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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7. 상상계에 관한 의심들(Doutes sur l’imaginaire, 1986)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88-96.(P.250)
-출처: Hors-cadre, n° 4, 1986.
서지(書誌)적 측면: Hors-cadre[s], n° 4, 1986. - 출판사가 오르-카드르(Hors-cadre)이고, 책 제목은 길지만 (Revue Hors Cadre N°4: L’image, L’imaginaire, le cinéma à travers champs displinaires, 1986, 218p.)이다. 이 편저자들은 Michèle Lagny, Gilles Deleuze, collectif[총16명]로 되어 있다. 이 판본의 목차에는 Gilles Deleuze, “결정체의 제체에 관하여(Sur le régime cristallin”(39-[46; 8쪽])라는 논문으로 되어 있다. 인터넷 자료의 목차에는 7. Doute sur l’imaginaire로 되어 있다. 의심(doute)를 단수로 썼는데 착오일 것이다. - 미셸 라니(Michèle Lagny, 1938-2018)는 파리3대학에서 영화사 전공 여성 교수.
들뢰즈가 미셰 라니 교수와 이 논문집을 낼 때, 주제가 ‘이미지, 이미지계(상상계), 시네마’와 관련으로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발표 제목을 「결정체의 체제에 관하여(Sur le régime cristallin, 1986)」로 하였는데, 단행본 담판 1972-1990(Pourparlers 1972-1990, 1990에서는 「상상계에 관한 의심들(Doutes sur l’imaginaire, 1986)」로 바꾸어 재수록 한 것 같다. 쪽수를 비교하건데 내용 자체를 수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들뢰즈에서 중요성은 영화에서 이미지가 결정화에 되는 것에 문제를 삼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사는 철학사와 다르다. 철학사는 관념(이데아), 개념(용어든 학술어든), 지각(감성과 연관) 등으로 세분화의 길을 걷는다. 이 세분화에는 정신에서, 대상에서, 인성에서, 각각의 학술적 특이성으로 변전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런데 이미지라는 것이 벩송에 의해 중요하게 등장했다. 벩송의 이미지론을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기억과 무의식에 관한 것으로 보았겠지만, 들뢰즈는 삶에서 이미지가 현실에서 미치는 영향(감화: 감동과 감응)을 보았는데, 그것을 현실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적합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들어오면서, 이미지와 상상계는 전혀 다른 차원처럼 여겼을 것 같은데, 들뢰즈는, 이미지에 대한 논의가 표면의 논의로서 이중화와 세분화의 길을 걸었다고 본다. 들뢰즈는 네 가지정도를 분류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고, 그 중에서 결정체화가 되는 쪽에는 관념 또는 개념에 포섭될 수 있을 것이고, 이에 포섭되지 않은 더 많은 부분이 지각과 연관이 있고, 게다가 무의식이라는 실재성을 바탕으로 흐르고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즉 이미지 또는 흐르고 있는 상상(또는 공상)은 상층과 관계가 아니라 심층과 연관이라는 것이다. 벩송의 견해를 빌어보면, 상층의 결정체화는 (원자론적)관념연합과 유사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원자론적 언어학과 전통 형이상학의 관념에 귀착하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해 심층의 흐름에서 생성과 창안(발현)에서는 이미지들은 연합이 아니라 연대와 동맹을 맺는 쪽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아직도 생성과 창안이 고정화되어 있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에게는 관념도 개념도 아닌 것이 사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이런 문제거리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은 관념도 개념도 아닌 지각에 관한 것이다. 지각은 이미 애정적(감화적), 공명적(공감적), 직관적인 것들을 내용으로 하는 감화작용(affection)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자의 두 가지, 즉 관념과 개념에서 지식의 진위를 구별하는데 유용하지만, 지각과 감화에서는 삶에서 행복과 즐거움 게다가 자유에 연관이 크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또한 스피노자의 제자로 여기는 니체를 연구한 것은 이런 삶의 현실(터전)에 관심이며, 푸꼬가 들뢰즈의 글들에서 도덕론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나로서는 들뢰즈가 변증법을 싫어하고, 논리 또는 논리학을 다양하게 분류하고, 각 영역에 맞는 논리를 다루면서 각각의 기호들을 서술한 단행본을 낸 것에 관심이 있다. 왜 언어에서 진위의 논리가 아니라, 의미(방향)의 논리가 있는가? 논리학이라는 학문을 펼쳐서, 개념무한에 대하여 다양체의 논리, 탈주선(용출선)에서 분열분석의 논리, 되기라는 생명체의 논리, 리토르넬로라는 청각의 논리, 소설에서 기호의 논리, 회화라는 감각의 논리, 영화라는 이미지의 논리, 주름이라는 물체의 논리 등이 있다. 여기서 하나의 통일적 논리를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허구일 것으로 보아 변증법을 싫어했을 것이다. 