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영적지도와 상담(Care of Mind, Care of Spirit)
제랄드 메이 저, 노종문 옮김, HVP
RSCJ 영적지도자 모임 발췌 - 한순희 수녀
1장. 유산 _ 역사, 정의, 구별
영성지도(spiritual guidance)나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의 본질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 영적인 진실을 발견하고 그에 반응하도록 하는 관계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관계이다. 그런 관계는 역사 속에서 언제 어디서든 존재해 왔다. 이런 관계는 정규적일 수 있고, 일상적일 수도 있다. 또한 어떤 관계는 창조적이었고 어떤 것은 파괴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영성 인도를 제공한 사람은 누구인가? - 샤먼, 구루, 멘토, 랍비, 사제, 목사, 수녀, 신부, 영성지도자, 친구 등
-유대교 : 비록 주님 한 분만이 ‘참된’ 인도자라는 것이 율법과 예언서에 명시되었으나 제사장과 현자들이 영성 지도자의 역할 담당.
-그리스도교 : 정규적인 개인 영성 인도가 시작된 것은 3-4세기임. 안토니오(에집트) 빠콤니오(나일강 동쪽 테베, 에스나), 바실리오(소아시아), 나지안스의 그레고리오 등 이 시기 많은 사람들이 사막의 은수자들에게서 영적인 인도/지도를 구했다.
-그 이후 수도원 운동이 전개되면서 수도원은 다양한 영성 인도의 전통을 다듬고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영적지도의 종류 및 훈련
한 시기에는 개인적 영성지도가 사목적 돌봄, 영혼의 치유, 고백성사의 한 요소로 행해짐. 다른 시기에는 평신도들이 영적지도자로 활동하도록 격려 받고 어느 때는 제재를 받았다.
어떤 때는 영적지도자가 되기 위해 철저한 훈련이 필수라고 여겼다. 어떤 시기는 영혼을 인도하는 능력은 정규교육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로 부여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영적지도의 콘텐츠 :
* 정규적인 영적지도는 가장 은밀한 마음의 여행을 다루는 것.(십자가의 요한이나 아빌라의 데레사)
* 양심과 소명의 문제와 관련된 것.
* 선신 악신 식별문제 - 이냐시오 영신수련
* 심리적 성장이아 개별화 또는 자기실현과 관련이 있는 일(현대접근)
이와 같이 강조점, 형식 등이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 이 전통은 영적지도를 위한 지속적인 구조를 유지해 왔다.
(설명-가톨릭은 수도원제도, 교계제도 안에서 고백성사(특별 고백사제의 기회 등)개별 면담의 기회가 많이 보장됨.
개신교회 -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은밀한 영적인 일들에 대해 조언한다는 것을 특별히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봄. 중개자 예수님의 역할을 뺏는다고 봄. 개신교는 함께 모여 믿음에 대해 체험을 나누는 그룹 영성지도와 개인적 기도 체험, 성경묵상에 좀 더 의존하고 있다.
예수시대부터 종교개혁 이후에 이르기까지 심리적 장애와 영적장애는 거의 구별되지 않았고 많은 정신이상 증상들이 귀신들림이나 도덕적 결함에 기인하는 영적인 문제로 간주하였다.
프로이드학파의 정신분석이 등장하면서 극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프로이드는 사람의 마음을 관찰과 측정을 통해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보고 심리학을 영적인 영역에서 끌어낸 일로 여겼다.
심리학시대 - 프로이드 이후 100년도 못되어 심리치료는 많은 영역에서 정신 장애를 감소시키는 주된 방법이 되었고, 과거 영적, 도덕적 인도가 가졌던 지위를 빼앗아 버렸다. 그 결과 심리학과 정신과 의사를 ‘새로운’사제로 간주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 많은 사람이 자녀 양육법, 결혼 생활 유지법, 성공하는 법, 삶의 의미 찾는 법,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인도를 얻으려고 새로운 심리학 이론에 귀를 기울인다.
교회는 더 이상 심리적, 감정적 인도를 받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전례에만 참석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백성사와 같은 의식들이 화해와 속죄에 대한 변혁적 능력을 잃었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심리학이야말로 온전한, 효율성, 건강, 행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성직자, 수도자들은 시대에 뒤지지 않게 줄지어 심리학 훈련을 받는다. 개인 심리상담소, 사목상담소 등 성직자들이 차지하고...... 그러나 지도는 심리적인 것이고 점점 덜 영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상담으로 향하는 이런 움직임이 개신교에서 많이, 전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가톨릭, 정교회는 소수가 이쪽으로 갔다. (이는 가톨릭, 정교회는 영적지도의 전통이 보유되어 왔기 때문) 그렇다면 개신교인에게는 개인적, 심층적인 도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상담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가톨릭은 소수만 영적지도를 받아왔다.
