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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6. 수정
-문화재를 문화유산으로,
-징효대사 입적연도를 효공왕 5년 901년을 효공왕 4년 900년 3월 9일 으로
-징효대사 비문 찬술자 최언위, 찬술문을 비에 새길 수 있도록 비석에 적은 자 최윤, 비문을 세긴(각자)자 최한규
*쟁점사항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라는 명칭에서
효공왕이 절중 스님에게 내려준
시호는 징효대사( 澄曉大師),
탑에 내려 준 탑호는 보인( 寶印 )
즉,
징효대사 (공적)비 가 있고,
탑이 별도로 있다는 뜻,
탑이란 징효대사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말한다.
하여 한가지 명칭이 아닌 2가지 명칭으로 사용함이 타당하다
비석은 '징효대사 비(공적비, 또는 기적비, 또는 신도비)'
징효대사 부도는 '징효대사 보인탑(부도)'
영월 10경 중 제 9경 법흥사
[원문]
제 9경 법흥사
소개
사자산 법흥사는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나라의 흥륭과 백성의 편안함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로 창건했다.신라의 선승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이 886년 이곳에 선문을 열었고, 이것이 바로 라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이다.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1730년 조선 영조 6년, 1778년 조선 정조2년, 1845년 조선 헌종 11년까지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관광가이드
영월 법흥사는 우리나라 5대 적별보궁 중의 한곳이다. 영월 법흥사 석분, 영월 법흥사 부도, 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 징효국사 부도 등의 다양한 문화재를 함께 볼 수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반겨주는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절이다.
[수정의견]
영월 10경 중 제 9경 사자산 적멸보궁 법흥사
소개
사자산 적멸보궁 법흥사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찰이어서 적멸보궁이라 하며, 진신사리가 있기에 불상이 없는 사찰이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나라의 흥륭(興隆)과 백성의 편안함을 도모하기위해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興寧寺)로 창건했다.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받았던 신라의 선승 철감국사 도윤의 제자 징효 절중(澄曉折中)이 886년 이곳에 선문을 여니 이것이 바로 라말여초(羅末麗初.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의 시기) 구산선문(九山禪門.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아 그 문풍을 지켜 온 아홉 산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1730년 조선 영조 6년, 1778년 조선 정조2년, 1845년 조선 헌종 11년까지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소실(燒失)과 중창(重創)을 반복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그 후 폐사지에 가까웠던 흥녕사가 1902년 대원각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1912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33년 지금의 터로 적멸보궁을 이전 중수(重修)하였다.
법흥사에는 국가지정문화유산이 다수 있다.
보물 제 612호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시도유형문화유산 제 72호 영월징효국사부도(寧越澄曉國師浮屠), 시도유형문화유산 제 109호 영월법흥사석분(寧越法興寺石墳), 시도유형문화유산 제 73호 영월법흥사부도(寧越法興寺浮屠), 시도기념물 제 6호 흥녕선원지(興寧禪院址)가 있으며,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 등의 소중한 삼보종재가 남아있다.<법흥사 홈>,<문화재청 홈>
1. 국가·시도 지정문화재· 군 지정 문화유적 현황
⑴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국가지정 보물(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제612호. 군 지정 문화유적 기념물.
흥녕사를 크게 발전시킨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석비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그 위에 용머리가 조각된 머릿돌을 얹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에 가깝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특히 발가락과 발톱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어 눈에 띈다. 반구형(半球形)에 가까운 등은 길쭉한 6각무늬로 채워져 있으며, 중앙에는 비를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다. 머릿돌에는 네 마리의 용이 중심을 향해 마주보고 있다. 눈, 코, 입은 사실적으로 새겼으나 몸에 표현된 비늘은 약하게 새겨져 형식에 그치고 있다.
