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3.7]
살며 생각하며
제2회 청년작가 대상 수상자와 해암(海菴) 장병학 선생
운암 변종제(신인간사 대표)
천도교미술인회의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 청년작가 대상 시상식이 그것이다. 어느덧 올해로 3회째다. 상금 300만원과 궁을장이 새겨진 금목걸이를 부상으로 수여하는 이 상은 천도교미술인회가 천도교를 이끌어 나갈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뜻있는 교인 독지가의 후원과 신의당 이순종 명예회장님의 금목걸이 기증으로 지난 2020년(포덕 161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그 첫 회 수상자는 이가연 동덕이었다. 청주대 공예디자인과 출신으로 포덕 146년(2005)부터 포덕 161년까지 천도교미술인회가 주관한 회원전에 16차례 이상 연속 출품한 공적과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거기에 교당 발전에 헌신한 ‘천도교 도가’란 점 역시 제1회 청년작가 대상 수상자 결정에 한 몫 했다. 그녀의 아버지(원암 이승민)는 천도교미술인회 사무국장과 송탄교구장을 지낸 바 있다.
왕신혜 작가, 어머니 장인숙동덕/ 아버지 왕규성 동덕(두번째 사진 가운데)
지난해 제2회 대상 수상작가는 왕신혜 동덕이었다. 그녀 역시 꾸준히 천도교미술인 회원전에 참여했고,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영예의 대상 수상작가로 선정됐다. 특히 왕 작가가 포덕 161년(2020) 제30회 회원전에 출품했던 ‘동학의 등불 한울정신을 일깨우다’(양초공예 설치미술)는 기성 작가 수준의 높은 작품성을 보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왕 작가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배경은 드라마 ‘녹두꽃’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드라마를 보고 느낀 점을 설치미술로 표현한 것 같은데, 작품 속의 촛불은 한울님을 모셨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일깨운 표현으로 풀이된다. 또 들꽃은 권력 앞에서 쓰러져 가는 민초들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촛불과 들꽃의 적절한 배치 속에서 선명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는 ‘궁을장’은 ‘한울정신’을 상징한다.
왕신혜 작가는 청년작가 대상 수상소감을 통해 “부족한 실력과 작품 활동도 많지 않은데 생각지도 못한 대상이라는 크나큰 상을 주셔서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러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한 번 내보는 게 어떻겠냐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출품하게 되었는데 미술 전공자도 아닌 제가 한울님의 감응으로 생각지도 못한 큰상을 받고 보니 책임감을 느끼게 되며, 천도의 정신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겠다”고 밝혔다.
서울교구 합창단 지휘자 혜현당 장희수 동덕
왕 작가에게 출품을 권유한 어머니는 여성회 조직부장을 지낸 인의당 장인숙(수원교구) 여사다. 그리고 왕 작가를 수시로 격려하며 그녀에게 자신감을 북돋운 이모는 피아니스트이자 서울교구 합창단 지휘자인 혜현당 장희수 여사다.
청년작가 왕신혜, 제암리 학살사건을 소환하다
그녀의 어머니 인의당은 무려 14년 동안이나 제암리 학살사건 추모제에 참가해 봉사활동을 펼쳐 많은 천도교인들의 귀감이 됐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1919년 4월 15일 발생했던 민족적인 비극이다. 지금은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으로 개편된 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교회에서 일본 제국의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헌병 중위의 주도로 발생한 이 학살사건으로 천도교인 30명가량이 잔인하게 불에 타 숨졌다.
일명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지난 3월 <신인간>을 통해서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다음은 당시 기사 일부다.
‘수원군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은 7차 특별기도에 참가하였던 김흥렬, 3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한세교와 이성구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수원교구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일경의 급습으로 수원에서는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팔탄면의 백낙렬 등과 협의한 후 기독교, 유교와 연합하여 3월 31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이때 우정면 주재소 가와바다(川端) 순사가 살해되었는데, 이를 핑계로 일제는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대학살극을 자행하였는데 당시 천도교인 30여 명이 희생되었다.’
(‘49일 특별기도 참여자와 3․1운동’ 기사 중)
제암리 학살사건은 지난 2000년부터 천도교를 중심으로 유족들과 함께 매년 추모제와 순국기념관 건립 운동을 펼치면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7년 문화재청은 2010년까지 순국기념관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발표 자료에 따르면 제암리 성역화 사업은 1·2단계로 추진되는데, 우선 2007년 7월부터 2008년 말까지 21억 원을 들여 현재의 제암리 322-4 일대 인근 사유지 1600여 평을 사들여 공원화하고, 정신교육관의 개보수와 함께 주차장 등이 조성된다. 또 2010년까지 2단계로 360평 규모의 순국기념관을 새로 지어 성역화 사업을 완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왕신혜 작가의 어머니인 인의당의 봉사 활동이 빛을 발했다. 특히 왕 작가의 부친이 바쁜 일상 속에서도 헌신적인 외조를 통해 인의당이 봉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교회 안팎으로부터 큰 찬사를 받기도 했다.