70년대 개인/ 대중적 심리 치료에 실망 느끼고 떠남. 그 치료를 해도 여전히 자신의 의미와 목적과 근본적인 삶의 방향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음을 발견함. 심리학이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며 삶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영의 세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개신교는 영성지도에 대해 검증된 방법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다. 가톨릭의 방법은 대부분 복잡한 현대인의 필요에 적용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그래서 지난 30여 년간 (이 책은 82년 발행)영성 인도/지도의 옛 전통들을 새롭게 활용하고 영적 추구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이해 방식들과 통합하려는 의욕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영성 훈련프로그램>들이 도처에서 시작해 출판물들이 나왔다.
심각한 도전
심리학과 영성이 현대의 상황에서 어떻게 상호 관련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심리학적 현상이 영적인 언어로만 해석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영성이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되던 기간을 통과했다. 지금은 어떤 시기인가? Jung은 이 두 영역의 통합을 시도한 점에서 그 기여가 크다.
몇 가지 정의들,
1. 영성인도(spiritual guidance)는 사람들이 영적 양성을 위해 도움, 보조, 관심과 지원을 받는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이 말은 한 사람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인격적으로 인식하는 일뿐 아니라, 그 인식을 일상의 행위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내는 일에도 적용된다. 영성 인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통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영적 인도가 다른 사람과의 정규적인 일대 일 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영적지도(spiritual direction)라고 부른다.
2. 영적지도(spiritual direction) - 고전적이 형태의 영적지도에는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있다. 지도자는, 피지도자가 스스로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일하심을 분별(식별)하고, 여러 방향에서 유혹하는 많은 ‘영들’의 다양한 힘을 구별하도록 돕는다. 가톨릭이나 동방교회의 전통에서 영성지도자는 동양의 구루와 같은 ‘스승’이나 좀 더 단순하게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는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경우이든지 ‘진정한’ 영적 지도자는 관계를 통해 은혜롭게 일하시는 성령님이시라는 일반적인 전제가 있다. 과거에는 영적 지도자가 d성직자나 종교인이었다.
현대 회복된 점 - 영적지도의 부활인, 현대의 재발견과 함께, 평신도들도 안수 받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으로 영적지도를 위해 부름 받으며 은사를 부여 받고 있다는 인식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 영적 지도라는 말이 권위적이고 과거에 어떤 영적 지도자들이 피지도자를 과도하게 지배하려고 했던 경우도 있지만 영적지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 영적지도자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사람이다. (요한세자의 손가락처럼 : 요한1,35-42) 영적지도에서는 식별이 중심역할을 한다. “방향을 가리키는 일”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예)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이 나가고자 하는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밀고 당김을 경험하며, 끌림을 느끼다가도 마음이 멀어지고, 매력을 느끼다가도 반감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작은 일이나 식별의 문제 (예-책을 쓰고 있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기도 시간을 줄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기도시간을 줄일까? 그래서 그 시간에 더 중요해 보이는 책을 쓸 것인가?)
3. 영적친구(spiritual friendship)- 많은 사람들이 이 용어를 좋아한다. 지도자라는 용어가 주는 권위적인 느낌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영적 우정이 영성지도와 동의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정이라는 개념에는 관계 속에서 상호성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이는 영적지도의 고전적 모델을 벗어나는 것으로 그 결과는 긍정적, 도는 부정적일 수 있다. 오늘날 두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만나, 아무도 ‘권위자’로 여겨지지 않는 상호적인 관계에서 서로 영성 인도를 해주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완전히 ‘동등한’ 수준에서 인도와, 식별과, 서로를 위한 제안을 주고받는다.
그런 상호성은 한편으로는 참여자들 간에 더 큰 친밀함을 느끼게 하고 나눔을 고양시키지만, 정규적인 관계의 구조를 제거함으로써 영성 지도를 ‘영적인 대화“로 변질시킬 위험도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책임지는 태도는 약화되고, 직면과 명확한 분별도 장 일어나지 않는다. 구조가 결여된 영적 관계는 불필요한 산만함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4. 그룹영적 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두 사람의 지도자가 정규적인 틀이 갖추어진 형태로 참여자들을 인도한다. 그룹 내에서 회원들은 서로의 영적여정을 지원하고 통찰력과 영성지도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영적지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리더십은 확고히 인정되어야 한다. 구조가 느슨하여 리더십을 넓게 공유할 경우 영성인도나 영적우정으로 간주될 것이다.
