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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스라엘의 역사
목차
0. 들어가기 전에
1. 이스라엘의 개념
1-1 개념의 기원
1-2 구약의 견해
1-3 특별한
백성
2. 이스라엘 역사 연대기
3. 이스라엘의 형성
3-1 역사적 기원
3-2 가나안 정착에 관한 제이론
A 평화적 정착설
B 군사적 정복설
C 사회적 혁명설
0.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역사는 성서를 이해하고 또한 받아들이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성서가 단순히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歷史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알아 가는 과정이 더욱 즐거워졌다. 우선 이스라엘의 개념을 확실히 정리하고
이스라엘의 형성과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는 방식으로 글을 진행시켜 나가겠다. 이번 숙제가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를 정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더 많은 깊이와 풍부함을 가져달 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1. 이스라엘의 개념
이스라엘.. Israel
<이스라엘>이란 말은 야곱에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이며 이 성서상의
조상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 모두도 지칭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에서 핵심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경세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1-1 개념의 기원
야훼가 처음에는 몇몇 씨족들의 부족신 이었으나 그 뒤에 민족신이 되었고 다시 단일신 사상(야훼를 가나안 땅의
신으로 모시듯 한 지방에서 하나의 신을 섬기는 관념)의 시기를 지나 야훼가 모든 백성의 신이요, 전세계의 신이며 사실상 오직 하나뿐인 신이라는
관념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표들이 있다.
1-2 구약의 견해
1) 역사적-이스라엘의 근원과 시간의 흐름
홍수가 있은 뒤 노아의 세 아들은 세상에 다시 인간을 퍼뜨린다. 맏아들 셈은 세족장 가운데 첫째인 아브라함을 낳았으며, 셈의 후손들은
나중에 갈대 아라고 불리게 되는 동부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하란에 잠시 머물다가 하나님이 그의 후손을 위해 준비해둔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 그는 여러 자식을 거느리게 되는 데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았고 하갈이 이스마엘을 그두라가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았다. 조카 롯에게서는 암몬족과 모압족이 유래되었다. 하지만 선택받은 핏줄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삭을 통해
흘러나갔다. 이삭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에서와 야곱(이스라엘)이 그들이며 선택된 피는 후자르 ㄹ타고 흘러나갔다. 야곱은 열두 아들, 12부족의
선조들을 낳았다. 야곱시대와 모세시대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60만명으로 늘어났다. -여자와 아이제외-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었다가 모세를
통해 해방되어 시내-호렙으로 갔으며 거기서 계약을 맺는데, 그에 따라 야훼는 이스라엘의 유일신이 되고, 이스라엘은 야훼가 특별히 선택한 백성이
되었다. 여호수아(눈의 아들)의 지휘 아래 이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사사시대에 그 땅에 정착하였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앞서 이야기된
것을 신빙성 없는 역사로 주장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히브리 부족들은 점진적으로 가나안에 침투해 들어가면서 서로 뭉쳐 하나의 동맹을
이루었고(지파동맹), 이와 같은 동맹에 뒤이어 집단적인 이스라엘이 생겨났다고 그들은 보고 있다.
1-3 특별한 백성
제2이사야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그의 거룩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택함 받은 백성으로 언급된다.
그후의 시대에도 이러한 선민의식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존되었다. 예컨대 한편으로는 이방인들도 개정하게 되면 택함 받은 백성 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상이 나왔다. 반면에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었음이 반영돼 있으며, 포로시대 이후에 회복된 공동체서 '이방인들'이 침투하는 것을 막아내려는 극단적 조치가 취해진 사례들이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배타주의에 대항하여 룻기의 관대한 견해와 요나서의 보편 구원론적 사상이 제시되었다.
오경에서 가나안 사람들은 완전히 없어져야 할 무리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멸절은 여호수아에 의해 불완전하게 수행되었는데 그는 속은 줄도 모르고 가나안의 기브온 사람들을 살려주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특별한 의무를 지게 되었다는 개념을 반영하는 다양하고 풍성한 성구(시편 등)에서
어떤 기자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을 강조하면서 이 특수한 백성을 실질적으로 강조할 뿐 보편 구원론적 개념은 도외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우주적 하나님으로 보는 개념의 부산물로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관심의 일부로서 예언적 정죄가 내리게
되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선민을 갖고 계신다는 견해에는 동조했으나, 각자 서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였다.