왜 이런 논리들의 분화가, 19세기에서부터 탈주선을 만들 듯이 또는 분출하는 용출선을 만들 듯이, 생겨났느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생물학과 의학의 확장과 발전으로 종이라는 인간의 문제거리에서, 특히 질병의 고통은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없고 또한 인간이 혼자라는 절실함을 아파봐야 아는데, 개인이라는 인격의 문제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1789년 혁명이 일어나 두 세력, 교회 권위과 국가 권력을 제거해 본 인민이 스스로 주체임을 자각하게 되며, 게다가 인민의 역동적 힘이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방향에 대한 전망을 생성한다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하나는 도덕론에서 다른 하나는 종교론에서, 현실과 전망을 이미 주어진 또는 이미 만들어진 관념과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며 변역하는 과정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겉보기’에는 증기기관과 모터가 삶의 터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실재적으로 ‘속보기’에서는 생명체의 내부, 물체의 내부를 들여다보아 끊임없는 미세변이(돌연변이 포함)들이 지속하고 있음을 보았다. 천문학에서 달나라보다 먼 곳을 향하여 보는 망원경의 영향으로 르네상스가 있었다면, 세포나 원자를 보다 세부적으로 미세하게 안으로 보는 현미경과 전자현미경 등의 발달이 새로운 단위를 설정하게 했다. 생명체는 하나의 통일된 단위이고, 통일된 방식으로 조직화되어 있지만,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생명 활동은 미분화와는 다른 세분화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 생명체는 겉보기 유기체이지만 내재적으로 다양체이며, 그 세분화의 갈래(가지)들 중에서 어느 쪽이 삶의 터전에서 생성적인지를 다시 묻는 것이다. 양되기, 늑대-되기, 드라큐라-되기, 범-뒤기, 박테리아-되기, 바이러스-되기 등은 새로운 양태의 현존과 역동적 힘이 지속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고, 흐름에서 새로운 분출선을 만들고 있다는 것도 감지하게 된 것이다. 회고가 아니라 전망은 ‘아차’하는 순간에 미래를 예견하려는 지성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회고가 아니라 내성적으로, 내재성의 역량이 실재하고 있다 자각으로, 미래에 투사하는 전망은 예측하여 알아맞히는 것이라기보다, 스스로 새로운 길을 생성하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생산(창조)되는 어떤 것이 된다. 이미지론의 장점은 생산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또한 그 여러 갈래들이 진행하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어느 것이 미래에도 존속할 수 있느냐는 것은 갈래들이 생태와 연대와 공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미래는 정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54RME)
II. Cinéma 53-112
4. Trois questions sur Six fois deux(Godard) 55-66.
5.Sur L’image-mouvement67–81
6. Sur L’image-temps82-87
7. Doutes sur l’imaginaire 88-96 <- Hors-cadre, n° 4, 1986.
8. Lettre à Serge Daney: Optimisme, pessimisme et voyage 97-112
# II.7. 상상계에 관한 의심들(1986) - Doutes sur l’imaginaire 88-96[9쪽]
- 오르-까드르(Hors-cadre), n° 4, 1986.
Q1. 운동-이미지은 의미의 논리(1969)의 문제제기와 다시 관계 맺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문제제기를 깊이로 이전 시켰다. 의미에 대한 “논리학”이 역설과 언어의 공존하는(consubstantiel) 연관을 탐색하곤 했을 때, 운동이미지는 역설 바깥의 출구를 암시하는데 이때는 역설적인 집합 용어 대신에 무한히 열린 총체성의 관통하는 용어로 대체한다.
녹이는[해결하는] 조작 작용에서 영화기술적 모델의 공헌(la part, 기여)은 어떤 공헌인가?그 기여는 시네마로부터 시작하여 벩송을 읽으면서, 이로부터 “우주를 시네마 그 자체로서” 생각하기에 이른다.
다른 용어로 말하자면, 시네마는 당신의 탐구 속에서, 개념적 원문의 강독을 분명하게 하는 은유(une métaphore)의 역할을, 또는 새로운 논리학의 자리(place, 판)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기안자(un concepteur)의 역할을 하는가? (88)
Q2. 벩송-시네마라는 짝에 닻을 내린 당신의 반성은, 용어의 플라톤적의 의미에서 당신이 결국에는 범주들과 본징들을 이데아들이라 성질을 부여하겠지만, (미학적) 범주들과 (철학적) 본징들에 관해 작업한다.
다른 한편 시네마의 기호학적 분석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퍼스(Peirce, 1839-1914)가 제기한 기호들에 대한 기호학 일반을 재발견한다.
시네마는, 기계적 양태로 실체적이고 보편적인 사유를 다시 실행하기 위하여, 당신에게 특권적 소명(une vocation, 자질)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용어들 자체에서, 시네마의 개념작업을 주장하는 요소들은 어떤 요소들인가? 또한 운동-이미지의 용어에서 이미지와 운동의 연관들은 어떤 연관들인가? (88-89)
Q3. 당신은 당신의 시네마의 분석에서 상상계[이마지계]라는 학술어(le terme d’imaginaire)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 회피의 이유들은 어떤 것인가? 필름의 모습 드러내기에서 빛이 역할에 관한 당신의 반성들, 그리고 이미지 속에 이미 있는 한 시선에 대한 매혹적인 당신의 가설, 이것들은 당신에게 상상계의 개념작업을 명확하게 해 줄 수 없는가?
Q4. 더욱 넓게 보아, 상상계라는 용어는 학문들에 따라 특별하게 변할 수 있는데, 이 용어는 철학적 영역(le champ, 장)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 용어를 정의할 것인가.
