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이 주목한 시집|임재정
신작시
신파 연속극 외 1편
캐고 묻습니다 진주와 전주를
선후가 바뀐들 뱃속에서 사몰한 쌍둥이의 영혼과 한 몸을 쓰는 사람처럼
대체로 어둡고 간혹 끓어오르는 아궁이처럼
캐묻습니다 전주는 히피스럽나요 숄을 두르고
늘 길을 떠돌고 가는데다 몹시 긴 손가락을 가졌나요
당신과 나를 캐고 묻는 소문 속의 일처럼
그래서 오늘, 귀금속 상가를 기웃대며 키 큰 전주는
쇼 윈도우의 새침한 진주를 바라봅니다
전주는 힘이 셉니다 미간을 오므려 전등을 결 수 있고요 불빛을 뻗어 진주를 환히 밝혀줄 수도 있죠
나의 뇌 주름 사이는 온통 길뿐일 것이 분명합니다
가리키는 어디든 가닿을 수 있죠
캐묻던 진주와 전주를 여자애와 앳된 사내로 바꿔볼까요
앳된 사내가 전화기에 매달려 몸이 달았군요
간절한 나머지 전회기 속으로 삼켜질 때도
만약 그럴 때 골목은 칠흑, 캐거나 물을 수 없습니다
열두 칸으로 나뉜 액정 하나의 표정이 골목을 감당할 테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저 화분처럼 생긴 가로등 불빛 좀 봐요 천진한 질그릇의 질감으로
여자애를 가만히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손가락을 감으며 앳된 사내는
여자애 끝없는 둥글기를 공전하는 털실뭉치가 됩니다
내일 이 시간에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진주는 전주에서 멀지만
전주에서 진주는 지척이라는 사실
짝사랑이고 밤은 기니까 앳된 사낼 전화기 밖으로 튕겨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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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1월을 알아요
추억과는 다른, 말라깽이의 오후라고 해 두죠
한낮의 길게 걸어든 복도 안쪽에서
입구를 돌아보는 것, 오래 멈춰 있는 것
물소리, 도마질소리 식기 부딪는 소리, 쉴 새 없이 양말을 탐하던 진공청소기, 들볶던 사람이 떠난 거실의 냉랭한 고요 같은 거죠
두 개의 교각이 선 교차로가 있다고 칩시다
우린 각자의 기분을 데리고 교각을 돌아 숲길을 갔던 사실이 있습니다
소풍과 산책이 어떻게 다른지, 휴지와 메모지는 어떻게 나뉘는지
우리의 입김이 11월을 이해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아요
그제 내린 비나 어제 흐르던 구름처럼 우린 서로로부터 낱낱하죠
결속이 풀린 빈 목줄만 끌고
수은 구름이 드리운 하늘 밑을 시차를 두고 돌아옵니다
귀엣말이 가꾸지 않아도 무럭무럭 자라 거울을 깨뜨리듯
무거움은 킬로그램과 센티미터 사이 어디에 놓아도 나를 짓누를 텐데요
또 무엇을 빌까요?
창으로 가득한 열차, 왼편 의자에는 부유하는 먼지를 품은 햇볕이 앉고
그 옆에 당신이 앉아 큰소리로 떠나가는 일?
하늘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군요
여름내 중국단풍이 훔쳐보던 시베리아 시끄러운 기분들이 편대를 지어 이주합니다
굽을 등으로 외출을 나서는
14층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마음이 우선하겠지만
안녕한가요?
남아있는 이가 끝내 가장 많이 울어야 하는 곳입니다 여기는
미안합니다
첫눈은 아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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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이 주목한 시집|임재정
*시작노트
시는 내게 쌍떡잎식물처럼 발아하는 경향
시가 굶주림의 형식이란 것을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커다란 입을 벌리고 틈만 나면 몇 끼니분의 강박을 요구하니까요. 덕분이겠지만 잡념을 배 터지도록 취식합니다. 먹고 나서야 그것이 시에 관한 일념인지 생의 핍진한 이력이 만들어낸 사단인지를 깨닫게 되니까요. 시시때때로 의식이 눈뜰 때마다 벌어지는 일이죠. 내게서나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묻기 부끄러운 일이라서 혼자 삭히고 종내에는 삼켜버립니다. 다들 그러신지요?
고백컨대 시는 내게 쌍떡잎식물처럼 발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면의 이야기를 다루면, 후면을 다루고픈 욕구가 샘솟음치곤 하죠. 이상한 일은 그렇다고 해서 두 면을 나란히 놓아두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죠. 넓게 보면 시집의 서사를 감당하겠으나 좁혀놓고 보면 부언하는 이처럼 보일 여지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세상과의 대면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심을 비우고 점진적이며 의뭉스럽죠. 위의 두 시들도 해당 될 겁니다. 우선 당장 앞면, 뒷면은 아니라고 넌지시 귀띔합니다만 언젠간 안녕하지 못하느냐 묻거나 MZ세대의 새로운 드라마를 시도 하겠죠.
가벼워지려고 합니다. 시큰둥하게 던져두고 싹이 트기를 바랄 겁니다. 이제껏 송충이였고 솔잎을 먹었으니까, 앞으로도 쭉!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식으로. 제가 꿈꾸는 시의 경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