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열전 ⑤
제임스 게일 번역선교사 자주독립을 위한 통로
성경, 사도행전, 천로역정에서 한국문학 춘향전 구운몽까지 번역
제임스 S.게일 / James Scrth Gale (한글명 : 긔일)
앞서 소개했던 선교사 순직의 첫 열매 데이비스를 비롯한 한센병 환자들의 친구였던 맥켄지 가문, 첫 여성 선교사 멘지스와 그의 일행에 이어 경남지역 순회 선교사 앤드류 아담스 등 부산 경남지역을 향한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헌신과 사랑은 대단했다. 이밖에도 호주 선교부의 수많은 선교지원자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대양주를 건너와 복음을 전하고 섬김을 다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섭리가 호주장로교 선교부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부산경남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복음의 젖줄은 영국 성공회와 캐나다 장로교, 미국 남북 장로교 등등 전 세계 교회 선교의 타겟이 조선 땅을 향한 것. 부산은 미국 의료선교사 알렌이 머물다 제물포를 통해 서울로 상경 공식적으로 이 땅에 거주하는 첫 선교사가 되었다. 부산에 온 첫 북장로교 선교사는 윌리엄 베어드였다. 1890년 6월 선교사로 임명된 그가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891년 1월 29일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이처럼 부산은 당시 조선으로 향하는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지나는 복음의 관문이었다.
부산지방 선교의 개척자 게일
부산에 온 첫 거주 선교사는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이다. 그는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주 알마라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1884년 토론토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1888년 6월에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 이미 선교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던 게일은 1887년 학생선교운동의 선구자인 프린스턴신학교의 윌더와 포만이 토론토를 방문한 이후 한국 선교사역을 구체적으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토론토 대학 YMCA의 후원으로 처음 1888년 12월 15일 부산에 도착한 게일은 몇 번의 안식년과 해외 일정을 제외하고 자기 인생의 절반이 넘는 40년의 세월을 한국에서 보내면서 한국개신교 형성기에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먼저 부산에 도착하여 28시간을 지내고 서울에 올라 간 그는 지금의 구로구 오류동인 오릿골의 한옥에서 첫 밤을 지냈는데, 온돌방은 뜨겁고 고통스러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언더우드 집에 기거하면서 우선 어학공부를 시작하였고, 3개월이 지난 1889년 3월 17일에는 내지 답사를 겸한 순회전도를 시작했다. 즉 황해도 해주를 경유하여 장연군 소래로 갔는데, 이곳에서 게일은 평생의 동료이자 동역자인 이창직을 만나게 된다.
소래교회 교인이었던 이창직은 유능한 청년이었고 후일 게일의 어학 선생이 된다. 그는 게일의 선교사역, 특히 성경번역을 도왔던 조력자였다. 1889년 6월 이창직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게일은 약 2개월 간 언더우드를 도와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그리고 8월에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이때부터 1년 간 부산에 정착하게 된다. 그가 부산에 거주했던 첫 거주선교사였다는 점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마지막 밤도 함께 보냈다. 1890년 데이비스 선교사는 480km의 거리를 20일 간 여행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무리한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이 겹쳐 허약한 그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날 억수같이 봄비가 쏟아졌다.
당시 부산에 있던 유일한 서구인 캐나다 선교사 게일은 데이비스가 위급하다는 전간을 받고 급히 달려가 자기 집으로 옮겼다. 데이비스는 곧 회복될 것이라고 도리어 게일을 위로하였으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게일과 데이비스 이 둘은 함께 기도했다.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라고…. 이후 일본인 의사가 와서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불안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한 시경 데이비스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기이하고 놀라운 사람 게일
게일은 한국개신교의 형성과 동서양의 가교 역할에서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한국명 기일은 ‘낯선 자’ 혹은 ‘기이하거나 놀라운 사람’으로 불린다. 선교사면서도 언어학자였고, 저술가이자 번역가였고, 역사가이자 민속학자였고, 또 성경번역가이자 목회자였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 민속과 언어, 문화와 문학을 연구하고 사랑했던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였다. 각종 언어에 해박했던 그는 서양종교와 문화를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양세계에 알리는 가교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자신의 한국어 이름도 자신이 작명했을 정도였는데, 그의 삶의 여정과 그가 남긴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기독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한국어로 번역한 첫 책은 1895년에 출판된 ‘천로역정’인데, 이 책이 한국 근대문학에서 첫 산문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1717년도 영국에서 출간된 ‘로빈슨 크로스’를 역간했다. 한국어 저술로는 ‘한양지’(1898), ‘금강산지’(1898), ‘성경요리문답’(1929) 등이 있다.
이밖에 한국 문학을 외국에 소개한 것은 ‘구운몽’, ‘춘향전’ 등이 있고, 그리고 ‘신학지남’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러한 그의 한국학 연구가 시작된 곳이 바로 부산이었고, 지금의 영주동의 영선고개 근처가 그의 연구의 모실이었다.
사도행전 번역, 가장 훌륭한 최초의 번역
게일 선교사의 성경번역은 1892년에 간행된 ‘사도행전’이었는데, 동료 마펫은 이 번역을 “근대 번역 중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게일은 한국 내 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된 성서번역위원회, 지금의 성서공회에서 본격적인 번역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언어와 품성에 더 적합한 성경 번역을 주장하였고, 특히 언더우드와는 ‘God’의 번역을 천주(天主)로 할 것인가 하나님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이 정리될 때까지 대립하기도 했다.
언더우드와 더불어 한글-영어 자전을 편찬했던 게일은 한국인과 한국어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강하게 믿었다. 이후의 성경번역 과정에서 게일은 축자적 번역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며 영국성서공회와도 대립했고, 1923년 성서번역위원회 의장직을 사임했다.
“내 언제까지 내 마음에 한국을”
원산에 정착하여 선교활동과 성서번역 및 사전편찬을 비롯한 문서선교에 집중했다. 그의 곁에는 가족과 함께 그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이창직이 함께 했다. 1898년 캐나다장로교가 원산에 선교지부를 개설하자 미국장로교 선교부에 소속되어 있던 게일은 1899년 9월 9일 서울 연못골, 연동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900년 5월 서울 중심부 연못골 교회, 즉 연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1927년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봉사했다. 지금의 연동이 기독교서회, 기독교회관, 100주년기념관, 여전도회관 등 기독타운을 이룬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연동교회 섬기며 사회의 제반분야에 관여해 활동했으며, 벙커 선교사와 함께 이상재, 이승만 등 당시 개화파 지식인이 수감되어 있던 한성감옥에 근대서적, 성경,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고 교육하여 지식인들의 개종을 이끌었다. 이는 기독교가 지식인 계층으로 확대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기독교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통로 역할을 감당하도록 했다.
1927년 미국 선교부와의 계약 기간을 1년 앞두고 연동교회를 사임하며 게일은 “내 언제까지 내 마음에 한국을…”이라는 말을 남기고 한국에서의 기나긴 사역을 정리했다.
※ 선교사 열전 이야기를 연재하며 전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의 ‘부산지방에서의 초기 기독교’(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과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하였다.
이밖에 맨켄지선교회, 호주선교사묘원 경남선교120주년 기념관 등의 사료를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