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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보령 62코스 역방향 제2부
대궁골-동음-구릉개-고망골-갯나루길-보령방조제-소성삼거리-
동문밖마을-충청수영성 동문지-영보정-진휼청-망화문 입구
20230823
1.천수만 오천항과 충청수영성 영보정 풍광
보령시 천북면 하만4리 대궁골 마을이 사랑스럽다. 언덕에서 내려보니 마을이 더 마음에 든다. 비 내린 뒤의 깨끗한 풍경 속에 대궁골 푸른 들녘이 더 푸르러 보인다. 짐대에 오른 사슴이 있는 솟대길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대궁골 풍경이 평화롭다. 마음이 넉넉해져 대궁골 언덕을 넘어 내려가면, 천북면 면소재지 하만1리 하궁마을을 거쳐 하만교차로를 지나오는 홍보로와 재회한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는 홍성과 보령을 잇는 도로이다. 홍보로는 천북굴단지 앞에서 내륙 쪽으로 들어가고, 서해랑길은 홍보로와 헤어져 천수만 해안을 따라가다가 천북면 사호3리 열호동 마을에서 천수만 해안과 헤어져 내륙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사호3리 짓개마을, 하만4리 대궁골을 거쳐 이곳, 천북면 하만3리 동음동에서 헤어졌던 홍보로와 다시 만났다. 홍보로와의 만남은 짧아 서해랑길은 홍보로를 가로질러 두룽개골 방향으로 진행한다.
동음(冬音) 지역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는 도로명이 '두룽개길'이다. '두룽개길'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이 지역이 '두룽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두룽개'가 무슨 뜻일까? 보령시문화관광을 통해 알아보니, 두루미 모양의 섬이 있는 포구라는 뜻의 '학포(鶴浦)'가 두루미개>두룸개>두룽개로 변한 것 같다. 그래서 길 이름이 '두룽개길'이라 지어졌을 것이다. '두룽개' 지명은 현재 '동음동(冬音洞)'이라 이르며, 이 지역에서는 두룽개 안쪽 지역을 안두룽개, 바깥 지역을 바깥두룽개라고 이르는 것 같다. 바깥두룽개마을을 돌아나가면 정면에 두루미섬(鶴島)이 보이며, 그 왼쪽으로 안두룽개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두루미를 닮았다고 하는 학도(鶴島)는 '두루미섬>두룸섬>두룽섬'으로 발음이 변화되었을 것이며, 두룽섬이 있는 이곳을 두룽개라고 이르는 것 같다. 보령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 두룽개로 밀려와 두룽섬을 에워쌌을 것이다. 그렇지만 간척된 구룽섬은 현재 구릉지 모습으로 푸른 들녘에 외롭게 서 있다.
두룽개 지역은 간석지였는데 보령방조제에 의하여 농지로 간척된 것이라 추정한다. 두룽개 푸른 들녘에 긴 수로가 이어지고 하만저수지가 자리하는 것은 이 들녘이 간척농지임을 증명한다. 수로와 저수지는 간척농지에 부족한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시설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이 수로를 따라 두룽개 지역을 통과하는데, 수로의 서쪽, 하만저수지가 있는 지역을 두만골 또는 고망골이라 이르는 것 같다. 보령시문화관광을 살펴보니, 두만(斗滿)은 글자 뜻 그대로 매년 풍년이 들어 추수된 곡식이 말(斗)에 가득 넘는다 해서 두만 (斗滿)이라 했으며, 고망은 가을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말(斗)로 될 때 전년보다도 고봉(高捧)이 넘게 농사가 풍작이 된다고 하여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이후 두만골이라는 말을 쓰는 대신에 천북의 남쪽 즉 '동음동(冬音洞)의 남쪽 마을'이란 뜻으로 '고망골' 지명을 지역민들이 더 많이 사용하면서 이곳 지명이 '고망골'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수로를 따라서 고망골 배수문을 통과하면 보령호의 드넓은 습지가 나타난다. 건너편 오천면 지역에 산줄기가 늘어서고 보령호에는 미인도라고 일컬어지는 빙도가 동북쪽에, 더 북쪽에는 지기산이 비구름 속에 어렴풋 자태를 보여준다. 비는 계속해서 멎는 듯 내린다. 보령호 북쪽 습지 옆 농로를 따라가는데 우중에도 그물을 손질하는 주민을 만났다. 비가 오는데 작업을 하시느냐고 물으니 이제 곧 마치려고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분께 지리적 안내를 받으니 무지몽매하던 길손의 지리적 감각이 분명히 밝혀지고 가야할 길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대규모 태양광발전시설이 조성된 'DS하만 태양광발전소' 앞을 지나, 하만3리 동음동(冬音洞)에서 헤어졌던 홍보로와 다시 만나 홍보로를 따라 보령방조제 방향으로 이어간다.
천북면 하만3리 천북항으로 이어지는 나룻개길 입구의 홍보로 옆에는 굴구이집을 비롯한 음식점들이 있다. 나룻개길은 나루개(나루포구, 나루터)로 가는 길이라는 뜻일 것이며 이 지역은 하만3리 나루개 지역일 것이다. 나루개는 예전에 나루터였다가 지금은 천북항으로 발전한 곳이라 추정하면, 이곳에서 천북항까지는 나루개 지역일 것이다. 천북면 하만3리 나룻개길 입구를 지나 보령방조제 제방길로 진입한다. 이제부터 약 1km의 보령방조제 제방길을 걷게 된다. 멎는 듯 살며시 내리던 비가 풍경을 시샘하여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비와 운무 속에 그려지는 천수만과 보령호 풍경은 색다른 맛을 준다. 그 풍경은 길손에게 크나큰 환희의 선물 수묵화를 그려준다.
천수만은 보령시 천북면과 오천면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깊숙하게 동쪽으로 파고 든다. 광천천은 천수만 바다로 유입되는데, 보령방조제는 광천천 하구를 막아 천수만 오천항 위쪽에 보령호를 형성하였다. 방조제 건설 이전에는 천수만 바다가 빙도를 거쳐 더 위쪽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방조제 건설로 천북면 지역에 넓은 간척농지와 습지가 생겨났고, 오천면 지역에는 그만한 넓이는 못되지만 간척농지와 습지가 형성되었다. 보령방조제 제방길에서 이 풍경을 감상하는 환희에 가슴이 벅차다. 동쪽으로 보령호와 빙도, 북배산, 서쪽으로 천수만 오천항과 충청수영성, 천북항, 회변항, 안면도, 남동쪽으로 조서산과 충청수영해안경관 전망대, 이들 풍경을 어림하며, 방조제길을 허둥거리며 걷는다. 천수만과 보령호의 비 내리는 운무 풍경은 신비로운 수묵화를 그려낸다. 이것을 보랴 저것을 보랴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방조제 바로 아래 천수만 바다는 물양장이 되는 듯 소형 선박들이 정박해 있고, 그 아래 충청수영성 영보정 아래 오천항과 그 맞은편 천북항에는 많은 선박들이 흐릿한 풍경을 흔들고 있다. 보령 팔경에 속하는 '오천항 귀범(鰲川港歸帆)'은 이 풍경을 이렇게 노래한다. "漁舟商船戰浸浮(어주상선전침부) 고깃배 장사배가 이에 떴다 잠겼다/ 朝發暮歸遠近洲(조발모귀원근주) 이곳 저곳 바닷가에 왔다 갔다 한다./ 帆受順風任自去(범수순풍임자거) 돛대는 순풍 받아 미끄러지듯 떠나는데/ 䲔波出沒向鰲頭(경파출몰오두) 물결은 오두(鰲頭) 향해 들락날락 하누나." 아마도 예전에 광천장을 보기 위해 수많은 장사배들이 오천항을 통해 광천천으로 올라가는 풍경을 노래하는 것 같다. 오천항과 천북항 아래쪽으로 눈을 주면, 천수만 입구 회변항과 그 뒤 안면도가 희미한 풍경으로 상상의 즐거움을 자아낸다. 저곳에 가고 싶다. 천북면 학성리 회변항까지 걸어가고 싶다. 천수만 학성리 해안길이 모두 이어져 있을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어느 날 천수만 천북면 학성리 해안을 따라 걸어가리라.