Q5. 시네마에 대한 당신은, 분석은 당신 고유한 탐구에서, – 시네마를 포함해서 – 그리고 당신의 글쓰기 실행에서, 상상계의 발견수법적인 기능을 특별하게[특수하게] 하는 대로 당신 스스로를 이끌어 갈 수 없었는가? (89: 이상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들뢰즈는 셋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GD1. 열려진 총체성의 관념은 소위 말하는 영화기술론적 의미이다. .. 아이젠슈타인(Eisenstein, 1898-1948)은 전체-이미지 회로의 이론을 만들었다. 그 이론에서 각각(회로)은 다른 것에 다시 이어진다. .. 그에 따르면 실천적으로 그것은 몽타쥬-단면(plan-montage)의 연관이다. (89)
아이젠슈타인은 열려진 총체성으로 황금수[황금비율]와 더불어 명시적 이론을 만들 것이다. 이런 이론은 “도금 입힌”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자기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고, 심지어는 전위 시네마의 충분히 일반적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 거짓 연결접속들(les faux raccords)은 법칙이 된다(위험한 법칙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실[접속]만큼이나 게다가 진실[접속]보다 훨씬 더 많이 거짓 연결접속을 망칠[실패] 수 있다.) (90)
사람들은 여기서 일체의 파라독스들을 재발견한다. 그러나 만일 비합리적 절단들이 본질적이 된다면, 본질적인 것은 더 이상 운동-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미지이다. .. 합리적 절단에 의한 이미지들의 연쇄들은 더 이상 없고, 비합리적 절단들의 재-연쇄들만이 있다(레네, 고다르). 이것은 영화기술론적 다른 체제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언어의 파라독스들을 재발견한다. (90)
예를 들어 철학이 시간-운동 연관들의 변이를 어떤 순간에 조작적 작업을 했다. 그런데 아마도 시네마도 동일한 것을 하는데, 다른 문맥에서 다른 역사에 따라서 한다. 두 역사들의 결단적인 사건들은 공명 속으로 들어간다. 비록 이것들이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 철학-시네마의 연관, 그것은 이미지와 개념의 연관이다. 그러나 개념 자체 속에 이미와 연관이 있고, 이미지 속에 개념과 연관이 있다. (91)
[거짓 연결(les faux raccords)에 대한 작업은 몽타쥬 작업에서 일어나는 데, 아이젠슈타인(Eisenstein, 1898-1948)이 사용한 방식이었다. 그의 작품으로 파업(La Grève 1924), 전함 포템킨(Le Cuirassé « Potemkine » 1925)이 있다. , 그리고 드레이어(Dreyer, 1889-1968)가 잔다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에서 잘 사용했다고 한다. 프랑스 영화가들은 몽타쥬 기법보다 카메라의 작동방식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 알랭 레네(Alain Resnais, 1922-2014)와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는 다른 기법을 사용한다. 이와 또 다른 소리와 시각 사이의 비합리적 절단을 사용한 스트로(Jean-Marie Straub, 1933-), 지베르베르크(Hans-Jürgen Syberberg, 1935-), 뒤라스(Marguerite Duras, 필명 Marguerite Donnadieu 1914—1996)등이 있다. ]]
[철학과 시네마가 공통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철학은 이미지가 아니라 개념 또는 용어를 다룬다. 여기서 두 영역(철학과 시네마)에서 이미지는 추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과 심리학은 이미지를 현실 속에 잘 투영하지 못하는데 비해, 시네마는 점점 더 가상적 세계를 현실에 투사하고 있다. 이 둘 사이의 간격은 크다. 철학은 삶의 터전에서 변역인데 비해, 시네마는 가상성을 현실의 부분으로 삼으려 한다. 총체성에는 부분이 연결되어 있지만, 가상성에는 부분을 독립적인 것으로 삼는 데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이다. (54RME)]
GD2. 실제로, 사람들이 관념(Idées, 이데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때로는 이미지들 속에서 때로는 기능들 속에서 때로는 개념들 속에서 실행되는 심급들(ces instances)이다. 이데아를 실행하는 것, 그것은 기호(le signe)이다. 시네마에서 이미지들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이미지들의 혼성[구성]과 발생의 관점에서 생각되었던 이미지들이다. 내가 항상 흥미를 갖는 것은 기호라는 용어이다. (92)
만일 내가 퍼스(Peirce, 1839-1914)를 이용한다면, 그것은 그에게서 이미지들과 기호들에 대한 깊은 반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언어의 영감으로서 기호학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데, 왜냐하면 기호학은 이미지의 용어와 기호의 용어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기호학은 이미지를 진술(un énoncé)로 환원하는데, 그것은 나에게 아주 이상야릇한 것 같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호학은 진술이란 이름으로 감춰진 언어적 조작작업들을 – 연사론들(syntagmes), 어형변화들(paradigmes), 즉 기표를 - 강하게 은폐한다. (92)
시네마는 우선 운동-이미지이다. 즉 심지어는 이미지와 운동 사이에 “연관”이 없다. 시네마는 이미지의 자동운동을 창조한다. 그리고 시네마가 시네마의 칸트(Kant, 1724-1804)적인 혁명을 행할 때, 말하자면, 시네마가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키기를 끝낼 때, 시네마가 운동으로 하여금 시간에 의존하게 할 때(거짓운동을 마치 시간의 연관에 대한 주장으로서), 그때는 영화기술적 이미지는 시간-이미지가, 즉 이미지의 자동-시간화가 된다. (92)
질문은 보편적인 것의 주장이 아니라 특이적인것의 주장이다. 즉 이미지의 특이성들은 어떤 것인가? 이미지는 정의되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보편적으로 표상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특이성에 의해 다시 연결되는 특이한 점들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92)
[들뢰즈에서 기호란 철학에서 관념과 개념만큼이나 중요하다. 기호란 특히 문학에서 내재성이 표출되는 성질들의 것이다. 이 기호의 논리는 언어의 단어(항목)이나 개념의 논리와 다르다. 왜냐하면 이 기호의 논리는 진위의 결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어떤 관심의 영역를 표현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성(coeur)에서 표출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퍼스의 기호학은 표상항(representamen)[기표], 대상(object), 해석항(interpretant)[기의]의 세 요소로 분류한다. 표상항에는 성질기호(Qualisign), 개별기호(Sinsign), 법칙기호(Legsign)로, 대상에는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으로, 해석항에는 해석기호(Rhema), 발화기호(Dicisign), 논항기호(Argement)로 분류한다.]