2. 이스라엘의 역사의 연대기
2-1. 족장시대
집단을 개인으로 표시하는 것은 히브리인 사고의 특성이다. 그래서 아말렉이나 모압이란 말이 그 백성 전체를 뜻할 때도 동사는 단수를 썼던
것이다.
<누지>와 <마리>에서 발견된 본문들은 족장 이야기의 비슷한 모습들이 BC 2천년대 초반에 메소포타미아에
유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서의 설화들이 그러한 출발점을 가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만일 고대의 관습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현저한
본보기를 본다면 그것은 그 자료가 전통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관습이 이야기들의 내용은 신중하게 이어져
왔다고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역사라기보다는 사화이며 여기서 역사를 회복해 낸다는 것은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측면에서만 가능하고 이
이야기들을 인내와 정확성을 기해서, 그리고 그 당시에 관한 알려진 다른 역사들을 함께 연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바벨론에 와서
북메소포타미아로 갔다가, 거기서 팔레스타인으로 갔다는 사실 그리고 그후 그 후손들 중 일부가 에집트로 갔으며, 마침내는 거기서 부역꾼들이
되었다가 탈출해냈다는 사실이 일반적이다.
창세기 12:4, 21:5, 25:26, 47:9. 출 12:40, 왕상 6:1에 나타난
진술들은 아브람이 우르에서 BC 21세기에 이주했으며, 15세기 중엽에 출애굽이 있었다고 암시한다. 아브람을 세계 역사와 관련시킨 대목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창세기 14장에 들어있다. 여기서는 아브람이 시날의 왕 암라벨과 동시대 인물이다. 그런데 이 왕은 바벨론의 함부라비 라는 주장이
종종 있다.
마리 본문에 의하면 함부라비왕은 훨씬 후대의 인물임이 확실하며, 오늘날에는 그가 18세기 혹은 18세기와 17세기 중간기의
인물이라고 본다. 역사적 재건은 불가피하게 출애굽에서 시작해야 한다.
2-1 모세와 출애굽
20세기 초에는 보수파 학자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학자들이 출애굽을 BC 13세기였다. 그러나 가르스탕에 의해
연대기는 15세기로 보기도 한다. 가나안 측의 보고인 아마르나 서신들이 이집트에서 올라온 이스라엘인들의 침입을 반영해 준다는 것이다. 이 편지는
팔레스타인들의 군주들이 14세기 초반에 이집트 궁정에 보낸 것인데, 표의 문자로 <사가쯔(SA-GAZ> 혹은 하비루라고 불리우는
적들을 대적하여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원조 신청서였다.
13세기로 보는 관점에 대한 비판은 사사시대에 사사란 지방의 영웅들이지 민족
지도자들로서 서로 대를 이어나간 것이 아니란 점이 강조되었다. 출애굽이 13세기였다고 본다면 메르네타의 '이스라엘 돌기둥'은 이들이 막 이집트를
벗어나 왔을 무렵에 이미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했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점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정착된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이점은 그 돌기둥에 나오는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을 감안하면 해결된다. 13세기설로 보았을 때, 설명하기 더욱 어려운 문제는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직후에 라기스와 같은 남방 팔레스타인 도성들이 대대적으로 파괴를 당했다는 결과가 된다는 점이다. 반면에 성서 전승은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남방 진군에서 실패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학자들은 다시금 이스라엘 지파들 전체가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이 아니란 견해로
돌아갔다. 어떤 지파들이 애굽에 있을 동안, 다른 어떤 지파들은 팔레스타인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15세기설로 보든 13세기설로 보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다고 인정될 만한 시기에 몇몇 이스라엘 지파들이 팔레스타인에 존재해 있었다고 말하여 주는 최근의 자료들이 뒷받침해준다.
여기서 결정적인 어려움은 레위지파에 관한 문제이다. 구약에는 레위지파를 남방과 유다에 관련시키는 중거들이 많이 있는가 하면, 모세를
레위인으로 또 이집트에 있던 지파들을 인도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레위'란 말이 단순히 제사장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창 34장과 49:5-7이 반대한다. 이 구절들은 레위를 시므온과 연결시켰고 레위와 시므온에게는 공동 운명을 예견했다. 이 두 지파가
공동 운명을 겪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많은 성서의 자료와 성서 밖의 자료를 잘 종합해보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해 온 것은 아마르나 시대 초, 곧 15세기초가 되며 이 집단이 하비루 지파들의 일부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하비루지파들은
고대 근동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았으며, 단순히 이스라엘(야곱)의 자손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보게 된다.
