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여행에 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두들 편안한 마음이 되어 호텔로 돌아오는데 그만 가장행렬을 만났다. TV에서 보던 그대로 온갖 의상과 악기를 동원한 남녀노소의 행렬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길가에는 모든 시민들이 나와 거리를 빽빽이 메우고서 몸을 흔들면서 신나게 구경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흥겨운 카니발 한마당이었다. 우리는 오 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한 시간 남짓 인파를 헤치고 겨우 호텔로 돌아왔다. 밤 열두 시에는 중앙광장에서 축제가 열린단다. 일행 중 몇 사람은 피곤하다고 일찍 방으로 들어갔으나 원래 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페인 말도 못하고 길도 잘모르는데 혼자 가기는 그렇고, 그래서 미스 최에게 같이 구경가자고 호텔 로비로 내려오라고 전화를 했다.
잠시 후 화장을 고친 미스 최가 로비로 내려와서 막 문을 나서는데 제주대의 정 교수가 들어오면서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광장에 구경 간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같이 가자고 눈치도 없이 따라온다. 아니면 눈치가 나무 빨라 따라왔는지도 모른다. 아, 정말이지 정 교수는 못 말려. 왜 꼭 이런 때에 나타나는 거야? 우리는 사람들에 묻혀 광장으로 밀려갔다.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악대가 신나는 노래를 연주하고, 폭죽은 터지고, 사회자는 무어라고 열심히 떠들어대는데 스페인어를 모르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이 안 통하니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한 삼십 분 구경을 하다가 새벽 한 시쯤 돌아왔다.
다음날(2월 16일, 일) 여섯 시쯤 잠이 깬 나는 조깅을 하려고 나갔다. 거리에는 어젯밤 축제를 마치고 그제사 귀가하는 젊은 남녀가 많이 눈에 띄었다. 백사장에 나가보니 여기저기에서 아직도 꼭 껴안고 가벼운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있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스페인의 젊은이가 한편으로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우라나라에서도 요즘 신세대는 애정 표현이 쉰세대에 비해 많이 자유스러워졌다. 본능대로 표현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남들 앞에서는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좋은지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 주제이다. 어쨌든 꼭 껴안은 그들 앞을 달려가려니 내가 오히려 쑥스러워서 조금 뛰다가 그만 호텔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침식사 후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였다. 닷새 동안 우리와 동행했던 미스 최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그간 정이 들었는지, 정말로 오랜만에 서운한 감정에 젖게 되었다. 미스 최는 마드리드 대학에서 특수분장을 공부하고 있는데, 졸업 후에는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겠다는 계획을 가진 재기있고 예쁜 한국 아가씨였다. 나는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런던에서 산 볼펜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우승을 했던 바르셀로나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피렌체 공항에 어둑해진 후에 도착하였다. 피렌체는 우리에게는 플로렌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서양역사를 보면 중세에서 현대로 탈바꿈하는 르네상스 운동의 본거지이다. 유명한 미켈란젤로, 단테 등의 고향이며 고적과 미술품이 많은 문화관광도시라고 한다. 공항에는 새로운 남자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황 가이드라고 소개하고 닷새 동안 우리와 동행을 하였는데 이탈리아에 미술 공부하러 왔다가 이탈리아 여자와 결혼하고 정착하여 로마에서 15년 동안 살고 있다고 한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