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29
광한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건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야기다.
이곳에는 광한루만 덩그라니 있는것이 아니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광한루원이라고 부른다.
광한루원은 선조 때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이 요천(蓼川)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광한루 전면 동서 양편에 평호(平湖)를 만들어 은하수를 상징하게 하였으며, 못 안에는 삼신도(三神島)를 만들어 한 섬에는 대나무를, 또 한 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나머지 한 섬에는 연정(蓮亭)을 지었다. 또 가운데에는 하화(荷花:蓮)를 심고 못을 가로지르는 오작교(烏鵲橋)를 놓았다.
이 정원은 1444년(세종 26) 전라도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당시 광통소루(廣通小樓)라는 누(樓)에 올라, 원(苑)을 상찬(賞讚)하면서 주위 경치가 월궁(月宮)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흡사하다 하여 광한루로 고쳐 불렀다는 것으로 미루어 황희(黃喜)가 광통소루를 지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광한루원은 입구마저 문화유산이다.
청허부는 광한루원의 정문이다
광한루원이 천체우주를 지상에 건설한 작은 우주로서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 옥경인 광한청허부를 상징하므로 옥경을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로 청허부라 했다.
현 정문은 1970년도 당시에는 남원시장(해방 전까지는 전북에서 제일 규모가 큰 시장이였다)과 전국적으로 규모가 큰 우시장이 있었고 주변에 민가가 들어 차 역사적 가치와 춘향이의 얼이 깃든 광한루원 주변을 정화하고자 민가와 시장을 철거하고(당시 시장에 큰 화재가 일어나 폐허가 됨) 그 자리에 청허부를 세우고 정문으로 사용하던 현재의 북문대신 이 문을 정문으로 대체하였다.
드넓은 공원에서 들어서자마자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완월정.
완월정
전설에 의하면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며 이 완월정은 인간이 달나라를 즐기기 위한 것으로 (달을 맞이하여 달과 친해진다는 의미)달이 뜨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전통양식의 누각으로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완월정은 1969년 기존 호수를 확장하여 인공 방장형 호수를 축조한 후 수중누각으로 신축한 것인데 2층 누각이다. 누각의 이름은 옛날 남원성 남문의 문루(門樓)인 완월루(翫月樓)에서 따온 것이다. 동학농민동기(1894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원성의 남문인 완월루가 지금의 제일은행 네거리에 있었다.
남원성의 사대문은 향일루(동문), 망미루(서문), 공진루(북문), 완월루(남문)인데 그 중 남문의 누각인 완월루의 완월을 따서 완월정이라 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호두각형 건물인데 의정부 육조중 형조의 건물이 이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완월정을 뒤로 하고 공원을 둘러본다.
붉은 꽃무릇이 정원 한켠에 무리지어 있다
영주각은 광한루와 더불어 누원내 신선사상 배경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축조된 상징적 누각으로서 <용성지>의 누정편에 보면, “전라관찰사 정철이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누앞을 좁다랗게 흐르고 있던 개울을 넓혀서 평호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으며 주위를 석축으로 하고 호중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녹죽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을 심었으며, 다른 하나에는 연정을 세우고 호중에 여러 종류의 꽃을 가득 심었다”고 되어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시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때는 한주섬(漢州)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에 부사 이만길이 재건하고 영주각이란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증보 남원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63년부터 경내가 확장, 정화되면서 1965년에 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되었다.
영주각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편액과 영주각에서 바라본 광한루의 풍경을 노래한 4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광한루가 보이기 시작한다.
광한루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보물 제 281호)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처녀가 아닌 사람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광한루와 오작교는 전설과 사랑이 어우러져 있어, 춘향이가 단오날 그네를 뛰는 것을 광한루에 올라앉아 이도령이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광한루를 가까이에서 찍어본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온다.
원문은 http://blog.naver.com/dogdog1974/60117814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