성서에는 세겜 사건 얼마
후에 요셉이 이집트로 끌려간 이야기를 두었는데, 이것이 믿을 만하다면, 요셉이 권좌에 오르게 되는 것도 아마르나시대의 일이라 하겠다. 이 기간에
이단적인 바로 아켄아톤이 지금까지 애굽의 주요 장관직을 맡아오던 아멘의 테베인 제사장단을 몰아내고, 태양신 숭배를 시작했다. 태양신은 태양-원판
아톤으로 상징되었고 이 나라에서는 다른 신을 숭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같은 바로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자기 나라를 위해 일할 인재를 찾아야
할 것이며, 이것이 요셉 이야기의 적당한 배경이 될 것이다.
기본적 역사성을 요셉 이야기에 허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세의
이야기에도 해당된다. 이 두 이야기 중 어느 것도 그 세부사항까지 역사적 사건들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모세가 인도해낸 사람들의 숫자는 분명히
과장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에 믿을 만한 알맹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출애굽 사건 중 어느 것도 그 당시의 성서 외부의
기록들과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14세기와 13세기에 관한 알려진 역사는 이 이야기에 알맞는 배경을 제공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어느 민족도 아무런 근거가 없이 자기들이 외국의 강제노동자들이 되고 말았다는 기록을 꾸며내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게다가
어느 민족이든 자기들이 실제로 투쟁하여 얻은 것이라면 그 해방 과정에서 자기들이 능동적 참여를 전혀 못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모세의 직업이 지니는 종교적 의의를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그는 민족의 창시자이다. 적어도 그가
이끌어낸 그 사람들에게는 사실이다. 13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어 오던 압제에서 모세는 이 지파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었으며 그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고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자기는 그 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이끌어냈다는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야훼께 그들은
계약을 통해서 위탁되었고, 이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다 안정된 집을 제공하리라는 신념을 갖게 했다.
2-3 여호수아와 사사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연합 지파들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는 가나안 전역을 정복하여 나누어주는 데 성공한
것으로 그려졌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인이요 요셉 지파들과 그들에게 결속한 집단들의 지도자인데 그가 가나안의 중심부에 이스라엘을 위한 본거지를
확보한 공로자임은 분명하다.
그가 아얄론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 승리를 기념한 옛 시가 이 승리를 여호수아와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아마 이 노래의 주제 사건과 동시대의 작품일 것이다. 남방에는 이들과 친족이 되는 지파들이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고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이 때에 자기들의 영향력을 확장하여 점차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아마 어떤 식으로든 여호수아는 이들도 지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다지파까지 결속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보다 후기의 가나안의 한 경계가 유다를 북방지파들과 구별시키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비록 정착과정은 달랐지만 이스라엘 지파들 모두가 한 무리처럼 보였던 것은 근거있는 느낌이다. 이들은 공통된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장기간 서로 다른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이 지파들 사이에는 친족감과 동시에 내부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한 동맹체를 형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동맹체는 종교적 맹세를 통해서 서로 돕기로 약속했으며, 동맹의 신전을 자기들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 때에 이미 어떤 식으로든 열두지파 모두가 가맹한 동맹체제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사사들 시대에는 그 같은 증거를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위기를 맞아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종족의식을 느끼고, 가나안인들과는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였지만, 이
정착 직후 기간에 적지 않은 통혼과 혼합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신전들에서 예배하며, 가나안 종교
관습을 따름으로써 생긴 상당한 종교적 절충과 혼합은 성서 속에 잘 나타나 있고 또 이해할 만하다. 사사들 중 단 한사람만 가나안인과 싸웠다.
이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사사 이야기들 중 가장 중요하다. 하로셋의 시스라가 에스드렐론 골짜기로부터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여 그 골짜기의 남과
북에 있던 이스라엘 지파들을 공격해 온 것이다. 마침내 예언자 드보라가 용장 바락을 재촉하여 계곡 양편의 지파들을 모두 불러 이 적을 대적하여
싸우게 만들었다. 보다 잘 장비된 적군을 물리치게 된 이 큰 승리는 사실상 시스라의 병거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던 폭풍에 기인하며, 이 폭풍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을 보았다. 이 시는 분명히 사건 당대의 것으로 중요한 역사 문헌의 하나이다.