비문에는 징효의 출생에서부터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비문에 의하면 징효는 19세에 장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75세 되던 효공왕 4년(900) 3월 9일 아침에 앉은 자세로 입적하였다. 끝부분에는 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44년 후인 고려 혜종 원년(944)에 세워진 비로, 글은 ‘최언위’가 짓고 ‘최윤’이 글씨를 썼으며 ‘최한규’가 비에 새겼다.<문화재청>
징효대사 절중 스님(826~900)은 신라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도윤 스님(798~868)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이름)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 보인탑비는 절중 스님의 행장과 신라 효공왕이 ‘징효대사’라는 시호와 ‘보인’이라는 탑명을 내린 것 등을 적고 있다. <법흥사 홈>
⑵ 영월징효국사부도(寧越澄曉國師浮屠)
시도유형문화유산(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제72호
통일신라의 승려인 징효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이다. 징효국사는 19세에 탁월한 총명으로 수행을 시작하여 효공왕 4년(900)에 75세로 입적하였다. 철감선사 도윤의 제자였으며 경문왕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부도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의 세부분으로 나뉜다. 아래받침돌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을 1구씩 얕게 새겼다. 가운데받침돌은 각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둥근 윗받침돌은 연꽃무늬를 둘러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아래윗변의 모서리를 약간 죽인 듯 처리하였는데,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 안에 자물통 모양을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여덟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높게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을 축소한 듯한 장식 위로, 공 모양의 장식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으나, 두꺼운 지붕돌표현, 지붕돌의 높은 꽃 장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문화재청 홈>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하며 이곳에는 징효대사 스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사리탑 옆으로 오랜 밤나무가 함께 도량을 지키고 있어 세월의 깊이와 숭고한 멋을 느끼게 한다. <법흥사 홈>
⑶ 영월법흥사석분(寧越法興寺石墳)
시도유형문화유산(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기타) 제109호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 자리하고 있는 석분이다.
바깥부분은 낮은 언덕에서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그리 높지 않은 봉토를 이루고 있다. 내부 돌방의 벽은 자연석의 평평한 면을 가려서 10단을 쌓았는데 6단까지는 수직이고 7단부터는 각을 줄여 쌓았다. 천장은 넓고 평평한 1매의 뚜껑돌로 덮어 놓아 내부전체가 거의 원형을 이루는 있다. 석분 뒤쪽에 돌로 만들어진 관이 있어서 이름 높은 스님의 사리 또는 유골을 모시던 곳일 수도 있으나, 기록에는 승려가 수도하던 토굴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홈>
이 토굴은 자장율사께서 불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으로 내부는 가로가1m 60cm,높이가 1m 90cm정도로 한 사람이 앉아서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인데, 정진 중 주변에 가시덤불을 두르고 정진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옛 스님들께서 수행하던 토굴의 원형으로 그 가치가 크다 할 수 있다.<법흥사 홈>
⑷ 영월법흥사부도(寧越法興寺浮屠)
시도유형문화유산(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제73호
적멸보궁 뒤 자장율사 토굴 옆에 위치해 있으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측면의 전, 후면에는 장방형 곽 안에 자물통 문양(법장쇠)이 양각되었는데, 이는 사리를 봉안한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머지 6면에 인왕상과 사천왕상이 입상조각 되어 있는데 불법을 옹호하는 신장들이다.
⑸ 흥녕선원지(興寧禪院址)
시도기념물(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제6호. 군 지정 문화유적
흥녕사는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선종 9산문 중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징효대사에 의하여 크게 번창하였다. 그 후 진성여왕 4년(891)에 전쟁으로 불에 타 없어져 고려 혜종 원년(943)에 다시 세웠으나, 계속되는 재해로 폐허가 되고 현재는 선원지만 남아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흥녕선원지의 길을 가리키는 3개의 안내 석탑과 1개의 불상이 있었다고 한다. 석탑은 충북 제천시 장락에 있는 석탑과 무릉리의 삼층석탑, 주천리의 삼층석탑이고, 입구 옆에 있는 돌에 새긴 마애여래좌상은 흥녕사의 수호불이라고 전해진다.
1902년 원각스님이 새로 절을 지으면서 이름을 법흥사로 바꾸었는데, 1912년에 화재로 없어지고, 1930년에 옛 절터에 다시 세웠으나 다음 해의 홍수로 인해 법당의 석탑이 떨어져 나가고 절터 일부가 유실되었다. 현재 진입로 오른쪽에는 종모양의 부도 1기와 사리탑의 기단석으로 보이는 돌이 나란히 놓여있고, 주위에는 주춧돌 10여개가 묻혀있다.<문화재청 홈>
이 유적은 2002년에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지표조사 및 1차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04년에는 2차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다.<영월관광 홈>
⑹ 군 지정 문화유적- 추정 법흥리사지
법흥사 입구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관음사’가 위치하고 관음사 동편 계곡을 건너면 대지에 3단의 석축이 남아있다. 석축 중의 일부는 일제강점기 때 백년광업소 사무실의 축대이고, 거석을 이용한 석축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사고지로 구전되고 있으나, 지표에서 수습된 유물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 기와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와의 양식으로 볼 때 인근 흥녕선원지 2차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보다 오히려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영월관광 홈>
2. 탐방안내
문화재관람 요금을 받지 않는다.