[칸트적 혁명이란 시네마의 의미에서 재론할 수 있다. 사물에 주체에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사물을 구성한다. 이미지가 공간 속에서 나열되듯이(몽타주 기법)이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것에서 이미지가 자기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내포하고 시간 속에서 흐른다. 그 시간-이미지는 누벨바그에서 등장하였다. 영화의 이미지는 조립과 조합으로 시계의 침을 가리키듯 운동을 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흐름과 변화와 생성이 시간이다.]
GD3.4.5.
[여기에 벨송을 끌어낸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미지를 화면(plan)과 틀(cadre)로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 화면과 틀이, 언어학이나 철학에서 개념과 같은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석철학과 언어학에서 개념은 공통성을 추출한 사물에 대해, 칸트식으로 범주적이다(아리스토텔레스주의처럼 보편적이 아니라도). 이에 비해, 영화에서 이미지의 여러 변형들에서 가장 잘 드러낸 클로즈업(gros plan)을 개념으로 삼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들의 평면들은 기억의 흐름 속에서 추억들처럼 작동하지만, 어느 추억을 현실화의 역할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억이 현실화의 역할을 한다. 이미지들 중에서 클로즈업이 가상성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기억 중에서 한 추억이 현실화를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럴까? 들뢰즈가 벩송을 빌려와 설명하는 것에서 답이 있을 것이다. ]
사실 거기에 소위 말하는 철학적 문제가 있는데: “이마지계(imaginaire)”는 좋은(알맞는) 개념인가? 우선 “실재적-비실재적”이란 첫째 짝이 있다. 사람들은 벩송의 방식으로 이 짝을 정의할 수 있다. 실재적인 것, 그것은 합법적 연결, 즉 현실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연쇄이다. 비실재적인 것, 그것은 의식에 갑작스럽고 불연속적인 출현이며, 그것은 현실화되는 한에서 잠재적[영화에서 가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진실-거짓”이라는 다른 짝이 있다. 실재와 비실재는 항상 분명하다. 그러나 둘의 구별작업이 항상 분간가능한(dicernable) 것은 아니다. 실재와 비실재의 구별이 분간가능하지 않을 때, 거짓이 있다. .. 그 거짓은 오류 또는 혼동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결단할 수 없게 하는(indécidable) 가능태(권능)이다. (93)
[진리와 거짓의 구별이 대상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비실재적의 분간불가능성일 때 거짓이다. 기호관계에서 이미지는 실재 대상과 연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기표와 기의가 대상과 무관하듯이. 그럼에도 영화에서 이미지의 연결접속은 대상과 연관 속에 있다고 할 때 실재적이 아닐까? 꼭 사물이 아니라도 전망의 행위에 관해서 실재적과 비실재적의 구별이 없을 때, 분간불가능한 것은 진위의 구분이 아니라, 현실화와 비현실화에 있을 것이다. 영화는 가상성이라는 점에서 분간불가능성이 유적 개념처럼 가능태(권능)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54RME)]
이마지계는 매우 복잡한 용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짝들이 교차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마지계, 그것은 비실재적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의 분간불가능성이다. 두 항들은 서로 상응하지 않고, 그것들은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기들의 구별을 교환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구별을 결정체적(cristallin) 현상 속에서 보는데 3가지 측면에 따라서 이다.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 사이에 교환이 있고,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이 되고 거꾸로도 된다. 투명과 불투명 사이에 교환이 있는데, 불투명은 투명이 되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배아와 환경 사이에 교환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로, 이마지계는 일체의 교환이다. 이마지계는 결정체-이미지(l’image-cristal)이다. 이마지계는 근대 영화에서 결정적(déterminante)이었다. ..사람들은 결정체-이미지를 막스 오퓔스(Max Ophüls, 1902-1957), 르누아르(Jean Renoir, 1894-1979),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1993)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1906-1976), 타르코프스키(Andreï Tarkovski, 1932-1986), 자누시(Krzysztof Pius Zanussi, 1939-)…에서 발견한다. (93)
그리고 사람들이 결정체 안에서 보는 무엇인가가 있다. 사람들이 결정체 안에서 보는 것, 그것은 거짓이며, 오히려 거짓의 잠재성(권능)이다. 거짓의 잠재성, 그것은 인격의 시간(le temps en personne)이다. .. 이것은 시간의 영화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웰스(Orson Welles, 1915-1985), 레네(Alain Resnais, 1922-2014),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1922-2008)에서 이다. (93-94)
[거짓의 잠재성이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소설과 단편소설, 게다가 만화와 영화에서는 더욱 효과를 갖는다. 영화가 결정체-이미지가 인격적 시간이라고 할 때, 인간적인 것을 내포하고, 영화를 본 사람들 간에 인간적 관계가 설정되고 또한 소통(교환)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듯이, 영화가 이미지들로서 관계맺는 방식이 인간적인 시간(temps en personne)에 연관이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영화에서 들뢰즈는 그것을 결정체(투명체)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이미지의 여러 성격과 달리 흐름 속에서 어떤 것으로 형성 또는 되기로 등장하는 것을 결정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들리즈가 이 논문을 발표할 때, 제목은 “결정체의 제체에 관하여(Sur le régime cristallin)”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많은 중요성을 이마지계라는 용어에 결합시키지 않는다. 