사사기는 정착후 이스라엘의
종교 상태는 물론 사회, 정치상을 연구하는 데 가장 요긴한 자료이다.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는 지속적 결속력이 없었다. 한 번 이상 지파간의
파벌의식이 내전을 몰고 왔다.
2-4 왕정의 발흥
사울의 출세와 왕정 수립은 주로 블레셋인들의 세력이 팔레스타인 중심부까지 확장된 탓이었다. 모세에게서 몰려내려온
상징적 법궤가 보존되어 있던 실로의 제사장이던 엘리시대에 이미 블레셋의 압력은 심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왕정이 발흥된 것은
예언자적 영감에 힘입었다. 예언이란 결코 이스라엘에게만 있던 현상이 아니다. 지금은 시리아는 물론이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아주 옛날부터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시스라를 대항한 동기도 예언자의 활약에 힘입었던 것이며, 그때 이후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종교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치적으로
활약했다고 하는 증거를 많이 보게 된다. 왕정 수립과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은 사무엘이었다. 사무엘을 단순히 사울이 등장하기 이전에 있었던
지방 명사 정도로 그렸다. 또한 성서 속에는 왕정 발흥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복합되어 있다는 점은 잘 아는 바이다. 보다 초기의 설명은,
사울이 처음에는 야훼의 이름으로 사무엘 예언자에게서 사사로이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사울은 이스라엘을 블레셋군에게서 건질 사명을
받았다. 사울은 블레셋을 향하여 대중의 힘과 지원을 동원했다. 그는 이내 암몸인을 물리친 전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터였다. 이리하여
블레셋은 가나안의 중심부에서 쫓겨났고 사울은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블레셋은 여전히 해안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고, 에스드벨론 계곡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속하여 사울과 접전하여 북쪽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이 전쟁에서 사울은 전사한다. 그것은 길보아의 전장에서였다.
블레셋이 다시 한번 요단강 서편에 자리잡은 것이다.
2-5 다윗의 치세
이미 사울이 죽기 전부터 다윗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사울의 지원자였다. 그러나 그의 인기 때문에 사울왕이
질투하여, 마침내 법 밖으로 추방시키고 만다. 이때 다윗은 블레셋으로 망명한다. 거기서 그는 한 블레셋 지도자의 부하가 된다. 사울이 죽자
이스보셋이 자기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요단강 동쪽에 본부를 두었다. 그는 요단강 서쪽에는 별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한편 다윗은 유다지파에게서 자기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마침내 이 지파는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리하여 한번은 다윗과 이스보셋이 서로
전쟁을 치렀다. 블레셋은 이 전쟁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다윗편으로 기울어지려 했었다. 다윗이 갓왕에게 다소 충성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전쟁을 환영했다. 이 내란이 이스라엘의 양 진영을 약화시켜, 다윗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
계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울의 진출 때처럼 다시 한번 실수를 범했다. 이스보셋의 명분은 빈약했다.
이후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인정되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경우보다도 유다지파를 북방지파들과 긴밀하게 결속시켰다. 다윗은 급히 군사를 이끌어 예루살렘을
쳤다. 그때까지도 예루살렘은 여부스인의 마을이었다.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아마 예루살렘의 여부스인들이 이스라엘지파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사울이 블레셋과 싸우는 동안 아무런 방해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보셋과 다윗이 집전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함락했고 현명하게도 그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죽이지 않았다.
다윗이 자기들의 한 부하가 아니라는 것이
블레셋에게 분명했지만 견제하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그의 지위는 이제 사울이 지녔던 어떤 지위보다도 공고해졌다. 그는 점차 인접한 나라들을
하나하나 공격하여 자기의 주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 결과 그는 역대 이스라엘의 어느 왕보다도 더 큰 왕국의 수뇌가 되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
그 자신과 요압의 탁월한 전략에 기인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윗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법궤를 이
성으로 옮겨왔다. 법궤는 에브라임이라는 북방지파와 관련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다윗이 자기 지파 유다에게 그 관리를 일임했다. 그러나 이 사건속에
암암리에 드러난 뜻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국민적 종교가 다윗 왕국의 초석을 놓았으며 야훼 예배가 이 왕국의 단결을 가져오는 구심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다윗은 자기 백성에게 부역을 시켰고, 세금제도를 세웠다. 그런데 이 세금제도는 솔로몬시대에 깊은 원한을 사고 말았다.