보령방조제 위쪽 보령호에는 광천천의 하중도(河中島)인 빙도(氷島)가 떠있다. 천북면 낙동리의 빙도(氷島)는, 백제 때 정절의 표상인 도미(都彌)부인이 배를 타고 왔다고 하여 ‘미인도(美人島)’라고도 불리는데, 연륙교인 빙도교(氷島橋)에 의해 오천면 교성리와 이어져 육지화되었다. 빙도(氷島) 아래, 방조제에 더 가까이에는 돛 모양을 한 북배산(北拜山)이 보령호를 향해 떠가고 있다. 북배산 남쪽으로, 도미부인의 정절을 기리는 사당인 정절사와 무덤이 있는 조서산(鳥棲山) 상사봉, 그 산줄기 서쪽 중턱에는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가 있다. 비 내리는 운무 속에 펼쳐지는 이 풍경들을 눈과 가슴에 담으며, 방조제길을 걷기가 얼마나 벅차던가? 바다로, 강으로, 산으로, 푸른 들녘으로, 눈길을 끊임없이 돌리며 방조제길을 걸었다.
보령방조제 중간에서 천북면 하만리에서 오천면 소성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보령시에는, 보령댐에 의한 보령호와 보령방조제에 의한 보령호 등 '보령호'라는 이름의 호수 2개가 있다. 보통 보령호를 이야기하면 웅천천을 막아 건설한 보령댐에 의해 조성된 보령시 미산면의 보령호를 이른다. 그렇다면 보령댐보다 늦게 축조한 보령방조제에 의해 생겨난 호수는 보령호라는 이름 대신에 다른 이름을 붙였어야 하는데 그냥 보령호라 이르고 있다. 이 보령방조제를 오천방조제나 천북방조제, 이 보령호를 오천호나 천북호, 또는 오북호라고 불러주고 싶다. 그런데 이 호수 이름과 지역의 홍보나 어떤 이권이 얽혀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 담수호가 펼쳐진 여러 지역과 호수명이 복잡하게 관련되어 결국 보령호라고 하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천면 소성리 지역과 천북면 학성리 지역 사이 동쪽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어온 천수만 바다를 가로막은 보령방조제를 건넜다. 정면의 산 중턱에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가 보이고, 서쪽으로 오천항 언덕에 충청수영성 영보정이 솟아 있다. 소성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동쪽 내륙으로 이어가는 국도 제40호선 홍보로와 헤어져, 서쪽의 천수만 오천항 방향으로 이어지는 지방도 제610호선 충청수영로를 따라간다. 62코스 시작 지점까지는 1.5km가 남아 있다. 충청수영성 동문 밖에 위치한 오천면 소성2리 '동문밖마을'을 지나 충청수영로에서, 소성2리 경로당과 충청수영성으로 올라가는 언덕길로 들어섰다. 충청수영성 동문지(東門址)를 통과하여 충청수영성(忠清水營城) 안으로 들어갔다.
충청수영(忠清水營)은 처음에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고만(高灣)에 있었는데, 태조 5년(1396년)에 옛 회이포(回伊浦, 현 오천면 소성리)로 옮겼고, 충청수영성(忠清水營城)은 중종 5년(1510년) 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 1467~1522)에 의해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종 33년(1896년) 충청수영(忠清水營)이 폐영(廢營)되고, 1901년 수영(水營)과 관청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현재는 성지(城址)와 서문(西門), 진휼청(賑恤廳)이 남아 있고, 장교청(將校廳)과 외삼문(外三門)인 공해관(拱海館) 하나가 자리를 옮겨 보존되어 있다. 충청수영성 현존 건물인 장교청과 공해관을 보려면 오천교회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서해랑길 정코스를 따라 동문지에서 곧바로 충청수영성 내부를 가로지르는 충청수영로로 내려가 영보정(永保亭)으로 올라갔다. 살금살금 내리던 비가 멎었다. 영보정(永保亭)은 충청수영 뒤에 있던 정자였는데, 건물은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 있었다. 2013년 12월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5년 11월에 복원 공사를 완료했다고 한다.
영보정(永保亭) 마루로 올라가 보려고 했으나 장맛비에 빗물이 들이쳐서 문제가 생겼는지 마루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마루에 오르지 못하였다. '영보정(永保亭)' 현판은 정자 남쪽에 붙어 있고, 그 안쪽에 '天上樓臺畵中江山(천상누대화중강산)'이라고 적힌 편액이 붙어 있다. '천상의 누대에 오르니 그림 같은 강산이 펼쳐지는구나.' 영보정(永保亭)에서의 풍경 조망은 이 8글자가 웅변해 준다. 천수만 오천항과 그 맞은편 천북항, 천수만 입구 회변항과 그 건너의 안면도, 보령호의 섬들과 그 주변의 산야(山野), 영보정(永保亭)에서 조망하는 이 풍경은 서해랑길 62코스의 절정이요 압권이다. 이 풍경 감상에 대해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영보정(永保亭)을 노래한 조선의 선비,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1479~1504)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한시(漢詩)를 감상하는 것이 제격이다.
地如拍拍將飛翼(지여박박장비익) 땅은 새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려는 것 같고
樓似搖搖不繫篷(누사요요불계봉) 누각은 흔들흔들 매인 데 없는 배 같아라.
北望雲山欲何極(북망운산욕하극) 북쪽으로 바라보니 구름 낀 산은 어디쯤이 끝인가?
南來襟帶此爲雄(남래금대차위웅) 남쪽으로 와 띠처럼 두른 산세 이곳에서 웅장하네.
海氛作霧因成雨(해분작무인성우) 바다 기운은 안개가 되었다 이내 비를 뿌리고
浪勢飜天自起風(낭세번천자기풍) 물결 기세는 하늘에 닿듯 절로 바람을 일으킨다.
暝裏如聞鳥相叫(명리여문조상규) 어둑한 중에서 마치 새 우는 소리 들리는 듯
坐間渾覺境俱空(좌간혼각경구공) 앉았노라니 온 경지가 텅 비는 걸 깨닫겠네.
