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
김희선
어여쁜 그 얼굴을 왜 들지 못하는가
흰 털을 베일 삼아 고개 숙인 백두옹
내로라
다 외쳐 대도
오직 한 길 묵언 중
수많은 말마디가
돌이키면 허망한데
일찌감치 깨달은 듯
내면 가득 고운 빛
내 얼굴
보고 싶으면
너희도 낮추라고
민들레
김희선
언제 어디서나 너를 볼 수 있었기에
나는 네가 꽃이란 걸 느끼지 못했다.
내 곁에
뿌리를 내린
풀인 줄만 알았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너는 늘 거기 있고
손길 한 번 주지 않아도 끈질기게 싹을 틔워
노랗게
꽃을 피우며
손짓하고 있었다.
피고 지고 또 피어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야 네 존재의 의미를 알았다
세상의
어떤 꽃보다
어여쁜 줄을 알았다.
천리향
김희선
한동안 잊고 있던
너를 돌아본다.
내미는 손 잡지 않는
그 마음 오죽할까
햇살도
깨우지 못한
기나긴 겨울잠
서러움이 웃자라면
계절을 잊는 걸까
상처 난 네 영혼은
깊은 잠에 들어 있어
짚 한 올
펴주지 못한
내 마음만 아득하다.
이른 봄 네 향기가
천리까지 간다지만
이제사 간신히
눈을 뜨는 너를 보니
저 홀로
참아낸 凍痛
그 몸부림, 눈물겹다
나무
김희선
투박한 껍질 속
부드러운 속살에서
죽어서도 선명한
나이테의 생명에서
올곧게
뿌리내리던
한 생을 바라본다.
한겨울
모진 바람
빈 가지로 받아내며
노란꽃 피워 올린
산수유 밑동에서
스스로
뿌리가 되신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직도 너털웃음
귓전을 맴도는데
어둔 밤
소나기 속을
핏빛으로 떠나신 후
남겨진
그루터기엔
내 마음만 무성하다
내어주는 삶
김희선
담장 한 모퉁이 꽃을 피운 먹자두나무
흐르는 세월 따라 육신은 갈라져도
달디 단 열매를 위해 제 몸을 내어준다.
지나는 세월이야 저대로 가라 하고
더 많은 꽃을 다는 너의 맘 나도 알지
희망이 꽃으로 피면 더 알찬 열매 되리
두 그루 어린 나무 한 뿌리로 키워 올려
자애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너에게서
온전히 내어주는 삶 경구로 받아든다.
인생
김희선
이렇게 적었다가
저렇게 고쳐보는
생각하면 할수록
알쏭달쏭 시험 답안
소신껏
써 내려가도
다시 보면 또 다른 답
두드림
김희선
어린 새 한 마리가
창문을 두드릴 때
나는
새들도 외로운 줄을
알았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외로움을 타는 줄을
바라만 보았을 뿐
손 내밀지 않는 나를
한동안 기다리다
떠나는 너에게서
수많은
두드림들을
놓아버린 걸 알았다.
비움과 채움
김희선
더 이상 아무 것도
잡고 싶지 않을 땐
그냥
그대로
놓아버리는 거다.
옹이진
집착마저도
흘려보내는 거다.
모든 걸 내려놓고
無가 되어 버린 후
그 텅 빈 공간에서
존재조차 사라지면
비로소
차오르는 것,
그곳에 닿고 싶다.
우포늪에서
김희선
너를 만난 후
나에게도
늪이 하나 생겼다.
소리가 없이도
수많은 말을 들려주고
드러내 보이지 않고도
생명을 끌어안는
고요하고 드넓은
너의 모습 바라보며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를 알았다.
비우고
채우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바람의 언덕
김희선
언제
한번이라도
내려온 적
있었던가
온몸으로
버텨내던
바람의
언덕에서
잠시도
멈추지 않던
거대한 저 풍차
내가 낚고 싶은 것
김희선
아름다운 동백섬 누리마루 아래에
물 위로 빨려들 듯 몰입한 저 남자
무엇을
낚고 있는지
뒷모습이 유유하다.
간절한 바람 하나 물속에 꽂아둔 채
복잡한 세상사를 벗어나고 싶은 걸까
온전한
저만의 시간
고요를 담고 있다.
내가 낚고 싶은 것도 온전한 나의 시간
현을 켜서 울려보고 책과 함께 떠다니며
온종일
던져두어도
외롭지 않을 옹근 여유
묵화
김희선
빛은 사라지고 여운만 길게 남아
고가의 기와도 굴뚝 위 초승달도
더 이상
담을 수 없이
이울어가는 저녁
무엇을 더 바라서 그토록 헤매었나
사라진 모든 것들 여운을 남기는데
잔잔한
한 폭의 묵화
내 맘에 스며든다.
동행
-소백산 기행-
김희선
우람한 나무들과 신명나는 휘모리장단
길 따라 함께 걷는 계곡물 지기知己 삼아
서로가
마주하는 삶
그 향기를 마신다.
당기고 밀어주며 함께 걷는 자락길
흐르는 땀방울도 흥겨움 더하는데
빠름도
느림도 없는
아름다운 이 동행
<약력>
<시조세계> 신인상,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문학상
한국문인협회회원, 한국여성시조이사, 경북여성예술인포럼위원,
한국문인협회 봉화지부장 역임, 시조 동인『오늘』회원. 현, 봉화중학교 교사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43 (토향고택)
☎ 자택 673-1112 휴대전화 010-3533-9036
e mail: kmaria1@hanmail.net http://cafe.daum.net/khs533
첫댓글 할미꽃이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죠.
검붉은 빛깔의 꽃은 겸손한 눈에만 들어오나 봅니다.
우리 아파트 곳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민들레는 어릴 적 누나가 입었던 저고리 빛깔입니다.
홀씨가 날릴 때마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꽃을 소재로 한 작품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저는 할미꽃을 무척 좋아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줍은 듯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결국엔 하얗게 머리가 세어 버린 채 발돋움하는 듯한 모습도 저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