2-6. 솔로몬의 치세
솔로몬의 시대는 다윗이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태평성대였다. 따라서 이
나라가 번영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백성들은 전례없이 어려운 고생을 했고 궁정만이 크고 화려해져 갔다.
솔로몬의 축재는 그 방법이 여러 가지이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그들에게서 물품과 노역을 요구했다. 또한 솔로몬은 국제
무역도 추진시켰다. 그의 상선은 홍해를 내려가 인도까지 왕래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외국의 산물을 가나안으로 가져왔으며, 이것은
솔로몬의 금고에 적지 않은 원천이 되었다. 대건축 공사도 이루어졌다. 가장 유명한 건물은 성전이었다. 솔로몬은 법궤를 두기 위해 이 성전을
지었다. 나중에 이 성전은 유일한 성소가 되어 유대인들은 여기서 드리는 제사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믿게 되었다.
솔로몬은 많은 외국과
동맹을 맺었다. 해군을 자랑하는 두로는 물론, 이집트의 바로와도 관계를 맺었다. 이 동맹 관계는 외국 공주들과 결혼함으로써 조인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민족 종교 신봉자들이 달가와 할 수 없는 종교적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제는 종교가 이 나라의 불만을 더 끓게 만들었다.
2-7 분열왕국
2-8 사마리아의 몰락
2-9 유다왕국
2-10 예루살렘의 몰락
2-11 포로기와
회복
2-12 페르시아 시대
2-13 희랍시대
2-14 마카베오시대
2-15 로마시대
3. 이스라엘의 형성
3-1 역사적 기원
가나안에는 그들의 독자적인 신 바알이 있었다. 정복을 거쳐 가나안은 야훼에게
귀속되었고, 야훼는 자기 백성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유대시대 이전의 예언자들의 사상에 의하면 바알은 신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알 숭배는 야훼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계약상의 요구 조건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선택한 이스라엘은 다른
백성들이 지니고 있지 않은 독특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더구나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다른 백성들이 지니고 있지 않은 독특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더구나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적어도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한 하나님의 축복된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된다는 보장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사상은 아무리 보편화되었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며 동시에 이스라엘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비록 하나님께는 이스라엘도 구스 족속, 블레셋 사람들 그리고 아람 사람들과 같다고 단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이어 그는 뜻깊은 말을 덧붙인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예언자들의 사상 속에서는, 이스라엘은 선민이므로 다른 민족은 지고 있지 않는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었다.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곧 특권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아모스의 견해에서 부인되고 있기도 하다. 아모스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믿음을 잃음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침략자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고 북왕국은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침략자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방치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침략자를 조정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벌하는 도구로 삼는다. 또한
이사야는 구원받은, 또는 앞으로 구원받을 남은 자들을 보여줌으로써 전면적인 집단처벌을 예상하던 예전의 견해를 누그러뜨린다.
히브리 사상의
한 단계에서는 하나님과 백성과 그 약속된 땅이 분리될 수 없는 것들로 간주되었다. 바벨론의 침략(BC598년)과 포로(BC 587년)는 그러한
견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가 중시되게 되었다. 비록 이 경우에서도 약속된 땅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변화는 예레미야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제2이사야서에서 그러한 변화는 한층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서 포로는 야훼의 계획의 일부로 간주되며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선언되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편적
구원을 수행하는 과정에 사용하는 하느님의 종이다.
3-2 가나안 정착에 관한 제이론
A. 평화적 정착설
1) 알트의 견해
초기 이스라엘은 겨울 우기와 봄에 사막과 경작지의 경계지역에서 가축과 함께 살고, 여름에 그 지역에 초목이 없을 때
경작지로 들어가서 땅의 소유주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유목민 부족 공동체나 개별 씨족들이었을 것이다. 초목의 계절적인 정기적
변화과정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들어온 씨족들은 사람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는 숲이 있는 언덕지역에 점진적으로 정착했으며 이들 지역은 에집트나 가나안
도시들의 통치가 직접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이들은 정착 후 이처럼 버려진 땅을 경작에 알맞는 땅으로 개간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유목 생활에서 정착생활에로의 평화적인 변화과정은 정착의 실제적인 과정이었으며 지주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즉 그것은 본질상 평화적인
발전이었으며 정착의 첫 번째 단계였다.