-박은(朴誾)의 '영후정자(營後亭子, 수영 뒤의 정자)' 5수 중 넷째 수, 이상하 옮김
城上朱樓積水邊(성상주루적수변) 저수지 물가에 성 위의 붉은 누각
一簾秋色澹蕭然(일렴추색담소연) 주렴 가득 가을빛 쓸쓸하기 그지없네.
潮携滿月趨空壑(조휴만월추공학) 보름달 낀 조수는 빈 골짝에 달려들고
島綴寒雲落遠天(도철한운낙원천) 찬 구름 걷힌 섬은 하늘 끝에 떨어졌네.
李菡舊居僧獨住(이함구거승독주) 이함 살던 옛집에 스님 혼자 머무르고
朴誾佳句妓猶傳(박은구가기유전) 박은(朴誾)이 남긴 아름다운 시구 기생 또한 전하누나.
煙波萬里將何適(연파만리장하적) 안개 수면 만릿길 어디로 장차 가려나
閒看沙汀估客船(한간사정고객선) 물가의 모래밭에서 장사배를 구경하네.
-정약용(丁若鏞)의 '등영보정(登寧保亭, 영보정에 올라)', 송기채 옮김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6.66km 중 6.46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15분 중 1시간 37분
언덕을 오르다 뒤돌아서서 보령시 천북면 하만4리 대궁골마을을 내려보았다. 중앙 좋은 공방집 앞에 솟대길이 보인다.
중앙 뒤에 흥양봉수대터가 있는 봉화산, 오른쪽 하만4리 노인회관 앞 대궁골 입구에서 대궁골을 거쳐 이곳으로 올라왔다.
하만리와 학성리를 잇는 하학로가, 십자가탑이 솟아 있는 천북교회 오른쪽 하만교차로에서 끝나고 홍보로에 길을 넘겨준다.
서해랑길은 하만3리 동음마을 아래서 홍성과 보령을 잇는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를 가로질러 두룽개골로 이어간다.
동음(冬音)의 한자음(漢字音)과 한자어(漢字語)가 풍기는 뉘앙스가 이색적(異色的)이다. 우선 '冬音(동음)'이란 音價(음가)를 알기 위하여 古文獻(고문헌)에서 考證(고증)하는 한편, 冬音(동음)(드름,드름)이라는 意味(의미)를 캐기 위하여 地勢(지세) 形相(형상)을 따라 究明(구명)하기로 한다. [地勢(지세)로 본 두룸(鶴)형] 冬音(동음)>두름>학(鶴)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두가지 理由(이유)가 있다. 하나는 冬音(동음)고개, 남동쪽을 안두름개, 바깥두름개로 호칭하고 있으며 한자 지명은 鶴浦(학포)로 표기하고 있다. 또하나는 두름개>학포라 지칭하는데는 生命的(생명적)인 의미부여 작용으로써 그 지세가 학(鶴)에 可合(가합)하기 때문이다. 동음(두름)이라는 말이 두루미(鶴)와 유연(有緣)하기 때문에 代想作用(대상작용)으로 類義造化(유의조화)시킬 수 있다. 形相(형상)을 이루고 있는 地勢(지세)가 흡사 老鶴守魚形(노학수어형)으로 되어 있다. 재언하면 늙은 두루미가 고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地形關係(지형관계)로 魚物(어물)이 잘 잡히고 농사도 잘되는 곳이다.(보령시문화관광)
국도 제40호선 홍보로 북쪽에 하만교차로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오른쪽 동음마을 안쪽 두룽개골 입구로 진행한다.
대궁골을 돌아서 맞은편 언덕길로 내려와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를 가로질러 두룽개골 방향으로 진입하여 뒤돌아보았다.
동음(冬音)은 안두름개와 바깥두름개로 나뉘는 듯. 두름개 바깥쪽 바깥두름개 마을을 거쳐 동음고개로 이어간다.
민우네 원두막 입구의 이 고개를 동음(冬音) 고개라 이르는 듯. 동음 고개를 넘어 동음마을, 바깥두름개마을로 진입한다.
하만3리 동음(冬音) 지역 바깥두름개마을을 통과한다.
동음(冬音) 지역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간다. 두루미 모양의 섬이 있는 포구라는 뜻의 '학포(鶴浦)'가 두루미개>두룸개(두름개)>두룽개로 변한 듯. 그래서 길 이름이 두룽개길이라 지어진 것 같다.
동음(冬音) 지역을 왼쪽으로 돌아 나가며 두룽개길에서 동음(冬音), 더 구체적으로 바깥두름개마을을 올려보았다.
동음(冬音) 바깥두름개마을을 올려본 두룽개길에서 뒤돌아서서 두름개 지역을 내려본다. 앞에 보이는 섬을 두루미를 닮았다고 하여 두루미섬(鶴島)이라 이르는데, 두름섬, 두름섬, 두룽섬 등으로 발음되어 이 지역을 두룸개, 두름개, 두룽개라고 이르며 길 이름도 두룽개길이라 명명된 것 같다.
두룸섬의 物證(물증)은 冬音(동음)에서 마주보인다는 것이다. 두룸섬은 들고나는 海水(해수)를 吐(토)하고 마시듯 호수의 干滿(간만)을 살펴보는 두룸섬(鶴浦)이 있어 鶴浦(학포)(內外鶴浦(내외학포))와 더불어 이를 實(실)히 잘 立證(입증)하고 있다. 두름개 동네는 이 지방에서도 부자마을로 이름나 있다. 두름개 앞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두룸섬(鶴島)이라고 부른다. 두룸섬은 두름개 앞에 개가 두른 곳에 자리한 섬인데 특히 그 모양이 두루미 같다 해서 두룸섬이라 한다.(보령시문화관광)
맨 뒤쪽에 동음(冬音) 바깥두름개마을이 있다. 그 앞쪽 두룽개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나왔다.
두룽개길에서 동쪽으로 보면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동음(冬音) 안두름개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두룽개길을 따라가며 왼쪽의 두룸섬을 가늠한다. 두룸섬 오른쪽이 두룸개(鶴浦)이며 맨 뒤는 오천면 소성리 조서산일 것이다.
수로 위쪽에 안두룸개마을이 있다. 위쪽에서 수로를 건너 오른쪽 농로를 따라 내려왔다. 수로 왼쪽은 고망골(두만) 지역인 듯.