5. 기도
영적지도에서 기도와 삶이 관건이나 특히 기도가 중심에 선다. 기도에는 묵상과 관상 등이 있다.(31-33쪽)
영성에는 두 가지 기본적으로 다른 접근법들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유념적 영성(katapathic spirituality) 또는 긍정영성- 이미지, 상징,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 성서기도 등) 항상 대중적인 지위를 차지함, 이런 접근법은 환상, 느낌, 이미지, 단어 또는 다른 감각적, 상징적 형태의 경험을 통하여 더 깊은 하느님 인식을 얻으려고 한다.9천주교, 복음주의, 대중힌두교 등)
-무념적 영성(apophatic spirituality) 또는 부정영성-지성적 표현 등을 초월하여, 그 속에 감추어 계신 하느님의 진리를 강조함.(십자가의 성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퀘이커의 침묵, 선불교 등)
-거의 모든 전통은 유념적 접근과 무념적 접근의 요소들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보통 둘 중 하나가 우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 유념적 방식이 우세하다. 그 이유는 무념적 접근법이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위협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무념적 영성 족으로 지향하는 분들이 다양한 유념적 체험과 ‘단계’를 거쳐 왔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젊은이는 유념적 영성을 지향한다. -감각, 심상, 생각을 매체로 기도한다.
<주의 사항>
-무념적 접근법이 유념적 접근법보다 좀 더 세련되고 성숙한 것처럼 서술했지만 사실 그런 것은 아니다. 개인이 선택한 영적 성장을 위한 접근법의 궁극적 가치는 오직 하느님과 그 사람 사이에서 결정 될 일이다. 영적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성향과 상관없이 두 영성이 가지는 유익과 위험을 잘 이해하는 길이다. 유념적 접근법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심상과 생각에 끝없이 몰두할 수 있다. 그 결과 모든 체험의 거룩한 근원은 가려지고 만다. 마찬 가지로 무념적 극단주의는 삶을 부정하는 반 성육신적 (강생신비)왜곡에 빠질 수 있다.
-영적지도자의 인간적 특성을 너무 과도하게 강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지도자는 ...은혜를 통해 일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분명히 인지한다면 영성 지도자의
개인 성향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지도자의 부주의와 교만, 분별력의 결여가 피지도자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라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이런 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다.
◎ 아마도 가장 흔한 경우는 지도자가 너무 많은 것을 하고자하여 어떤 식으로든 피지도자의 발달과정을 주도하고 조종하려고 나서는 것이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지도자가 영성인도와 심리적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명확히 구별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영성지도와 심리치료 (p35)
이 두 영역, 영성지도와 심리치료는 아주 많은 유사점이 있으나 이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이다.
영적, 심리적 관심이 넘쳐나는 현대에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 통합이라는 미명하에 차이점을 희미하게 하려는 커다란 유혹이 존재함 →그것은 영성
지도의 과정을 심리화 하는 위험이 뒤따른다.
영적지도를 영적인 특성을 상실한 일종의 사목- 심리적 상담으로 변질시키지 않으려면 지도자의 성숙과 깨어있는 태도가 요구된다.
◎ 심리학적 방법과 태도는 영성지도보다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이므로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광범위한 심리적인 탐구로 함께 빠져 들어가서, 신성하고 미묘하게 반응을 요구하는 영성의 성질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를 쉽게 잃을 수 있다.
영적지도에 오는 분이 그 영성에 영향 끼친 심리적 문제들을 지니고 온다. 마음(mind)과 영을 너무 엄격하게 분리하려는 것은 인위적인 일이고 도움이 안 됨. 우리는 몸, 마음(mind), 영을 소유한 인간 영혼들이다. 마음을 언급하지 않고 영만 주목하는 것은, 마음만 돌보고 육체적 건강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인격의 측면에 관심유지,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하지 않는 균형 잡힌 태도 필요함.
심리치료와 영성지도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내용(content)과 의도(intent) 측면에서 보자.
<내용>면에서의 차이점
- 심리치료- 정신적, 감정적 차원(사고, 감정, 기분 등)에 좀 더 초점을 둔다.
- 영적지도- 기도생활과 종교체험,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감각 등 영적인 주제들에 좀 더 명확히 초점을 맞춘다.
※ 이런 차원들을 함께 다룰 때. 가장 큰 위험은,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심리치료 주제)
때문에 지도자는 피지도자와 모두에게 요구되는 영적 민감함을 빼앗기기 쉽다는 점이다. 현대 어떤 ‘심리 영성’들은 마음이나 감정이나 관계 등 인간의 모든 측면이 궁극적으로 영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이것들이 영성지도 관계 안에서 중요시 될 가치가 있다는 말로 이런 종류의 속임수를 합리화함. 이 말이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는 참이긴 하지만, 이는 모든 것을 다 영성 인도라고 부르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영성지도 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영적인 것이며, 그리고 그에 대한 어떤 반응도 모두 영적인 반응이 되어 버린다. 심리학 내용이 모두 영적지도는 아니다. 경로를 벗어나는 일이다.(p.36)
또한 (예) 꿈 분석을 영성지도에 사용하는 과정이 종종 나타난다. 한없이 복잡한 것이 꿈의 성질이다. 세밀히 들어가면 복잡하다. 꿈이 그저 중요한 영적, 심리적 통찰의 숱한 근원 중 하나일 뿐 이라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꿈 자체가 엄청난 혼란의 근원이 된다. 수단이 목적을 삼키는 격이 된다.