나는 왕 작가가 천도교미술인회 회원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인의당, 이모 혜현당의 인내천과 시천주, 오심즉여심이 작품으로 승화돼 ‘한울정신’이란 대작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천도교 도가’의 한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자신의 작품 속에 어떤 내재된 사유를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며 성장한 왕 작가의 ‘예술혼’ 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울정신’이 마음 속 깊이 깃들었겠고, 그 정신을 작품으로 승화해서 마침내 청년작가 대상 수상자란 영광을 안게 된 것이리라, 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의 작품을 기쁜 마음으로 감상하곤 했다.
청년작가 왕신혜, 해암 선생을 소환하다
해암 장병학 선생
이제 다음 달(8월)이면 제3회 청년작가 대상 수상자를 배출하게 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인재가 영예의 대상을 수상할까? 이런 생각 속에서 8월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다 보니 문득 해암(海菴) 장병학 선생의 업적이 떠올랐다. 이 또한 물론 왕신혜 작가 때문이다. 해암 선생이 바로 그녀의 외할아버지다. 해암 선생은 내수도 수경당 엄복순 님과의 슬하에 삼남매를 두었는데 인의당 장인숙, 혜현당 장희수, 막내아들인 장택원(수원교구) 그리고 손주인 장태규, 장태우를 두었다.
해암 선생은 중앙총부 종의원과 도정, 종의원 의장 등을 지낸 나의 선친(제암 변신영)과도 막역했던 분으로, 1982년 8월 82세의 일기로 환원하실 때까지 우리 천도교단사에 여러 묵직한 족적을 남기셨다.
1906년 2월 25일 동학접주 장주성(張周星) 선생의 차남으로 출생한 해암 선생은 1919년 기미만세 운동 당시 왜경이 휘두른 칼에 중상을 입기까지 한 열혈청년이었다. 이후 1921년부터 평안북도 영변에 살면서 희천, 덕천, 영변, 순천 등지의 전교사로 활동하셨는데 다음은 그분의 주요 이력이다.
▲명성포 포덕사(1928. 4) ▲영변종리원 종리사(1928. 8) ▲청년당 영변부 포덕회 간사(1928. 11) ▲청년당 영변부 집행위원(1929. 8) ▲청년당 영변부 상민부 / 농민부 위원(1930. 4) ▲영변종리원 종리사(1933. 2) ▲영변종리원 순회교사(1937. 4) ▲청우당 영변당 부위원장, 수안군 종리원장(1949) ▲한국전쟁으로 월남 ▲인천교구 교화부원(1952) ▲교화부장(1956. 1)
포덕백년기념 준비위원(1957. 1) ▲서대문교구장(1960. 6) ▲도훈(1963. 1) ▲서대문교구장(1968. 7) ▲교구 고문(1971. 3) ▲도정(1971. 4) ▲수원포(守源布) 직접도훈(1982. 10)
북한향토학자로 유명한 이동현 선생은 해암 선생의 활동무대였던 평안북도 영변군의 개황을 소개하는 글에서 ‘영변 지역에는 천도교·기독교 등의 종교운동이 활발했는데, 천도교는 1893년 동학의 포교에 힘쓰던 강성탁(康聖鐸)이 사형당한 뒤 강대근(康大根)이 이를 계승해 포교했고, 1906년 중앙에 총부가 생기자 이곳에도 교구의 종리원이 설립되었으며, 1920년에는 농민공생조합을 세워 농민들에게 경제자립사상을 고취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1925년 농민지도자강습회를 개최해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장벽학(張秉學)·채수반(蔡洙般) 등이 옥고를 치렀고, 그 뒤 영변산업조합에서 천도교인이 생산한 직물을 배척하는 데 항거하다 장병학 등 많은 사람이 옥고를 치렀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해암 선생은 영변을 대표하는 항일운동가이자 천도교 지도자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다음은 해암 선생이 서대문교구장으로 활동하실 때인 1969년 2월 기미만세운동 50주년 특집으로 <신인간사> 좌담에 참석해서 남긴 말씀이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처절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어요. 그때 우리 천도교구장 서달제 씨 중심으로 먼저 3월 8일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우리 천도교인 105명이 남강령 밑에서 밤을 새우며 의논하기를 결사적으로 우리가 앞장서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105인 대표로 저의 가친인 장주성(張周星) 씨가 선출되어 그 남강령 밑에서 밤을 새운 그 이튿날 아침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향해 행진했지요. 그런데 읍내 15리 앞에서 왜놈 헌병대장이 가로막지 않겠어요. 그 헌병대장 뒤에는 왜놈 헌병 27명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냥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누구도 총칼 앞에서 물러설 졸장부는 없었지요. 다들 애국심에 불탔으니까요. 우리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그대로 앞으로 나가니까 왜놈들이 공포를 쏘더군요. 그래도 막무가내였지요. 그러자 일제 사격을 퍼붓고 마구 칼질을 했지요. 그때 우리 동포 27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왕신혜 작가가 제2회 청년작가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제암리 학살사건’과 ‘해암 선생’의 업적을 두루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됐다. 그러고 보니 제3회 대상 작가를 배출할 다음 달 8월이면 해암 선생의 환원 40주기가 된다. 천도교의 큰 어른으로서 인의당과 혜현당에 이어 왕신혜 작가에게까지 ‘한울정신’의 깊은 울림을 남기신 해암 선생의 영정 앞에 옷깃을 여미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