고망골은 동음(冬音)의 남쪽 마을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 이 동명(洞名)은 고마(古馬, 高馬)와 두만(斗滿)의 뜻이 혼입(混入), 호용(互用)되고 있다. 두만(斗滿)은 글자 뜻 그대로 매년 풍년이 들어 추수된 곡식이 말에 가득 넘는다 해서 두만이라 했다. 한편, 고마 (古馬)라는 말 역시 가을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말로 될 때 전년보다도 고봉이 넘게 농사가 풍작이란 데서 온 말이다. 여기에서 고마(古馬)와 두만(斗滿)의 옛 상태를 추정(推定)해 보기로 한다. 오래된 옛 지명은 고마(古馬), 금마(金馬), 신마(藎馬) 등의 한자음(漢字音)을 음차기록(音借記錄)해 왔다. 백제의 도성(都城)을 고마(固麻)라 기록함도 이에 관련된다. 여기에서 맨 처음으로 불리운 동명이 고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마(古馬)의 마(馬)는 옛 기록에 남쪽(南)을 가리키는 어휘로 쓰여왔다. 그 한 예가 마(馬)파람을 남풍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고망골은 동음의 남쪽마을이란 뜻이 된다. 고망골은 조선 중기 이후 두만동이라고 불려왔다. 두만(斗滿)은 한국 지명에서 두리계(系)에 속하는 바 주위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두리(周)의 뜻이 된다. 만(滿)자를 사적(史的)으로 더듬어 보면 조선 중기에는 「많-」으로 대응되다가 그 이후로는「가득」이란 개념으로 쓰여왔다. 직역하면 추수 마당에서 벼나락이 말(斗) 섬에 가득가득 넘었다는 데서 말 두(斗)자를 첨가한 것이다. 언덕·산·물로 둘러 싸인 이 고장은 언제나 풍작(豊作)을 이루고 있다는 지명으로 쓰여온 것이다. 그 후 두리계의 두만동이란 한자 지명은 쇠퇴하고 동음(冬音)이란 지대(地帶)에 대응되는 고만골이 더욱 강하게 언중(言衆)의 의식에 깊이 파고 들고 있다. 그리하여 천북의 남쪽 즉 동음(冬音)의 남쪽 마을이란 뜻으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보령시문화관광)
오른쪽에 두룸섬이 있으며 예전에는 바닷물이 두룸섬을 둘렀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두룸개골이라 이르는 것 같다.
수로 아래의 수문은, 보령방조제에 의해 조성된 보령호로 들어가는 수로의 물을 조절하는 것 같다.
수문 바깥쪽 보령호로 들어가는 수로이다. 보령방조제에 의해 형성된 습지와 그 뒤의 보령호, 왼쪽 뒤 조서산이 보인다.
보령호 북쪽에 보령방조제에 의해 넓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왼쪽 빙도섬 뒤 왼쪽에 지기산, 오른쪽 조서산을 가늠한다.
보령방조제에 의해 북쪽에 형성된 습지길을 따라간다. 왼쪽 뒤의 산은 도미부인 사당이 조성되어 있는 조서산 상사봉이다.
보령방조제에 의해 조성된 보령호 북쪽의 습지 옆길을 따라가는데 주민 한 분이 우중에도 불구하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보령호 북쪽의 넓은 습지, 보령호 빙도섬 뒤 흰구름 속의 지기산, 오른쪽 흰구름 속의 조서산이 가늠된다.
오른쪽 나뭇가지 뒤에 보령방조제 배수갑문이 보인다. 보령방조제 남단 끝에 소성삼거리, 그 위 산봉에 충청수영 해양경관 전망대, 왼쪽 보령호 뒤에 북배산이 조망된다.
보령호 습지 언덕에 DS하만 태양광발전소의 태양광발전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하만교차로 동음고개에서 헤어진 홍보로와 재회한다. 오른쪽 보령호 습지 언덕에 조성된 태양광발전시설 앞을 거쳐 왔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를 따라 보령방조제로 향한다. 앞쪽 초록의 도로표지판이 있는 곳이 나룻개길 갈림목이다.
앞쪽에 왕새우양식장, 그 뒤에 보령호가 있다. 보령호 맨 왼쪽에 빙도섬이 있고, 빙도섬과 육지를 잇는 광천천의 빙도교가 보인다.왼쪽 맨 뒤에 오서산, 맨 오른쪽에 조서산이 흰구름 속에 숨어 있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홍성과 보령을 잇는 도로)를 따라 나룻개길 진입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홍보로의 코리아하우스와 식당가 사이에서 천북항으로 이어지는 나룻개길이 시작된다.
왼쪽에 보령호 표석과 주차장이 있으며, 오른쪽 보령방조제 배수갑문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나룻개길이 이어진다.
보령방조제 배수갑문 북단 입구에 한국농어촌공사 천수만사업단 보령유지관리사무소 건물이 있다.
보령방조제 배수갑문 앞 국도 제40호선 보령교로 진입한다.
보령방조제는 총길이 1,082m, 높이 20.7m 규모의 방조제로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개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수자원확보와 편리한 영농기반 조성을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현재 오천면과 천북면(굴 축제장)을 오가는 주도로이자 낙조감상이 가능한 포토존이 위치한다.(보령시문화관광)
중앙에 빙도, 그 오른쪽에 광천천을 가로지르는 연륙교인 빙도교, 그 뒤에 오서산이 가늠된다.
빙도는 천북면 하만리와 오천면 소성리 사이에 축조된 보령방조제의 안쪽에 있다. 보령방조제 아래쪽으로는 오천항이 있다. 빙도의 북동부, 중앙부 및 남서부의 저지대에는 논농사 지대를 중심으로 빙도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빙도마을 주변에는 빙도교회가 있고, 마을 일대에 빙도교로 연결되는 남북 방향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2010년경 3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빙도(氷島)는 천북면 유일의 유인섬[유인도(有人島)]으로 ‘홍보지구 대단위농업개발사업’으로 바다와 격리되고, 오천면 교성리와 빙도를 연결하는 빙도교(氷島橋)가 놓여 섬 아닌 섬이 되었다. 빙도는 하중도(河中島)에 해당되는데, 하중도는 하천의 중간에 유속이 느려지거나 흐르는 방향이 바뀌면서 퇴적물이 쌓여 형성되는 섬으로, 주로 큰 강의 하구(河口)에 나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보령교에서 뒤돌아보면 보령호 표석과 주차장, 그 오른쪽 뒤에 방금 그 앞을 걸어온 태양광발전시설이 보인다.
천수만 바다가 보령시 천북면과 오천면 사이의 동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곳에 오천항이 자리하고 있다.
보령방조제 제방길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를 따라 천북면 하만리에서 오천면 소성리로 넘어간다. 중앙의 산봉에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 왼쪽 뒤에 도미부인 사당이 있는 조서산 상사봉이 구름에 덮여 있다.
보령호 왼쪽 건너편과 보령호의 빙도섬은 보령시 천북면 낙동리 지역이다. 중앙에 빙도섬이 보인다.
섬에서 열리는 장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타고 오는 배가 상당히 많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마치 얼음을 타고 다니는 듯 보여 ‘빙도(氷島)’, ‘빙섬’, ‘빈섬’, ‘빈도’라 불렀다고 한다. 백제 때 도미(都彌)의 부인이 배를 타고 왔다고 하여 ‘미인도(美人島)’라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에 ‘빙도’로 고쳤다. 보령시 오천면과 천북면 사이에 있는 광천천의 하중도이며, 면적은 0.73㎢이다. 동부에는 구릉지가 있고, 북동부·중앙부 및 남서부는 저지대를 이루고 있어 논으로 개발되어 있다. 빙도는 동남부와 동중부 해안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해안이 넓은 갯벌로 둘러싸여 있다. 빙도의 북부, 서부 및 남서부 해안에는 인공제방이 연속적으로 축조되어 있다. 빙도의 위쪽에는 백정도가 있는데, 두 줄의 인공제방으로 빙도와 연결되어 있다. 백정도는 섬의 사방이 갯벌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천수만이 왼쪽 오천면 소성리 지역과 오른쪽 천북면 학성리 지역 사이로 파고 든다. 왼쪽 언덕에 충청수영성 영보정이 있고 그 아래 오천항, 오른쪽 해안에 천북면 하만리 천북항, 천수만 입구 맨 끝에 천북면 학성리 회변항이 어림된다.