한편으로그것은(그 용어) 결정체화(un cristallisation), 물리적, 화학적, 심리적 결정체화를 가정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고, 마치 교환 회로처럼 결정체-이미지에 의해 정의된다. 그런데 상상하는 것(imaginer), 그것은 결정체-이미지들을 제작하는 것이고, 마치 크리스탈처럼 이미지를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마지계가 아니고, 그것의 삼중회로- 즉 현실적-잠재적, 투명-불투명, 배아-환경 - 에 따라서, 발견적 수법을 갖는 크리스탈(결정체)이다. 다른 한편으로 결정체 그 자체는, 이마지계가 넘어섰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거기서 보는 것 만에 의해서 가치를 갖는다. 결정체 속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 그것은 자치적이 된 시간이며, 운동으로부터 독립된 시간, 끊임없이 거짓 운동을 생장하게 하는 시간의 연관들이다. 나는 꿈속에서 환타즘 속에서… 등등에서 이마지계의 권능을 믿지 않는다. (94)
나는 이마지계의 특수성을 믿지 않고 오히려 이미지의 두 체제를 믿는다. 사람들이 유기적이라 부르는 한[첫째] 체제는 운동-이미지 체제이며, 합리적 절단과 연쇄에 의해 진행하며, 그 자체 진리의 모델을 투사한다(진실, 그게 전부…). 그러고 나서 [둘째] 체제는 결정체의 체제인데, 시간-이미지의 체제이며, 비합리적 절단에 의해 진행하고, 재-연쇄들만을 갖는다. 진실한 모델 대신에 생성처럼 거짓의 권을 대체한다. (94) [체제(le régime)에 관하여]
오래 전에 보링거(Woringer, 1931-2014)는 “고전적” 유기적 체제와 비유기적 또는 결정체적 체제의 대치를 예술에서 제시했다. (95)
니체(Nietzsche, 1846-1900)는, 진실의 모델을 생성의 권능으로 대체하기 위해, 유기적인 것 대신에 비유기적 삶을 대체하기 위해 논리적 연쇄고리들을 “비장한(pathetique)”(경구) 재-연쇄고리들을 대체하기 위해, 결정체 체제 속에서 뒤엎는 철학적 담론의 예이다. 보링거가 표현주의라고 불렀던 것은 비유기적 삶의 이해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경우이다. (95)
여기에서 결정체와 유기화로 고려되는 두 체제 이외 다른 체제는 없는가? 분명하게 그와 다른 체제들이 있다(디지털 전자 이미지들의 체제는 어떤 체제인가, 즉 탄소 체제(un régime-carbone)아닌 규소체제(un régime-silicium)란 어떤 체제인가?, 여기서 예술들, 과학 철학이 만남들을 [미래에] 조작할 것이다). (95) [그가 마그네틱 워크맨에서 mp3로 넘어가는 체제에 대해 크리스탈-이미지란 용어 이외 다른 용어를 창안할까?]
조작작업(une opération)은 시네마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또한 예술들에서 과학들에서 철학에서도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마지계가 아니라 기호들의 체제(un régime de signes)이다. 열렬하게 내가 그것을 바라건데, 또 다른 체제들이 있다.기호들의 분류화 작업은 무한하다. 그리고 우선 왜냐하면 무한한 분류화 작업들이 있기 때문이다. (95)
내(GD)가 흥미를 갖는 것, 그것은 약간 특별한 학문분야인데, 분류학(la taxinomie)이며, 분류화 작업들 중의 분류화 작업이며, 이 분류화 작업은 언어학과는 반대로 기호라는 용어 없이 지낼 수 없다. (95-96, 마지막 문장) [기호들은 발생적이고, 다발 속에서 갈래의 발생적 방식으로 되기일 것이다. (54RMF)
[우선 국가와 제국에는 크게 보아 실행의 방식이 둘이다. 하나는 위계(une fili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연대(une alliance)이다. 둘 다 내부에는 다양한 제도들과 체계들이 있다. 이들의 권력이 상부이냐 심층이냐 라고, 원인(archē) 또는 이유(raison)에게 찾아가 물을 수 있다. 지선, 총선, 대선에서, 영토화와 연관하는 지선과, 이익우선을 다루는 총선과 달리, 인민의 지위를 기호로서 드러내는 대선은 체제를 숨기고 있다. 이준석(1985)과 윤석열(1960)의 치맥 장면(gros plan, 클로즈업)은 몽타쥬가 아니라 들뢰즈 표현으로 수정체이다. 무엇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린다고 하는 것은 언어학의 예측(기대)의 표현이고, 이어지는 거짓 접속(faux raccord)은 어제-이제-아제를 연결하는 심급(instance)이 아니다. 거짓접속이 영화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은 기호로 등장하는 화면을 상상계(이마지계)로 해석들 붙일 수 있다는 정도이다. 이 상상계가 정치적 장면이라고 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해석에서 현실적이냐 가상적이냐는 그 만난 두 사람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결정하겠다면, 이는 시간을 필요로 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가 치맥장면을 수정체(결정체)라고 한 것은 타당할 것이다. 그것으로 끝날 수 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며, 그저 철학적으로 표상의 한 겉면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철수의 행적에서 어떻게 겉면이 상징을 이루지 못하고, 현상화에서 불투명으로 변전되어갔는가를 보여주었듯이, 윤석열도 이준석과 치맥은 오세훈을 불러들이기 위한 방편이었을 수 있으나 오세훈의 불참으로 불투명으로 변전되었다. 게다가 들뢰즈 표현으로 삼중회로- 즉 현실적-잠재적, 투명-불투명, 배아-환경, – 중에서, 이번 클로즈업은 잠재적-불투명-환경으로 엮어진 것이다. 체제는 여러 가지이다. 대선은, 지선과 총선과 달리,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인민의 열망이 담긴 체제에 대한 변역(變易)을 주제로 삼는다. 변역은 이미 심층이 변화의 흐름으로 매끈한 공간을 달리고 있다. 이 흐름을 국가라는 제도 속에서 체계화할 수 있는 생산적 양태를 대선출마자집단은 언어로, 이미지로, 크리스탈로, 기호로, 기억으로, 무의식으로 생산하고 창안해야 할 것이다. 설탕물이 녹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54RMF)]
(8:28, 54RM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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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플라톤(Platon, Πλάτων,전428년/427-전348)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며, ‘아카데메이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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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인간의 표상적 인식의 조건을 규정하고, 도덕적 이성의 신에게 종속을 요청하고, 미적으로 신의 작업의 숭고함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이 긍정한 프로테스탄트 철학을 구성하였다.
