저 학교에서 배우기로는 상담이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내담자)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상담자)과의 대면 관계에서, 생활과제의 해결과 사고․행동 및 감정 측면의 인간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학습과정(이장호, 1995)’이라고 했었다. 이것은 상담 과목의 첫 시간에 배우는 상담의 정의이다. 그렇다면 일선 상담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청소년 상담은 과연 이런 정의에 맞는 활동인가? 다시 말해서, 청소년 상담실에서 상담이라는 이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활동이 상담이긴 한 것인가? 우리는 그런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분명한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상담실을 찾아오는 많은 청소년들은 위의 정의에서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여’ 상담실에 오지도 않으며, 상담 중에도 자신의 ‘인간적 성장을 위해 노력’ 하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내가 알기로 아직까지는 상담실을 찾아오는 청소년들의 경우, 상담보다는 심리검사를 받아보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으며, 상담을 받는 청소년은 스스로 찾아오기보다는 부모나 교사의 권유 혹은 강요, 또는 보호관찰소의 의뢰에 의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오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 그 청소년이 과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부터가 문제가 된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 청소년이 여러 가지 문제(말썽)를 일으켰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필요 없다’ - 특히 어른들의 도움은 - 고 생각하는 수가 많다.
상담의 정의에 있어 내담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도움의 필요 여부는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닌 청소년 자신이 하는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도움을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정의 상 상담의 내담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 또한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요컨대 상담에 있어서의 내담자의 자발성의 문제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은 상담이 아닌 것이다. 강제적으로 상담을 받는 청소년들은, 어른들은 모두 한 통속이므로 상담선생님도 부모, 교사, 보호관찰관과 미리 짜고 서로 내통하면서 나를 감시할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측하기 쉽다. 이런 청소년들의 경우, 상담 과정 중에도 자신의 인간적 성장을 위해 스스로 노력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들은 어른들이 상담실에 가라고 하니까 억지로 와서는 어떻게든 시간만 때우려할 것이다.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듯이, 청소년을 상담실까지 오게 할 수는 있어도 상담을 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청소년이 자발적이 아니라 성인에 의해 ‘의뢰’(혹은 ‘강요’)되어 상담실에 오게 되면 만남 자체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상담자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이지만, 그것보다는 그런 활동을 상담실의 본무라고 생각하는 일반인의 오해가 상담자에게는 더 근본적인 부담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소년 상담실 현장에서는 그런 활동이 내방 상담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담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알게 모르게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상담실은 말썽 일으킨 아이들만 벌 받으러 가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고, 따라서 정작 상담을 필요로 하여 스스로 받아보고 싶은 청소년들은 상담실 찾아가기를 꺼리는 실정이다. 상담실에 끌려오는 소수의 청소년들이 있음으로 해서 상담실에 스스로 올 수도 있는 다수의 청소년들이 못 오게 되는 꼴인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나 할까? 이런 뜻에서 처벌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의 청소년 상담의 실정 자체가 앞으로 청소년 상담을 활성화해 나가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인 것이다.
이제는 상담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상담의 명예회복도 시켜주어야 한다. 상담실은 결코 말썽꾼들이 벌 받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비행 청소년은 실은 상담의 대상자가 아니다. 상담의 대상자는 ‘문제를 일으킨 청소년’들이 아니라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들이다. 어른들의 속을 썩이고 골치를 아프게 만드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머리가 혼란스럽고 가슴이 답답한 청소년들이다. 만약 문제를 일으킨 청소년 중에서도 ‘내가 왜 자꾸 이럴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살아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상담의 대상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와 가슴은 멀쩡하면서 단지 어른들의 가슴과 머리만 아프게 하는 청소년은 사실은 상담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청소년은 상담이 아닌 다른 어떤 종류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만약 그들을 상담의 장으로 이끌려면 가장 먼저 그들 스스로가 상담을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담에의 ‘자발성’을 ‘타율적’으로 이끌어내야 하니 그것이 어찌 간단한 일이겠는가? 어쩌면 이 문제야말로 우리나라 청소년 상담이 시급히 해결해야할 가장 중차대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잠시 상담실을 비워두자. 상담의 올바른 대상들이 찾아올 때까지 부적절한 대상자들은 당분간 받지 않도록 하자. 그 동안 비록 상담 실적이 크게 떨어진다 하더라도 상담실이 제 본연의 기능을 찾을 때까지 그 자리를 신성하게 보호하자. 상담실을 더 이상 반성문을 쓰는 곳으로 만들지는 말자. 그러다가 웬일로 상담실을 방문한 청소년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친구를 정말 반갑게 맞이하고 성심성의껏 대함으로써 상담실은 정말 친절하고 편안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하자. 그리하여 그 청소년이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어쩌다가 상담실에 한번 가봤는데 거기 정말 좋더라’는 말을 하고, 그 소문이 청소년들의 입과 입을 통해 널리 알려져 정말 상담 한번 해보고 싶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상담실 앞에 줄을 서게 만들자. 이것이야말로 상담의 올바른 모습이며 새로운 세기를 맞아 청소년 상담기관들이 실현해야할 목표인 것이다.
모든 상담자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상담활동을 통하여 단 한 명이라도 진정한 마음의 위로를 받아, 절망 중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죽음에서 삶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항상 지금 내 앞에 앉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일뿐이다. 무릇 제대로 된 상담자라면 상담실장이나 관련 공무원의 월말 실적 평가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만나고 있는 내담자에게 모든 관심을 쏟으며 그의 복지와 성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상담실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그곳에서 상담을 직접 받은 청소년들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공무원들의 월말 보고서에 기록된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요즈음은 교육도 소비자중심이라 하지 않은가?) 상담자가 내담자의 숫자(실적)에 부담을 갖다보면 질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고민이 심각하여 상담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한 명의 청소년보다는 비교적 대하기가 쉬운 다수의 정상 집단을 선호하거나 혹은 타 기관에서 의뢰되어 어쨌거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청소년 집단을 우선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상담의 성과를 단지 숫자로 파악하는 것은 그래서 상담의 본질을 왜곡할 수도 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여담 삼아 덧붙이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나는 대학 상담실의 상담자인데 얼마 전 어떤 단과대학 학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그 분의 말씀이, 한 학생이 교칙을 어겨 처벌을 해야 하는데 처벌 대신 상담을 받게 하면 어떨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학생을 보호하시려는 학장님의 뜻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상담자로서 저도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조건을 강제적인 것으로 하지 말고 그 학생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대학의 상담실이 교칙 위반자가 처벌받는 대신 가는 곳이라는 인식을 학생들에게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한번이라도 그런 전례를 남기는 것조차 매우 꺼려집니다. 우리 상담실은 자기가 오고 싶어서 스스로 오는 곳으로 모든 학생들이 알기를 바랍니다. 학장님은 학장님과 저의 의사를 학생에게 전하시되 최종 선택은 학생이 하도록 해주십시오.”
결국 그 학생은 상담실에 오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잘 된 일일 수도 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첫댓글 상담자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