오천항은 낚시와 키조개, 간재미무침과 활어의 맛명소로 오천항은 별도의 피항시설이 없을만큼 잔잔하고 깊어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선이 머물렀던 큰 군항이다. 현재는 키조개, 간재미회무침, 활어 등 먹거리가 풍부하고 사계절 낚시체험을 위한 마니아들로 북적인다.(보령시문화관광)
왼쪽 해안에 천북항, 그 언저리가 나룻개였을 것이며, 오른쪽에 보령방조제 배수갑문, 해안을 따라 나룻개길이 이어진다.
천북면 하만3리 지역을 뒤돌아본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는 보령방조제 배수갑문 앞을 거쳐 오른쪽 고개로 이어지고, 그 언덕에 태양광발전시설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건너편 왼쪽은 천북면 하만3리 나루개 지역이다.
이 길은 보령시 '도미부인 솔바람길'에 속한다. 조서산 상사봉에 도미부인 사당 정절사(貞節祠)가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도미부인 솔바람길'은 오천면을 대표하는 도미부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자원들을 연계하여 '건강이야기 솔바람길', '해안 드라이브 길', '충청수영성 해안산책길' 등 3구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숲과 바다가 어우러진 길이다.(보령시문화관광)
왼쪽 뒤 조서산 상사봉에 도미부인 사당인 정절사와 무덤, 상사정, 중앙 산봉에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가 있다.
상사정(相思亭) : 도미부인이 멀리 가버린 도미를 그리워한 곳으로 상사정은 도미부인이 남편 도미를 그리워하여 매일 이곳에 올라 남편을 그리던 곳으로 아래 내려다 보이는 경관이 장관을 이루는 명소이다. 도미부인 사당(貞節祠) : 정절을 지킨 도미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묘자리와 함께 있다. 고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도미부인 사당 어느 곳에서나 서해안의 아름다운 경관 전망이 가능하다. 매년 9월말~10월초 경모제가 개최되고 있다.(보령시문화관광)
보령호 남쪽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지역에 습지가 형성되어 있고, 나즈막한 북배산이 보령호를 향해 떠간다.
보령호 왼쪽과 중앙 뒤쪽의 빙도섬은 보령시 천북면 낙동리 지역이다. 오른쪽 작은 섬이 쌍오도의 전설이 있는 까마귀섬 같다.
한양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 대감과 김 대감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김 대감의 아들과 이 대감의 딸은 아버지들의 사이와는 관계 없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어느 날 김 대감의 아들은 쌍오도에 들어와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자 죽을 위기에 처하였다. 이 대감의 딸은 도령을 살리기 위해 쌍오도로 찾아왔지만, 김 도령은 건너편에 있는 쌍오도에 있었다. 그녀가 배를 띄워 김 도령이 있는 섬으로 가려 해도 물살이 급하여 배를 띄울 수 없었다. 그녀는 급한 마음에 바위 위에서 소리쳤다. “도련님, 군선이에요. 도련님을 잡으러 와요. 어서 피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김 도령 또한 바위 위에 올라서서 그녀에게 “나만 피할 수 없으니 이쪽으로 건너오시오.”라고 소리쳤다. 이러한 모습을 본 군선은 김 도령을 잡기 위해 김 도령이 있는 섬으로 향하였다. 군선이 쌍오도에 가까이 다가서자 김 도령은 낭자에게 가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낭자 또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치더니 군선은 벼락을 맞아 날아갔고, 도령과 낭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물줄기를 타고 승천하였다. 하늘에서도 그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가 진동하였는데, 그들의 소리가 없어지자 쌍오도에는 소나무가 하나씩 서로 마주 보며 우뚝 솟아났다. 그 후 삼짇날이면 소나무 아래에서 두 마리의 뱀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다고 하는데, 지역 사람들은 그 뱀을 이무기라고 믿고 해신으로 섬기며 제사를 지낸다고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홍보로를 따라 소성삼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정면 산봉에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가 보인다.
오천항 왼쪽 언덕에 충청수영성이 있으며 영보정이 보인다.
충청수영성은 충청 해안 여러 수군을 거느리던 조선조 충청수군의 본영으로, 조선 5대 수영 중 한 곳이다.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 침탈을 격퇴한 곳이다. 해안경관이 아름다운 해안산책길과 포토존이 위치한다.(보령시문화관광)
홍보로는 앞의 소성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고, 서해랑길은 오른쪽 지방도 제610호선 충청수영로를 따라간다. 정면 중앙 산봉에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가 뚜렷이 보인다.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는 보령시의 경관테마인 팔색보령수필 8개 테마의 풍경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스토리형 조망공간으로 특히 천수만에 떨어지는 서해 낙조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가파른 접근로 : 610번 지방도 주차장에 주차 후 산길 15분. 완만한 접근로 : 도미부인 사당에서 임도 따라 출발 30~40분. 편도 2.3km)(보령시문화관광)
북배산(北拜山, 82.7m)이 보령호 습지 끝에서 보령호를 향해 떠가고 있다.
왼쪽은 국도 제40호선 홍보로, 오른쪽은 지방도 제610호선 충청수영로, 서해랑길은 오른쪽 충청수영로를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소성2리 경로당 입구까지 지방도 제610호선 충청수영로를 따라간다.
이곳에서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까지는 500m 거리라고 한다. 전망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이곳 전망대는 조선시대 충청해안 수군사령부였던 충청 수영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펼쳐지는 8가지의 유서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풍광이 엮어내는 스토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조선 수군의 위용 및 천하명승이 어우러진 충청수영성과 영보정, 백제 도미부인의 정절이 깃든 도미항과 미인도, 천주교 순교성지 갈매못, 조선시대 애틋한 사랑이 깃든 쌍오도의 전설, 천수만 푸른 바다 위 아름다운 섬 원산도와 안면도, 키조개 만선의 꿈을 꾸는 천혜의 오천항, 저녁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장관 천수만 낙조, 벚꽃 터널의 장관 벚꽃 드라이브 등 8가지의 자연과 문화 경관을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는 명소이다.(보령시문화관광)
오천면 소성2리 '동문밖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왼쪽 뒤의 산길은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 오르는 길이다.
오천면 소성2리 동문밖마을 충청수영로(지방도 제610호선) 옆에 보령소방서 오천119안전센터가 위치한다.
충청수영로를 따라오다가 뒤돌아보았다. 왼쪽에 다정수산, 오른쪽에 동양마린 린24편의점, 오천119안전센터가 있다.
보령시 오천면 소성2리 동문밖마을에 있는 소야카페와 소성2리 농기계보관창고 앞을 지나 충청수영로를 따라간다.