1839 퍼어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미국 수학자, 철학자. 실험실의 작업에 기초하여 칸트의 인식 비판에서 출발하여 “명제의 의미는 그것의 논리적(물리적) 귀결이다.”라는 준칙을 세워 실용주의로 길을 열었다.
1846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6-1900) 독일 문헌학자, 철학자.
1859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1941) 유태인 출신의 프랑스 본성내재주의 철학자. 훗설과 달리 현상보다 강도성의 근원에 대한 탐문을 철학의 주요 관심으로 보았다. 그는 철학의 방식은 (내재적) 체험의 정확성과 문제 제기에 있다고 보았다.
1894 장 르누아르(Jean Renoir, 1894-1979) 인상주의 화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 프로방스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 1920년대에 감독. 위대한 환상(1937년), 게임의 규칙(1939년).
1898 아이젠슈타인(Sergueï Mikhaïlovitch Eisenstein, 1898-1948) 소련 영화감독, La Grève 1924, Le Cuirassé « Potemkine » 1925, Octobre : Dix jours qui secouèrent le monde 1927
1901 브레송(Robert Bresson, 1901-1999) 프랑스 영화인, 13편의 장편 영화 출품. Procès de Jeanne d'Arc, 1962 Au hasard Balthazar, 1966.
1902 막스 오퓔스 (Max Ophuls, Ophüls, Maximillian Oppenheimer, 1902-1957) 유대계 독일 출신 프랑스-미국 영화인. Lettre d'une inconnue: Letter from an Unknown Woman, 1948) Lola Montès, 1955)
1906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1906-1976) 이탈리아 영화 감독 (Mort à Venise 1971)
1914 뒤라스(Marguerite Duras, 필명 Marguerite Donnadieu 1914—1996) 베트남 사이공 부근에서 출생, 프랑스 여성문학자, 극작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L'Amant de la Chine du Nord 1991)
1915 오슨 웰스(Orson Welles, 1915-1985), 미국 연극배우로 출발하여 영화감독으로.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 상하이에서 온 여인(The Lady from Shanghai, 1948).
1920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1993)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카비리아의 밤(Le Notti di Cabiria)(1956, 아카데미상 수상)에서 열심히 사는 현대 하층계급의 영혼구제의 길을 모색하였고, 달콤한 생활(La Dolce vita)(1960, 칸영화제 1등상 수상)에서는 부패한 로마의 풍속을 현대의 장대한 벽화(壁畵)로 묘사하였다. <8과 1/2>(1963)
1922 알랭 레네(Alain Resnais, 1922-2014), 프랑스 영화감독. ‘시간’을 탐구하는 그의 실험은 현대 아방가르드 영화들의 종합판을 연상시켰다. 지난해 마리앙드 바에서(L’Ann dernie Marienbad, 1961), 1997년 작인 누구나 [과거에는] 그 노래를 알았다.(On Conna la Chanson, 1997)의 제목 뜻은 ‘누구나 아는 진부한 얘기’라는 관용어이다.
1922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1922-2008) 프랑스 소설가, 영화인. 시공간 해체와 사도마조히즘이 돋보이는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샤로뜨(Nathalie Sarraute)와 함께 누보로망작가.
1930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1931 보링거(Bernard Woringer, 1931-2014) 프랑스 배우, 그의 목소리를 많은 영화와 텔레비전의 주인공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1932 타르코프스키(Andreï Tarkovski, 1932-1986), 소비에트 영화 감독, Le Miroir (en russe : Зеркало) 1975.
1933 스트로(Jean-Marie Straub, 1933- ) 그리고 윌레(Danièle Huillet, 1936-2006) 프랑스 영화인 커플(Les Straub), 이들은 메츠에서 시네클럽을 할성화했다.
1935 지베르베르크(Hans-Jürgen Syberberg, 1935-) 독일 영화감독 Hitler, un film d'Allemagne (Hitler, ein Film aus Deutschland) 1977 Parsifal 1983.