비슷한 왜곡 - 초감각적인 심리적 체험들과 특별한 영적 능력, 구원체험, 흥분을 주는 극적이고 의미 있는 현상들에 과도한 초점 맞춤
여기에 영적 지도자가 기억해야 할 제 1 규칙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영적 관심은 무엇인가? ”
"이 일에서 나는 정말로 주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
“이 사람의 삶속에 나타난 성령의 일하심을 바라보려는 우리의 단순하고 겸손한 의도를 가로 막는 것들은 무엇인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인간체험이 다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지도는 가장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영적 특질들, 즉 하느님의 현존이나 지도를 드러내는 일 또는 그 사람의 삶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은혜의 증거들을 주로 다루어야 한다. 영적인 일에 주목하는 것은 영성지도가 시간을 두고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중요해진다.
-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피상적인 심리적 경험에 대한 관심은 선과 악의 식별이라는 좀 더 기본적인 관심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영적지도 내용
그러므로 영적지도의 내용은 개인 기도생활, 금식이나 겸손한 생활 등의 금욕적 수련과 관련된 피지도자의 성향, 하느님의 현존이나 부재 혹은 부르심에 대한 감각,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 체험, 하느님을 향한 개인적 열망, 하느님을 인식하며 사는 충만함과 자유에 도움 혹은 방해가 되는 다양한 요인 등에 주된 관심을 두어야 한다.
◎ 삶의 모든 체험이 영성지도에서 정당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영적관심의 빛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체험이 그 빛을 삼키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의도> 지향성
◎ 일반적으로 심리치료의 목적은 좀 더 효율적인 삶을 격려하는 것이다. 심리치료는 개인이 스스로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도록 하거나 자신과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자율적 감각을 획득하도록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영적지도 목적>
집착으로부터의 해방과 하느님 뜻의 식별과 그 뜻에 자기를 내어주는 자기포기를 추구한다. 이것은 영적지도, 심리치료가 지지하는 많은 문화적 기준과 가치로부터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과 치유와 해방이 실제로 일어나는 방식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심리치료와 영성지도가 좀 더 깊은 수준에서 서로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의료적 모델인
(1) 정신과 치료에서는 의사가 치료자의 역할을 하고 환자는 양순한 대상이 되어 잘못된
부분을 교정 받는다.
(2) 심리치료에서는 치료자와 내담자가 함께 치유를 위한 팀을 구성한다. 그들은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3) 영적지도에서는 진정한 치유자, 양육자, 후원자, 해방자는 주님이시다. 지도자와
피지도자는 단지 바람직한 통로, 수혜자, 또는 서로를 위한 은혜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이며, 이 차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자아 의지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하느님 뜻의 도구가 되기를 겸손히 소망하고 스스로를 그런 도구로 간주하는 심리치료사들과 상담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중요점 - 심리치료는 인간적 성취라는 의도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지만, 영적지도는 인간의 종속감을 상실한 경우 반드시 왜곡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예) 영적지도자 - “내가 이 사람을 도와야만 한다.”
“이 사람이 사물을 다르게 보게 하기 위해 내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
“당신과 내가 함께 이 장애물을 극복해 보자.”
이런 생각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무시한다. 비록 그 능력이 우리를 통해 일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참고(p39)
◎ 역사속에서 ~ 종교라는 이름으로 영적지도자들이 스스로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하느님 노릇을 하며, 거룩한 뜻에 복종하는 대신, 스스로 지배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물론 또한 다른 극단으로서 자기를 억제하는 정적주의(quietism)가 있다. 정적주의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은혜로 부여 받은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좀 덜 폭력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파괴적 대안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런 양 극단은모두 과도한 의지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앞의 것이 개인의 능력을과장하고 확대한 것이라면, 이것은 강제로 부정하고 제안하는 것이다. 다른 쪽은 하느님의 내재성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 가능성을 부인한다.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의지와 거룩한 의지의 관계는 현대 영성 인도자나 영성 지도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파괴적이고 위험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그들이 지속적으로 스스로의 영적 성향에 주의를 기울이고 비판적이 될 것을 요구하며, 또한 그들 스스로도 좋은 영성지도를 받을 것을 절대적으로 요청한다.
다음 질문은 영적 지도자에게 도전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내가 정말로 추구하는 것은 그 분의 뜻인가? 아니면 나의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