두 번째 정착단계에서 이스라엘은 점점 비옥한 평지와 계곡으로 팽창했으며, 그곳에서 가나안 도시들이
오래전부터 밀집해서 정착해 있었다. 이 단계에서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에 개별적인 군사적 충돌이 있었으며, 이 충돌에서 이스라엘은 항상 승리하지
못했지만, 때때로 요새화된 도시들을 탈취하여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몰아내고 경작지를 차지하였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영토팽창"시대였다.
2) 평화적 정착 이전의 팔레스틴의 정치조직-알트의 견해
이스라엘이 들어 가기 전 팔레스틴의 정치 조직은 도시 국가체계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 에집트 12왕조 문서에 의하면 주전 2천년대 초반,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더 오래전인 후기 금속병용기와 초기
청동기시대인 주전 3천년대 초반이다. 도시 국가 체제란 각기 한 왕에 의해 통치되는 요새화된 도시를 중심하여 상당히 많은 작은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는 나라를 말한다.
가장 중요한 문서는 아마르나 문서이다. 이 문서는 고대 에집트 18왕조 마지막 왕들이었던 아메노피스 3세와 4세
때의 외교 공문서였다. 이 공문서가 기록된 시대에는 가나안 지역에 대한 에집트의 영향력이 약화되던 때였다. 아메노피스 4세는 태양신
아톤(Aton)을 열렬하게 신봉한 왕으로 자기의 이름까지 아켄아톤(Akhen-aton, 아톤의 영광)으로 고치고, 에집트의 수도도 종래까지의
테베에서 오늘날의 아마르나인 아케트아톤(Akhet-aton, 아톤의 지평선)이라는 새 수도로 옮겼다.
그는 종교문제에 온 정력을 기울였고
따라서 에집트 지배하의 가나안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어 도시 국가들간의 내분이 있었고 무정부 상태를 나타냈다. 아마르나 시대 이후 람세스
3세때(주전 1150~1350년경)까지의 팔레스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당시 팔레스틴은 에집트의 지배가 약화되면서 아주 다르게
변했다. 요단강 동부와 서부의 영토는 몇 개의 더 큰 국가들로 분리되었고 그것은 부족이나 민족의 이름을 가진 도시국가의 초기 체제와 구분되었다.
알트는 가나안 도시들과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그룹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나타내주는 내용이 구약 전승 자체에 있다고 한다. 여호수아
9장은 이스라엘과 기브온의 도시들간의 체결된 조약을 말해준다. 이것은 아마도 목초지와 물의 사용권에 관련될 것이다. 그 비슷한 예로 창세기
26장을 들 수 있으며 이것은 상호결환과 중립적 군사행동권 그리고 매매에 관한 협정일 것이다. 이 조약의 결과로 기브온의 위치는 왕조시대까지
특별히 취급되었다.
그것은 네게브 중앙에 원래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두 부족이 목초지의 변화 과정에서 세겜지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의 동맹을 맺자는 제안이 가나안에 의해서 제시되지만 성공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시므온과 레위는
가나안을 습격하여 그 도시를 탈취하고 불사르며 주민들을 학살한다.
그 때문에 원주민들의 압력이 심해져서 그들은 남부로 후퇴하고 다시는
중앙 팔레스틴에 나타나지 않는다. 평화적인 관계에 대한 극단적인 결말의 이유를 성서는 디나 이야기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배경이
대단히 모호하다. 므나셋의 경우에는 가나안 도시들이 씨족으로서 동맹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정복전승의 견지에서 보면 이 사건은
놀라운 일이다. 요셉의 집에서 떨여져 나온 므낫세 부족은 그의 형 에브라임의 상승에 힘입어 가나안 도시들과 밀접한 삶의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자기 보존 때문에 이들 도시들과 동맹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노트의 견해
노트는 가나안의 비거주지역의
평화적인 정착과 반유목생활에서 농업생활로의 변화는 평범하게 일어났으며 전승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나안 정복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일어났고 가나안과의 싸움도 계속되었으며 그 싸움은 부족들이 주변 도시국가들로부터 땅을 빼앗아 영토를 넓히려 할 때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간헐적인 전쟁시기를 노트는 정착기로 본다.