1939 자누시(Krzysztof Pius Zanussi, 1939-) 폴란드 감독, 시나리오 작가. Le Camouflage (Barwy ochronne) 1977
*
출전과 문헌정보: Hors-cadre, n° 4, 1986. / [부정기 간행물을 의미하지 않을까?] - [사전적으로, hors cadre 본근무 외의, 비상근(非常勤)의,] / 동명의 다른 잡지도 있다(Revue Hors-cadre, 년2회 발간 L'atelier du poisson soluble)
Hors-cadre[s], n° 4, 1986. - 출판사가 오르카드르(Hors-cadre)이고 책 제목은 길지만 (Revue Hors Cadre N°4: L’image, L’imaginaire, le cinéma à travers champs displinaires, 1986, 218p.)이다. 이 편저자들은 Michèle Lagny, Gilles Deleuze, collectif[총16명]로 되어 있다. 이 판본의 목차에는 Gilles Deleuze, Sur le régime cristallin 39-[46; 8쪽]. 인터넷 자료의 목차에는 7. Doute sur l’imaginaire로 되어 있다. [나의 판본에는 Doutes 복수로 되어 있다.]
Pourparlers 1972-1990, 1990, 목차(Table des matières) ‑‑‑‑‑
I. De L’Anti-Œdipe à Mille plateaux: 1. Lettre à un critique sévère – 2. Entretien sur L’Anti-Œdipe (avec Félix Guattari) – 3. Entretien sur Mille plateaux
II. Cinéma: 4. Trois questions sur Six fois deux (Godard) – 5. Sur L’Image-mouvement – 7. Doutesur l’imaginaire – 8. Lettre à Serge Daney : Optimisme, pessimisme et voyage [나의 판본에는 Doutes 복수로 되어 있다.]
III. Michel Foucault: 9. Fendre les choses, fendre les mots – 10. La vie comme œuvre d’art. 11. Un portrait de Foucault
IV. Philosophie: 12. Les intercesseurs – 13. Sur la philosophie. 14. Sur Leibniz – 15. Lettre à Réda Bensmaïa, sur Spinoza
V. Politique: 16. Contrôle et devenir – 17. 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0:27, 54RMF)
***
-aire, suff. 접미사 (형용사·명사 어미)
1.「…(의 성질)을 갖고 있는, …을 지향하는, …에 속하는, …에서 유래하는」의 뜻 (예: exemplaire, autoritaire, bancaire) / l’imagenaire
2. (수사에 붙어서)「…세(대)의, …년째의, …번째의」의 뜻(예:centen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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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1.
1. 정지된 화면
▪cadre(frame) : 카메라와 영사기에 의해 정해지는 이미지의 틀.
▪cadrage : 카메라로 찍는 공간을 정하기. 영화의 mise-en-scène은 이것으로 실행됨. 프랑스 감독들은 편집(montage)보다는 이것에 의해 영화를 표현. 프랑스 미술 전통. 반대로 에이젠슈쩨인을 비롯한 소련 감독들은 편집에 집착함.
2. 움직이는 화면
▪plan(shot): 촬영상의 최소 단위 길이 및 크기와 각도 grand angle au téléobjectif, plongée, contre-plongée, eye level angle, birds’ eye view, 개의 눈높이(오스 야스지로). 숏과 숏을 이어가는 기술이 몽타쥬.
▪cadre : 프레임(하나의 화면), 구도, 틀. <동사: cadrer>
▪plan avant : 前景
▪plan derrière : 背景
▪gros plan : 클로즈업, 클로즈 샷(초상화)
▪plan lointain = plan général = plan d’ensemble : 롱샷. 全景이 나오는 배우의 전신. 혹은 풍경.
▪plan américain : medium shot: 바스트 사이즈 샷, 미디엄 샷.
▪plan moyen(en pied) : (허리, 무릎)반신 혹은 7부 신.
▪plan rapproché : 나가래노 컷. 커트의 흐름에 따라 plan poitrine, plan taille, gros plan이 됨.
▪très gros plan : 초클로즈업
▪plan de raccord : insert [삽입화면, 자막]
▪premiers plans : 전경(前景)
▪plan-séquence : one cut-one scene, 시퀀스샷, 복잡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필요한 경우 싱글 테이크로 잡은 화면. 복잡한 장면을 하나의 샷으로 길게 잡음.
▪plongée : high angle shot
▪contre-plongée : low angle shot
▪découpage : cut
▪faux raccord 거짓 접속 / raccord 장면 연결[조정],연결성 장면
# 참조 2:
허진{제이랩(jlab) 대표}, 시각기호의 의미작용에 대한 이해와 해석범주에 대한 고찰, 2012
퍼스의 기호학에서 의미는 대상, 기호, 해석항의 세 요소로 되어 있다.
3.1 표상체(表象體 / representamen)[6] 표상체는 기호의 발생에서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부분이며, 기호 그 자체로서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는, 다른 것과의 대립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순수한 존재이며 실제적인 개념이다. 표상체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그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소쉬르의 기표(signifiant)에 해당한다.
3.2 대상(對象 / object) 표상체가 나타내는 대상은 그 무엇으로 사물 그 자체와 그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공존관계를 통해 발생한다[7]. 또한 대상은 외부에서나 또는 내적으로 기호 사용자의 의식에 주어지는 것으로 이에 대한 지식은 기호에 대한 인식의 전제 조건에 해당된다. 대상과의 관계에서 볼 때 기호에 대한 인식은 대상에 대한 인식에 덧붙여 부가되는 정보를 내포하며, 그런 의미에서 퍼스는 기호를 “그것을 앎으로서 우리가 그 이상을 알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8].
