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죄로부터 자신들의 불순종의 죄를 민족적으로 회개하였으며, 이스라엘의 리더들로 부터
하여 종들까지 그 회개에 동참하였습니다.
1. 회개는 왜
힘든 것인가 ?
일단 사람은 저 부터도 그렇고
자신이 행한 죄와 실수에 대해 합리화하기가 쉬운 본성을 가지고 있지,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런 인간의 본성의 문제 때문에 법에서도 자기 자신의 죄를 드러내지 않을 권리가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통회 자복하는 1차적인 회개와 자기반성과 성찰도
상당한 인격의 성숙을 동반해야 하는데, 성경에서 제시하는 회개는 또 다른 차원으로 이행됩니다.
2. 돌이키는 것과
충성하는 것.
먼저 불신자나 타종교인이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서 죄인에서 의인으로 돌이키는 구원으로의 "회개"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지난 날 성경은 읽고 여러가지를 알고 있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있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과도기 시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찾는 자에게 반드시
임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경의 많은 부분이 저절로 받아 들여지게 되며, 더 깊이 들어가면 계시도 받고 신령한
은사도 맛보게 됩니다.
@ 내재적인 것으로
부터 돌이킴.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육을 입고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사람 특유의 죄된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된 습성이 성장하면서 더
크게 작용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성령 세례 이후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성격과 인성의 근본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말씀과 기도로 꾸준히 제어하고 다스릴 수는 있지만 아예 없는 것 처럼 만들수는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표현으로 각 사람이 져야할 사명과 함께 그 내면을 성령님의 임재로 다스려야 할 책임이 부여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넘어진 부분에서 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예 "놓아 버려야!" 하는가? 입니다.
놓아 버리고 방종으로 치달으면
육은 좋아 하겠지만, 영은 탄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각 사람의 영의 속성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러한 부분이
있고, 늘 넘어지는 내면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서 어떤 것을 보시길 원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령 세례 이후에도 죄로 넘어지는 자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 구원파 적인
거짓 논리에서 벗어날 것.
구원파나 그와 유사한 메시지를
신봉하는 자들은 인간의 노력을 모두 쓰레기로 취급을 하고 맙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얘기하고 있을까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세벨"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바로 엘리야 선지자와 대척점에
있으면서 수많은 악행을 져질렀던 아합왕의
아내였습니다. 이방 여인이면서 수많은 이방신들을 이스라엘로 끌고 들여와 우상의 제물을 먹이게 한 여성이 되겠습니다. 그런 여자를 맞이하여
악행을 져질렀던 자가 아합이었는데, 그 자에 대한 심판 예언이 엘리야에게 임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1장 19절 이하에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한
아합왕에게 하나님께서는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내가 재앙을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였고, 이세벨에 대해서도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는 내용의 예언을
엘리야를 통해서 선포하였습니다.
이에 온갖 악행만을 일삼던 아합이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합은 그 악행의 연쇄로 인해 전쟁에서 죽게 되고, 개들이 병거에 묻은 피를 핥았습니다.
@ 충성으로
나아감.
엘리 대제사장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mesages from the lord were very rare, and
visions were quite uncommon)고 합니다. 요즘에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렇고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종결성을 주장하면서, 말씀만 얘기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엘리 대제사장의 시대에는 두루마리 성경으로 되어
있는 말씀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활자화된 말씀은 이미 있었지만, 그 시대에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레마(꿈,환상,예언)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잘못된 예언과 환상으로 인한 부작용도 많이 있었지만, 그 사람이
마음이 깨끗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사명"을
계시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현시점 사역을 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비젼으로 보여주시는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심령 상태를
예비하여야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목회의 방향을 그 "비젼"을 따라 교정해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데... 죄악으로 치닫고 배도로
치닫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강줄기를 올라가는
형국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떠내려 가게 되어 있는 것이 영적인 세계의
실체 진실입니다. 아합왕과 엘리 대제사장과 사울왕이 쳐했던 심판의 선을 훨씬 뛰어 넘어 엘리야-사무엘 선지자와 다윗 왕 처럼 온전한 충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결 론
]
믿음의 선진들로서 엘리야와 사무엘
다윗은 "흠 없는 충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혹자들은 아니다! 다윗도 범죄하였고, 엘리야는 우울증에
걸렸으며, 사무엘은 아들들을 잘 양육하지 못하였다! 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세마포의
문제.
장차 있을
첫째 부활(공중강림과
휴거)의 때에는 이미 천국에서 흠없는 세마포를 입고 있던 믿음의 선진들과 이 땅에서 육을 입고 있는 자들 중
충성된 성도들이 부활체를 입고 천국 혼인 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과 외적인 충성된 행실을 보시는 아버지하나님께서는 일정 정도가
초과하는 믿음을 보시면 그것을 "흠 없다!" 선포하시고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의 방향성 이라는 놀라운 영적 비밀이 되겠습니다.
죄와 실수가 있는 연약한 자이지만
겸손으로 마음을
동이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통치를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결코 내세에서나 부활
이후에 후회함이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믿으니까 ! 구원은 받았으니까! 하면서 죄악으로 치달았던 자들은 받았던 것도 빼앗기고
슬피울며 이를 갈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파적인 구원"이라는 순환논리 오류에 빠져서 영적인 악한 덫에 빠져서 위험에 처해있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진리의 메시지에 귀를 닫아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