노트는 성서를 분석함으로써 얻은 결론은 성서의 외적인 증거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여호수아서에 언급된 가나안 도시들이 주전 13세기 말에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호소하여 성서의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지만 그는 이러한 폐허가 가나안 자체의 도시들간에 벌어진 반복된 싸움의 결과이거나 혹인 "해양민족"의 침략일거라고 믿는다. 노트는
여호수아 2장과 6장의 전승에 대해 완전히 원인론적 해설을 부여했다. 그는 여호수아 6장의 설화는 설화자 당시에 여리고가 폐허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며 이 설화는 바로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2장의 설화에 원인론적 설명을 부여한다. 즉 거기에서 '오늘날까지'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 설화는 창녀 라합의 집에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머물었으며 그녀가 침입자들의 손에 그녀의 도시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도시가 정복되었을 때 라합과의 약속이 지켜지고 라합의 집은 오늘날까지 폐허 중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노트는
원인론적 전승이 기브온 전쟁 전승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더군다나 여호수아 10:29-39과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 지역의
이스라엘 주민들은 왕을 통치자로 여겼을 것이고 그 왕들은 더 초기에 이스라엘이 땅을 정복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며 결국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트는 이스라엘 정착이 유목생활에서 농업생활로의 평화적인 변화였다고 한다. 이러한 노트의 견해는 결과적으로 정복 전승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이에 대해 노트는 이스라엘의 근원이 가나안 밖이었고 소유한 땅을 야웨의 선물이라고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한 언덕지역에서의 정복과
정착의 실제적 사건들은 이스라엘의 농민들의 의식에 깊이 인상지워지지 못했으며 오히려 영토 팽창기의 사건들이 깊이 새겨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성서의 정착전승들이 가나안 도시들에 대항한 이스라엘의 개별 부족 혹은 부족 단위의 싸움으로 가득찼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노트는 초기 이스라엘의 정착에 대한 자료는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추측과 후대의 결론에 의존할 수 있을 분이라고 한다. 또한 그에 의하면 초기
이스라엘의 이주는 최소한 두가지 형태로 구분되는 데 첫째는 소위 레아 부족과 관련되고 둘째는 라헬 부족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노트는
이스라엘 12부족 체제에 대한 전승사적 연구에서 창세기에 의해 레아 부족이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었으며 이 부족은
인공적인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한다.
B 군사적 정복설:고고학적 해석
1) 올브라이트의 견해
가나안에 대한 평화적 정착설은 군사적 정복설을 주장한 미국의
고고학파에 의해 비판 받는다. 고고학파들은 에집트,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틴의 고대 근동 문서를 참고로 한다.
올브라이트에 의하면 후기 청동기 시대 말기에서 초기 철기시대 초기까지의 변화가 문화의 갑작스런 붕괴와 큰 재난을 반영하다고 주장한다.
가나안 도시들인 드빌과 벧엘이 최후로 멸망한 연대는 13세기임에 틀림없으며 벧엘이 드빌보다 훨씬 먼저 멸망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가나안의
라기스가 최후로 멸망당한 것은 주전 1230년경일 것이며 주전 1219년에 수립된 메르넵타 승전비문에서 에집트인들이 정복했던 유목민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 직전이라고 한다. 메르넵타 또는 단명으로 끝난 그의 두 후계자 중의 한 사람이 4년되는 해에 지방세를 바친 기록을 보여주고
있는 에집트 문서를 스타키가 1937년 발견하고 나서부터 그 연대는 라기스가 불타버린 1220년 혹은 그 직후로 가나안 정복을 생각하게 되었다.
올브라이트에 의하면 여호수아 1-12장과 사사기 1장을 볼 때 그리고 13세기 도시 파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고려할 때 팔레스틴
정복은 상당 기간에 걸쳐서 분명히 일어났다고 한다. 올브라이트도 알트처럼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세겜 근처에서 싸웠다는 기사를 정복의 초기단계
전승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정착이 족장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팔레스틴에서의 족장들의 방랑과 행위에 대한 전승들을 15,
14세기 아피루에 대한 보고들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족장들은 이러한 특별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여긴다.