3.3 해석체(解釋體 / interpretant) 해석체는 표상체와 대상에 의해 떠오르는 관념과 사상이며 정신적 재현이다. 이런 점에서 해석체는 소쉬르의 기의(signifi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9].
5.1 표상체의 기호분류
❶ 성질기호(Qualisign) 성질기호는 기호의 성질 또는 속성을 의미한다. 고무는 늘어나며 불은 뜨겁다 등이 성질기호에 속한다.
❷ 개별기호(Sinsign)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거나 사건을 말한다.
❸ 법칙기호(Legisign) 법칙기호는 기호로 된 법칙을 말한다. 예를 들어 교통신호의 빨간 불은 멈춤이고 파란불은 진행을 뜻한다. 이 세 종류의 기호들은 서로 보완적이고 겹치는 부분
들이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성질기호는 실제로 기호가 되기 위해서 개별기호를 통한 현실화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모든 법칙기호는 개별기호를 통한 구체적인 실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개별기호에서 성질기호나 법칙기호의 측면이 부가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13].
5.2 대상체의 기호분류
❶ 도상(圖像 / icon)
도상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의 유사성 또는 대상이 소유한 성질들을 공유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을 환기시킬 수 있는 기호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사실주의적 재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퍼스는 하위도상(hypoicon)으로 회화 사진 등의 이미지, 다이어그램, 은유를 들고 있다. 이 중 다이어그램은 이미지 즉 사실주의적 그림이 지닌 닮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실제 대상이 나타내려는 성질을 재현하려 하는 의도로 사용하였기에 도상이 될 수 있다.
❷ 지표(指標 / index)
지표는 고유의 대상과 사실적이고 인과적인 관계로 연결됨으로써 그 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기호이다. 지표에 대한 퍼스의 해석은 도상과 정반대의 속성을 갖는다. 도상이 대상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지표는 반드시 그 존재를 근거로 작용한다. 지표는 무엇인가를 가리키지만 반드시 해석하는 정신을 필요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표는 어떤 단일한 존재자를 직접 가리키기 때문에 주로 지시어로 사용된다. 지시어는 우리 눈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지 인식할 수 있게끔 한다. 예를 들어 ‘저집 굴뚝에 연기가 난다.’고 말했을 때, 지시 형용사 ‘저(that)’가 지표이다. 예를 들면 풍향계는 바람의 방향을 알리는 지표이고, 문을 노크하는 소리는 누군가 와 있다는 지표이며, 연기는 불의 지표로 인식될 수 있다.
❸ 상징(象徵 / symbol)
퍼스에게 상징적 기호는 “그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되도록 작용하는 일반적인 관념들의 연상들에 의해 외시하는(denote)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이다. 상징은 해석체가 없으면 기호를 만드는 성격을 상실한다.”[14] 상징은 위의 두 기호들보다 해석행위에 강하게 의존한다. 즉, 대상과의 도상이나 지표적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에 근거해서 의미를 산출하기 때문에 상징의 해석은 규칙이나 습관적 연결에 의해 이루어진다. 해석자는 상징이 작용하는 문화 안에서 그것이 보통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징의 경우 해석하는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징과 그 대상간의 연결은 존재할 수가 없다.
5.3 해석체의 기호분류[15]
❶ 해석기호
기호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해석체를 표상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예”와 “아니오” 이외의 거의 모든 낱말처럼 참과 거짓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예를 들어 “자동차”와 같은 고립된 항이나 “~은 보라색이다”와 같은 주어가 없는 술어들이다. 이것들은 의미론적으로 결정적이지 않고 해석의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❷ 발화기호
발화기호는 실제 존재하는 것에 관한 기호이다. 발화기호는 필수적으로 지시(indicating)를 통해서 해석되며 사실로 묘사할 수 있는 해석기호의 한 부분을 포함한다.
❸ 논항기호
기호가 하나의 추론으로서 해석체를 표상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귀납법, 연역법, 삼단논법 등이 이에 속한다.
퍼스의 기호분류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3. 퍼스의 기호분류
범주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
표상체 성질기호 개별기호 법칙기호
(Qualisign) (Sinsign) (Legsign)
성질 또는 속성 사실과 유사한기호 정형화된 일반 법칙
대상체 도상 (Icon) 지표(Index) 상징 (Symbol)
기호가 어떤 기호가 인과성을 기호가 오직
닮음을 통해 통해 대상체와 관습에 의해서만
해당 대상체와 관계 맺는 경우 대상체와 관계
관계를 맺는 경우 맺는 경우
해석체 해석기호(Rhema) 발화기호(Dicisign) 논항기호(Argement)
기호가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사실로서 추론으로서
해석체를 해석체를 해석체를 표상하는
표상하는 경우 표상하는 경우 경우
첫댓글 옛날 중국에서는 대서 입기일(入氣日)로부터 입추까지의 기간을 5일씩 끊어서 삼후(三候)로 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면 대서는 6월 중기로 초후(初候)에는 부초위형(腐草爲螢: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 나오고), 차후(次候)에는 토윤욕서(土潤溽暑: 흙에 습기가 많으며 무덥고), 말후(末候)에는 대우시행(大雨時行: 큰비가 때때로 온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