동문밖마을 소성2리 버스정류소 입구에 있는 동문가든 음식점을 지난다. 뒤쪽 언덕에 충청수영성 성곽이 있다.
蘇城里(소성리)는백제(百濟) 때는 新村縣(신촌현)에, 新羅(신라) 때는 新邑縣(신읍현)에, 高麗(고려) 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 시대에는 太祖(태조) 5年에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의 고을이었으며, 世宗(세종)3年엔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의 고을이었다가, 世祖(세조)12年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고을이었다. 李朝末葉(이조말엽)에는 오천군(鰲川郡) 천동면(川東面)에 속했다가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 때 군서리(郡西里), 군동리(郡東里), 내웅리(內雄里)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있는 고소성(姑蘇城)의 이름을 따서 소성리(蘇城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이 통합하여,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蘇城里)로 되었다.(보령시문화관광)
충청수영로 동문가든을 지나서 뒤돌아보면 '동문밖길'에 버스정류소가 있다. '동문밖마을'은 충청수영성 동문 아래에 있다.
언덕에 소성2리 경로당이 위치한다. 지방도 제610호선 충청수영로를 따라가다가 왼쪽 언덕으로 올라간다.
경로당이 산 언덕 위에 있다. 어르신들을 위하여 운동을 장려하기 위하여 언덕에 경로당 건물을 세운 것일까?
소성2리 경로당 앞에서 충청수영성 동문 아래에 자리한 '동문밖마을'을 내려보았다. 소성2리 농기계 보관창고가 보인다.
충청수영성 가는 언덕에서 걸어온 길을 내려보았다. 왼쪽 나뭇가지 사이로 보령방조제 제방길, 중앙의 산 중턱에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 앞쪽 중앙에 다정수산, 동양마린 린24편의점, 보령소방서 오천119안전센터, 바로 아래에 '동문밖저수지'가 가늠된다.
언덕의 동문지(東門址)를 넘어 충청수영성(保寧忠淸水營城) 안으로 들어왔다. 왼쪽 언덕에 동문지(東門址)의 장초석이 보인다.
보령 충청수영성(保寧忠淸水營城) 입구에 동문지(東門址)·성벽(城壁)·적대(敵臺) 발굴조사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동문지는 훼손이 심하여 목조 기둥을 받쳤던 장초석과 문을 달았던 문지도리석(확돌) 등이 확인되었다. 성문은 성벽 사이에 누각을 지어 통과하는 일반적인 형식의 개거식(開据式)으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그리고 어칸의 폭은 3~3.2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충청수영성 내에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성문으로 군사적으로 망루로서의 기능을 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다져 쌓은 내탁식(內托式)인데, 문지 주변의 일부 구간은 바깥쪽과 안쪽을 모두 돌로 쌓아 만든 협축식(夾築式)으로 확인되었다. 적대는 적들의 주된 공격 목표인 성문 가까이의 성벽에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7단까지 계단식으로 들여쌓았고, 그 위로는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평면상의 길이는 8.8m, 너비는 7.49m이다. 적대는 성벽과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벽의 수·개축할 당시나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설명안내판)
충청수영성(保寧忠淸水營城) 동쪽 성벽(城壁)과 그 위쪽이 적대(敵臺)가 있었던 곳이라 추정한다.
서해랑길 코스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지만 충청수영성 장교청을 보려면 천북교회 아래쪽 길로 따라가는 것 같다.
언덕을 내려와 오천초등학교 뒤쪽 지방도 제610호선 충청수영로와 재회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오천초등학교는 1913년 오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1938년 오천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41년 오천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1948년 교성국민학교를 분리하였고, 1949년 장고분교장과 고대분교장을 부설하였다. 1962년 녹도분교장, 고대분교장, 장고분교장, 호도분교장을 분리하였으며, 1975년 빙도분교장을 설립하였다. 1996년 오천초등학교로 개칭하고, 1999년 교성초등학교와 통폐합하여 운영되었다. 2001년 빙도분교장을 통폐합하였고, 2006년 삽시초등학교를 오천초등학교 삽시분교장으로 전환되어 운영하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방도 제610호선 충청수영로가 충청수영성 내부를 둘로 가르며 관통한다. 영보정 입구에 여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오천면 종합안내도, 충청수영성 천주교 순례길 설명안내판 및 안내도 등이 세워져 있다.
충청수영성 천주교 순례길 안내 : 이곳 충청수영은 병인박해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특히 1866년 3월 30일 갈매못 순교성지에서 순교한 5명의 성인인 다블뤼 주교, 오페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와 연관이 깊다. 이들은 서울에서 1866년 3월 23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충청수영으로 이송되어 장교청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866년 3월 30일 술재고개(현 솟재고개)를 넘어 수영에서 약 10여 리 떨어진 근처의 '바닷가 모래사장' 갈마진두(현 갈매못 순교성지)로 가서 순교하였다. 순교 후 신자들이 성인들의 유해를 오천면 갈매못 순교성지부터 미산면 서짓골 성지로 바닷길과 산길을 통해 12일간 풍랑과 뇌우 속에서 운구하여 안장하였다. 「다섯 순교자는 말을 타고 수영으로 압송되었다. ... 성 목요일 3월 29일 저녁에 그들은 형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다블뤼 주교는 포졸들이 이튿날 길을 꽤 많이 돌아 이웃 읍내에 가서 사형수들을 구경시킬 계획을 서로 짜는 것을 들었다. 그는 즉시 그들의 말을 중단하며 외쳤다. "안되오. 당신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오. 내일 형장으로 곧바로 가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기 때문이오." … 포졸들의 우두머리와 포졸들과 군사들 모두가 한 마디 대답도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어김없이 시행하게 되었다.」-샤르 딜레의 '한국천주교회사' 하권 P.434에서
충청수영성 영보정 가는 길에 소성마을의 역사를 적은 소성마을碑가 세워져 있다.