사찰의 경내임을 알려주는 일주문을 들어서면, 노송이 예를 갖춰 맞이하는 듯한 길을 지나 넓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오른쪽으로는 손님을 위한 공양간(식당)이 있는데 낮 12시부터 1시까지 사찰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마주보이는 2층 누각은 법고, 운판, 목어가 있는 원음루이고, 오른쪽 건물은 ‘다향원’으로 사찰용품과 차, 기념품 매장으로 손님을 위한 휴식공간이다.
좌측으로 걸음을 옮기면, 오래된 밤나무 아래에 국가보물인 ‘징효대사 보인탑비’가 있고 옆에는 ‘사자산법흥사중건비’가 세워져있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노송들이 줄지어 서있고, 중간쯤에는 연화산 옹달샘이 있다.
준비된 만남으로 스님과 함께하는 차(茶)와 담소에서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귀한 여유를 얻을 수 있다.
사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⑴ 일주문
가장 먼저 마주하는 문이 일주문이다. 신성한 사찰로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는 의미가 있다. 기둥에는 코끼리와 거북이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으로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발원하며 사자산문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조성되었다.
⑵ 원음루
2층 누각으로 부처의 법을 전하는 사물인 법고(가죽걸친 짐승), 운판(날 짐승과 허공을 떠도는 영혼), 목어(물속에 사는 생명)가 있다. 예불시간에 이 소리들을 법계에 울리는 뜻은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여의고 깨달음의 진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⑶ 만다라전
만다라는 티베트 불교인 밀교에서 발달한 우주 진리의 법신세계를 나타낸다. 가는 모래로 색깔을 입혀서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라 할 수 있다. 신성한 단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하여 우주의 진리를 표현했다. 원래는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을 일컫는다. 2003년 티베트 스님들이 법흥사 법회 때 만다라를 조성하였다.
⑷ 삼성각
삼성 신앙은 불교가 민중의 생활과 정신에 깊숙이 토착화됨을 말해주는 곳이다. 칠성님 또는 칠원성군님, 독성님 또는 나반존자님(홀로 깨달아 아라한의 경지에 이름), 용왕대신(물의 신)님을 모신 곳이다.
⑸ 범종각
대종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을 치는데 우리나라 종은 특히 소리가 아름답고 여운이 길다. 종을 매단 부분을 용뉴(龍鈕)라 하는데 용의 모양을 하고 있고, 종을 치는 나무는 당목이라 하여 물고기(고래)모양을 하고 있다. 옛날에 바닷가에 용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포뢰용(葡牢龍)’이라는 용이 잘 울고 고래를 무서워했다. 그 울음소리가 마치 종소리와 같았다고 해서 종 위에 용모양의 ‘용뉴(龍鈕)’를 만들게 되었으며, 고래를 무서워해 고래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종을 치게 되었다.
⑹ 약사전
약사여래불은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하게 하는 등의 12대 서원을 세운 부처님으로서 보신부처님이라고 한다. 이곳은 적멸보궁이 뒤에 있고, 앞으로는 구봉대산과 금강송들을 바라보는 좋은 기운이 모이는 곳에 있다. 24시간 열린 법당으로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
⑺ 산신각
산신은 ‘산의 신’이라 하여 명산에는 산을 지키는 산신이 계시는데 보통 호랑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본래 산신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믿던 민속신앙으로 생명을 악귀로부터 보호해 주고, 그 산 주변을 삿된 기운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법흥사는 타 사찰과 다르게 사자산, 구봉대산, 백덕산의 세 분의 산신을 모시고 있는데, 특히 백덕산 산신은 여 산신이다.
⑻ 극락전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보살로 봉안되어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지장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⑼ 조사전
조사전은 조사스님, 사찰의 창건주 그리고 고승대덕의 영정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 국사전, 국사당, 영각, 조사각 등으로 부른다. 특히 선종사찰에서는 한 종파를 개창한 조사스님과 그 사법(嗣法) 제자들은 그 사찰의 상징적 존재이기에 영정을 봉안한다. 교종은 경전에 의거한 문헌적 해석을 중시하지만, 선종은 직관을 통한 실천수행을 강조하기에 스승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징효대사의 스승 철감국사는 전남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하여 그곳에 승탑을 모셨으며, 그의 제자 징효대사는 사자산문을 크게 중흥시킨 후 스승 철감국사를 사자산문의 개창조(開創祖師)로 모시어 세웠다. 법흥사의 조사전 내부에는 자장율사와 징효대사를 모셔놓았다.
⑽ 적멸보궁
‘온갖 번뇌 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 이란 뜻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진신 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님 열반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예배대상으로 부처님께서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곳이다. <법흥사 홈>
[의견의 사유]
1. 법흥사의 공식명칭은 ‘사자산 적멸보궁 법흥사’이다.
2. 문화재는 문화재별로, 건물은 건물별로 요약하여 나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