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존재공, ‘求道’의 저해요인
존재 선생은 10대부터 '성인'의 삶을 일관되게 추구했다. 범인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상이었다. 그럼 성인의 경지는 어디일까. 매군(梅君)과 의인(擬人)과의 대화 《연어(然語)》의 한 대목을 보자. "성인은 자기 마음에 천명을 터득하고, 군자는 천명을 받았음을 알기에 천명을 두려워합니다. 보통사람은 하늘을 무시하는데 하늘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늘도 그를 버립니다"라고 했다. 곧 성인은 천명을 터득한 사람이다.
또 '독서의 오묘함을 알아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면 과거합격여부는 저 조물주가 어떻게 하든지간에 내 맡겨둡니다. 그리고 깊이 터득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는 경우는 또한 부귀도 마음을 흔들 수 없고 빈천에서도 즐거워하는 의사가 저절로 생깁니다' 라면서 '현인이나 군자가 경전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구현하며, 성인이 되기를 희구하고 천명을 아는 것은 욕(欲) 중에도 진실하고도 큰 것이다.' (중략)고 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내가 좁은 소견으로나마 노력하다 보니, 언뜻 하늘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 운운(하략)'했다. 여기서 "언뜻 하늘의 빛을 보았다" 는 언급은 어떤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말이다. 이 표현들을 종합하면 '성인' 또는 '현인'의 경지에 이른 득도랄 수 있다. 선생의 생애를 반추해보면 이러한 언급들이 결코 허언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2세기 후인의 눈으로 보면 애석함이 여러 부분에 남은 게 사실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가정들이 이뤄졌더라면 하는 애석함이 있다. 첫째, 과거를 보려 30여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둘째, 사강회를 방촌의 이웃인 일가친척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더라면, 셋째, 위유사 서영보가 왕에게 천거하지 않았더라면, 넷째, 서책을 내각에 보내지 않았다면, 다섯째, 똘똘한 제자 한 명이라도 배출되었더라면 등등의 아쉬움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선생은 과거가 벌열자제들을 뽑은 통과의례임을 알았다. 기타의 응시자는 그들의 들놀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 컸기에 당연한 낙방을 무릅쓰고 응시한 셈이다. 과거에 매달린 30년을 다른 공부에 매진했다면 훨씬 큰 결실을 맺었을 것이다. 사강회는 농사와 공부를 병행하는 교육이었다. 당시로서는 대담한 교육방법이다. 그러나 제자 거의가 일가지만 뒤에서 방관하고 도와주지 않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위유사 서영보가 왕에게 천거하지 않았다면 하는 가정이다. 그랬다면 정조왕의 부름에 따라 70세의 노인이 성치 않은 몸으로 상경하지 않았고, 밤을 새워 만안봉사를 쓰지도 않았다. 현감을 제수받고 당일로 부임하지 않았다. 결국 무리가 겹쳐 풍을 앓게 되고 빨리 타계한 원인이다. 왕의 명령으로 내각에 보내졌던 중요한 서책들을 잃어버렸다. 그 책들이 남았다면 존재학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선생은 평생 교육자다. 17세부터 장천재에서 3년간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29세에 귤우헌에서 양정숙을 운영했다. 39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농사와 공부를 병행하는 독특한 교육인 ‘사강회’를 운영했으나 일가들의 도움을 못 받아 중단해야 했다. 옥과현감 때도 유생들을 깨우치는 글(諭邑中諸生文)을 통해 지도했다. 그러나 많은 제자 중 선생의 학문을 선양하는 제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
평생을 가르쳤는데 학문을 이을 제자가 없을까? 두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장흥이라는 지역적 한계이다. 고을이 좁으니 빈곤한 인재 때문일 수 있다. 다만 선생께서 타계하신 3년 후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의 제자는 과거급제자도 나왔기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른 하나는 제자 복이 없는 탓일 수 있다. 스승이 아무리 출중해도 제자의 그릇이 작아 가르침을 담을 수 없어 비롯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144-084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83+A 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83+A일차에도 '존재공(위백규)의 유작'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 63~83일차(21일차)에는 '존재공(백규)'의 유작이 계속 이어집니다.
(존재공 유작 게재 21+A일차 입니다)
[본문내용- 존재공(백규) 유작, 21-(21+A)]
※ 주) 이글은 원고 게재기간 중에 원산께서 추가에 추가로 집필한 내용으로, 가히 존재공의 전도사가 아니고는 쉽게 행하기 어려운 일종의 소명의식 같은 지독한 종중사랑으로 사료됩니다.
(게재자)/ 무곡
존재공의 유작 게재 작업이 끝나가기 직전에
추가 원고가 도착되어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이글은 존재공 할아버지께서 인생을 거의 달관 하거나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시점을 작가의 관점에서 조명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감사합니다./ 무곡
존재선생에 대한 다섯 가정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존재선생에 대한 사랑의 발로입니다./ 벽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