이 마을은 수심 깊은 천수만 연안에 위치한 천연적인 요새지로 백제 때는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신라를 거쳐 고려조에 이르면서 왜구의 침략이 잦아지자 군선(軍船)을 두어 지키다가 조선시대에는 충청수영(忠清水營)을 설치했던 곳이다. 충청수영(忠清水營)은 태조5년(1396)에 충청수영이 고만(高灣, 현 주교면 송학리)에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를 설치하였다가 그후 이곳 회이포(回伊浦)에 옮겨졌으며 세종3년(1421)에는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 다시 세조12년(1466)에는 충청수군절도사로 승격하였고 1509년에는 성(城)을 축조하였다. 성은 길이 3174척(실측치 1650m), 높이 11척, 우물이 넷, 못이 하나, 옹성(瓮城)은 다섯, 그리고 성문(城門)이 다섯이었다. 충청수영의 관할 구역은 금강 하구에서부터 평택에 이르는 해안으로 이곳에 본영(本營)을 두고 군선(軍船) 142척, 수군(水軍) 8416명으로 연안 경비와 조운선(漕運船) 보호관리를 담당하였다. 본영에는 군선 40척, 선군 1766명, 선직(船直) 114명이 있었으며, 최고 사령관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正三品), 부사령관은 우후(虞候, 正四品)였다. 성내에 있던 건물은 동헌(東軒) 5간, 아사(衙舍) 15간, 영보정(永保亭) 24간 등 33동 312간에 달하였다. 300여년 간 서해안 방어의 중심지였던 충청수영은 1896년 탁지부(度支部) 훈령(訓令)으로 폐영(廢營)되어 모든 장비는 군부(軍部)로 이속(移屬)되고 재물은 탁지부로 이관되었다. 1901년 3월 6일에는 군부(軍部) 훈령(訓令)에 의하여 수영 건물을 불태워 장교청(將校廳) 등 11개 건물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1901년 4월 18일에는 보령군·홍주군·결성군·서산군 일부와 서해 도서를 합하여 오천군을 신설하고, 천동면 천동리(川東里, 현 오천면 소성리) 구장교청에 사무실을 정하였다. 1914년 부군폐합령(府郡廢合令)에 의하여 오천군을 폐지하고 천동면 지역과 도서 지역을 합하여 오천면으로 하였고 면소재지는 소성리로 하였다. 현재는 성지(城址)와 서문(西門), 진휼청(賑恤廳)이 남아 있고, 장교청과 삼문(三門) 하나가 자리를 옮겨 보존되어 있어 옛 역사의 애환을 말해 주고 있으며 지금의 소성리는 일제 말기에 7830평의 매립공사를 시작, 해방 후에 완공을 보아 취락을 조성하고 어항으로 개발되어 서해안 시대를 맞아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예부터 오천은 아름다운 경치로 고소 십경(姑蘇十景)이 전한다.
안면운송(安眠雲松) : 안면도의 구름 같은 소나무 숲, 오연우죽(娛烟雨竹) : 외연도의 빗살 같은 대나무 숲
오수조하(烏峀朝霞) : 오서산의 아침 노을, 오도만범(鰲島晩帆) : 자라섬의 저녁 돛대
용금망월(湧金望月) : 용금문(서문)의 보름달, 해문호봉(海門狐峰) : 바다목의 여우봉
한산석종(寒山夕鐘) : 한산사의 저녁 종소리, 능허후조(凌虛候潮) : 능허각의 조수물
연항누선(沿港樓船) : 항구에 연이은 높은 배, 고소어화(姑蘇漁火) : 고소대의 고깃배 불빛
보령시 오천면 소성1리 옛 회이포(오천항) 충청수영성 표석이 충청수영성 영보정 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표석 뒷면에 충청수영성(忠清水營城)에 대한 설명글이 적혀 있다.
충청수영(忠清水營)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부터 극성을 부린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태조 5년(1396년) 홍자해를 고민에 첨사로 임명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최초의 충청수영이 고만량(高灣梁)에 설치되었다가 얼마 후 대회이포(현재의 오천항)로 옮겨졌다. 오천항은 회이포(回伊浦)로 자라 모양의 쌍오도(雙鰲島)의 갯고랑에 있다 하여 오천으로 지명이 되었으며, 백제 때는 중국, 일본과 교역하였던 항구이다. 충청수영성(忠清水營城)은 중종 5년(1510년) 수군절도사 李長生(1467~1522)에 의해 축성되었으며 1896년(고종 33년) 절도부훈령(節度部訓令)에 의하여 패영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군선 142척, 수군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성 둘레는 3,174척(尺)이고 높이는 11척(尺), 그 안에 4개의 우울과 1개의 연못이 있다. 사방에 4대 성문과 소서문이 있었으며, 수영 안에는 운주헌(運籌軒), 능허각(凌虛閣), 영보정(永保亭), 공금당(拱襟堂), 해죽당(海竹堂), 관덕루(觀德樓) 등 수십 동의 영사(營솜)가 있었는데, 1901년 3월 6일 군부훈령(軍部訓令)에 따라 보령군수 권성수(權聖洙)가 군인과 장정 수천명을 인솔하여 수영공해(水營公解 : 수영과 관청건물)를 철거하였다. 현재의 토성(土城)과 서문(西門) 그리고 객사(客舍)인 운주헌(運籌軒)과 외삼문인 공해관(拱海館), 진휼청(賑恤廳)이 남아있다.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 관리해 오다가 2009년 8월 24일 사적 제50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영보정 가는 길에 뒤돌아보았다. 지방도 제610호선이 충청수영성 성곽을 가르며 지나고, 건너편에 오천교회와 그 앞쪽에 장교청 건물이 보인다.
영보정(永保亭) 안쪽에 편액이 보인다. '天上樓臺畵中江山(천상누대화중강산)'이라고 적혀 있다. '천상의 누대에 오르니 그림 같은 강산이 펼쳐지는구나.' 영보정(永保亭) 현판은 반대쪽에 붙어 있다.
광천천을 가로막은 보령방조제가 천북면 하만리와 오천면 소성리를 이어주고 보령호가 넓게 펼쳐져 있다. 보령호 입구 양쪽에 작은 섬 두 개는 쌍오도라고 이르며 위쪽에 미인도라고 불리는 빙도가 있다.
雙烏島(쌍오도)는 소성(蘇城) 마을 앞 천북(川北)쪽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섬이 둘이 있는데 이 섬을 '쌍오도(雙烏島)'라고 부른다. 섬이 둘이 있는데 섬 하나는 오천(鰲川)에, 하나는 천북(川北) 쪽에 있다. 모두 까마귀를 닮아서 두 섬을 '쌍오도(雙烏島)'라고 부른다.(보령시문화관광)
왼쪽 보령방조제 배수갑문교 뒤와 중앙의 작은 섬 두 개가 쌍오도, 중앙 뒤에 빙도, 오른쪽 앞에 북배산이 가늠된다.
보령방조제가 오른쪽으로 돌아 이어지, 중앙 뒤 산 중턱에 충청수영해안경관전망대, 오른쪽에 충청수영성 성곽이 보인다.
오천교회 뒤쪽에 충청수영성 동문지와 적대, 교회 앞에 장교청 건물이 보인다. 성곽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다.
흔적만 있던 영보정 터에 2015년 11월 영보정 복원을 완료하였다. 현재는 비가 들이친 까닭에 마루 보수공사 중이다.
영보정(永保亭)은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李良)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며 고쳐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였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 시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수영이 폐지되면서 없어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보정도(永保亭圖)'가 전해온다.(설명안내판)
영보정(永保亭) 앞에 '영보정(永保亭)'과 '해유시화첩 (海遊詩畵帖)'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림에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해유시화첩(海遊詩畵帖)」은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이 1842년 보령 지역 문인 5명과 함께 만든 기행시화첩으로 충청수영성 일대를 돌아보고 느낀 감상을 그림과 시문으로 만들어 엮은 화첩 형식의 책이다. 화첩에는 「영보정」 그림을 비롯하여 「송호」(현재 보령화력 일원), 「황학루」(충청수영 맞은편에 있던 정자) 그림과 각각의 풍경에 관한 여섯 사람의 시가 차례로 실려 있다. 특히 '영보정도'는 충청수영성에 정박 중인 거북선의 모습을 볼 수 있어, 19세기 중반에도 거북선이 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화첩은 총 6권을 제작하였으며, 현재 전남 화순에 있는 규남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맨 오른쪽 보령방조제 배수갑문에서 왼쪽으로 갯나루길이 보령시 천북면 하만리 천북항으로 이어진다. 앞에 보이는 산에 황학루와 한산사 절이 있었다고 하며 한산사의 저녁 종소리 '한산석종(寒山夕鐘)'은 고소십경(姑蘇十景)의 하나라고 한다.
천북면 하만리 동음(冬音) 동남쪽으로 절이 있는데 이 절이 한산사(寒山寺)라 부르는 절이다. 오천(鰲川)과 강을 사이에 하고 건너쪽에 자리한 절인데 조선(朝鮮) 때 수군영(水軍營)이었던 오천(鰲川)에서 큰 빛을 본 절이다. 오천(鰲川) 팔경(八景)의 하나로 꼽는데 종(鍾)소리가 으뜸이었다.(보령시문화관광)
천수만이 오천면 소성리와 천북면 하만리 사이로 깊숙하게 파고들어 양 해안에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놓는다.
영보정에서 성곽길을 따라 진휼청으로 내려가다가 뒤돌아 보았다. 중앙 뒤에 충청수영 해안경관 전망대가 보인다.
광천천을 막은 보령방조제는 넓은 보령호를 형성하였다. 광천천 양쪽의 쌍오도, 그 오른쪽 북배산, 중앙 뒤의 빙도가 확인된다.
오른쪽 건너편은 천북항, 예전에 나루터가 있어 나룻배를 통해 오천항 선착장과 천북나루터를 이어주었을 것이다.
충청수영성 서쪽 아래에 오천항(鰲川港) 여객선터미널이 있다. 천수만 입구 중앙 끝에 천북면 학성리 회변항, 그 건너편에 안면도가 보인다.
소성(蘇城) 서북쪽으로 廣川(광천)까지 들어가는 강물 앞에 천북 땅을 바라보고 자리한 선창을 '오천항'이라고 부른다. 백제(百濟)때부터 배가 드나드는 항구로 백제 때는 당(唐)나라를 다녀오는 중이 이곳을 통해 사비(泗泌)로 들어가면서 갈매기에 묻혀 땅을 밟았다는 기록도 있는 항구인데, 고려(高麗) 때는 자주 서해를 침범하는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해 군선이 머물었던 곳이기도 하다. 천연적으로 파도를 피하는 아늑한 자리에 몸을 감출 듯 자리해서, 바다에서도 잘 안 보이고 육지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는 항구와 조선(朝鮮) 시대에 충청수사영(忠淸水使營)이 있어서 군선(軍船)이 백여 척(百餘隻)이 항상 정박하였고, 수군(水軍) 3천여 명이 항상 주둔하였던 큰 군항이었다. 일제 말엽(日帝末葉)부터는 섬에서 광천시장(廣川市場)으로 드나드는 장배가 5일마다 범선(帆船)으로 백여 척(百餘隻)이 드나들어 黃布(황포), 白布(백포) 돛대의 정경을 이루던 항구이기도 하다. 청일전쟁(淸日戰爭) 때는 일본 군함 27隻(척)이 정박하기도 했었다.(보령시문화관광)
오천항 여객선터미널과 식당가, 그 왼쪽에 오천면 소성1리 '서문밖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소성'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서문밖'이라고 부른다. 성문 서쪽으로 밖에 있는 마을이다. 등성이를 넘으면서 서해(西海)가 한눈에 보이는 마을이다.(보령시문화관광)
진휼청 내려가는 성곽에서 깊숙하게 들어온 천수만 오천항을 배경하여 탐방을 기념한다.
충청수영 진휼청(忠清水營 賑恤廳) 뒤쪽에서 앞쪽으로 내려간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2호.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객사(客舍)와 삼문(三門)만이 남아 있다.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이 있다. 충청수영 고지도(古地圖) 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다.(설명안내판)
충청수영성 서쪽 성곽 출입문인 서문으로 내려간다.
충청수영성 서문을 망화문이라 이른다. 망화문은 충청수영성에 남아 있는 유일한 문으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다.
충청수영성 밖으로 나와서 서문(西門)인 무지개 모양의 망화문(望華門)을 뒤돌아 보았다.
서해랑길 62코스 시작지점에는 서해랑길 안내도가 없고 시작점 표지판이 있을 뿐이다.
충청수영성 망화문 아래 서해랑길 62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서해랑길 62코스 역방향 탐방을 기념한다.
오천면은 본토와 16개 유인도와 67개 무인도 그리고 10개 법정리로 구성되며 활력 넘치게 살아가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장이다. 백제시대 회이포라 불리던 오천항은 당나라와의 교역의 교두보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고 세곡수송을 맡았던 조운선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충청수영을 세웠는데 서해안의 수군사령부로서 규모가 군선 140여 척에 병력이 8,400여 명에 달했다. 우리나라 5개 수군영 중에서 보존이 제일 잘 되어 사적 제501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최근 복원된 수영성 내 영보정은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과 이항복, 송시열 등 세도가들이 아름다움을 극찬하며 찾던 주변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또 오천면에는 절개의 표상이 된 도미부인의 설화를 품고 있는 도미의 묘지와 도미부인사당이 있다. 이와 같이 오천면은 역사성과 관광소재를 많이 갖추고 있다. 또한 보령 8경의 하나인 오천항에는 키조개, 쭈꾸미 등 각종 수산물의 특산지로서 다양한 먹거리도 갖추고 있으며 200여 척의 유어선이 연중 낚시객을 맞는 등 연간30여만 명이 즐겨 찾는 곳이다.
맞은편 충청수영로는 서해랑길 61코스 탐방로이다. 2주 전 새벽에 61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였다.
팽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충청수영성 성곽과 서문을 덮고 있다. 보령 충청수영성 안내도 및 설명안내판, 오천면 종합안내도, '동백꽃 필 무렵' 촬영장소 게시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수영은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였으며, 조운선의 보호와 안내 그리고 외적 방어 역할을 하다가 1896년 폐영(廢營)되었다. 충청수영성은 1510년 수사 이장생(李長生)이 쌓은 성이며 현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서문을 비롯하여 1,650m가 남아 있다. 북벽과 남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았고, 서벽은 바다와 면한 지점에 쌓았으며, 서벽 앞은 유(U)자 모양의 포구를 이루어 전형적인 조선시대 수군진(水軍鎭)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내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중 영보정(永保亭)은 천하 명승으로 알려져 조선 시대 유명 시인묵객들이 방문하여 많은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충청수군은 임진왜란 때는 남해 바다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칠천량 해전(1597)에서는 수사 최호(崔湖)가 통제사 원균과 연합하여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병자호란(1636) 때는 수사 강진흔(姜晉昕)이 강화도 갑곶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등 국가 위기 시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다른 수영성 유적은 훼손되어 원래의 경관을 잃어 버렸지만 이곳 충청수영성은 지형과 함께 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다.(설명안내판)
충청수영성 서문 아래에 충청수영성 관광안내소, 오른쪽에 보령경찰서 오천파출소가 있다.
충청수영성 서문 아래서 서해랑길 62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치고 오천항 여객선터미널 앞에서 캔맥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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