올브라이트에 의하면 중앙
팔레스틴에 있는 가나안 도시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스라엘 씨족제도 안에 병합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반유목민들이 상당히
거주하고 있었고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는 히브리인들도 일부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빌과 벧엘 같은 가나안 도시들이 멸망한 때와
이스라엘이 다시 그곳들을 탈취한 시기 사이는 매우 짧은 기간이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침략이 수세기동안 장막에 살던 유목민들의
독특한 침입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정복에는 헤렘(철저한 파괴로 야웨에게 봉헌된 것은 무엇이든 모두 죽이거나 부수어서
완전히 야웨에게 바치는 것)이 적용되었으며 이것은 당시 문헌들을 볼 때 전쟁 관습이었고 호전적인 전쟁 관습이었고 호전적인 이스라엘이 이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라고 한다. 후대의 전승을 보더라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의 대부분을 멸망시켜 버림으로써 새로운
신앙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를 문화이식의 과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 라이트의 견해
라이트에 의하면 정착에 대한 신명기 사사의 보고는 요단강 서부의 이스라엘 정복이 두 단계로 일어났다고 고려되는
한 고고학의 결과와 일치한다고 한다. 그는 발굴에 의해 밝혀진 팔레스틴 도시들의 파괴와 올브라이트의 견해가 중앙 팔레스틴 남부와 여호수아에 의한
이스라엘 전쟁과 일치한다고 본다.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정착은 도시들을 피하면서 사람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는 언덕지역에 유목민들이 평화롭게 침투한
것이 아니라, 연합된 지도력 아래 12부족 동맹에 의한 계획된 정복이었다고 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여호수아 1-12장의 정착설화는
본질적으로 정확하며 단지 비교적 중요한 요소들에서만 수식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라이트도 성서 밖에서 이스라엘을 처음 언급한 것은 주전
1220년경의 메르넵타 승리비문이라고 한다. 그 비는 에집트의 메르넵타왕 제5년에 시문으로 세워졌다.
"리비아는 황폐되었거,
카티(히타이트)는 평정되었다.
악독한 가나안은 약탈당했고
아스글론은 사로 잡혔으며 게제르는 정복되었다.
야노암은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은 황폐되고 그 씨는 없어졌다
블레셋은 에집트 때문에 과부가 되었다."
라이트는 이 비문에서 주전
1220년경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이미 있었으며 모세그룹의 출애굽이 13세기 초반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C 내분적 혁명설: 사회학적 해설
1) 멘델홀의 견해
세가지 가정을 하고 있는데,
(1) 12부족은 정복 직전이나
그와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팔레스틴에 들어갔다. (2) 이스라엘 부족들은 유목민들이거나 반유목민들이었는데 땅을 정복하는 동안 혹은 정복 후에
팔레스틴에 적응하며 정착했다. (3) 12부족의 결속은 민족적인 것이며 그 혈족 관계는 이스라엘과 가나안을 구별하는 근거였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마리문서의 수투와 같은 영구히 정착하지 않은 족속이 있었으나 이들은 오늘날 베두인처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계절적 가축이동의 과정에서 사막과 경작지의 변경을 오가는 목동들은 유목민들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부족체제를
계보조직에 따라 유목민적 배경의 증거로 고려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족체제는 비도시문화에 넓게 퍼져 있는 특징이다. 그렇다고 청동기시대에 부족이
실제로 무엇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오히려 부족은 상당한 지리적인 영역을 가진 커다란 사회적 복합체였다. 그러므로 부족은 개인이나 촌락의
직접적인 환경이상의 큰 사회적 단위였으며 촌락이 감당하기 어려운 침략을 당하였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족의
주체성은 도시화의 과정에서 붕괴한다. 도시문화의 부와 자부심과 위세는 도시와 촌락간의 분열을 가져왔다.
오늘날처럼 고대 도시 공동체에서도
개인이나 어떤 집단이 그 공동체에 반대하여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그 사회를 떠나는 일들이 있었다.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이러한 포기함은
그들 나름의 인간 계층을 형성한다. 법을 지키고 그 사회에 계속 남아있는 자들은 이 계층을 법외 방치자로 여겼다. 이것은 아피루, 히브리,
하피루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르나 시대의 아피루처럼, 이스라엘이 밖으로부터의 이주 집단이 아니라 팔레스틴 자체의 주민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들은 그 나라의 정부조직에 반대하여 설립되었다고 살았다. 그러므로 통계적으로 이스라엘 12부족체제의 초기에
중요한 팔레스틴의 침략은 없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서로 얽혀 있는 가나안 도시국가들에 대항한 농민들의 혁명이었다.
이러한 혁명의
추진력과 힘은 원래 정치적이 아니라 종교적이었다. 노예생활을 하던 포로들은 에집트에서의 견딜 수 없는 상태로부터 계속해서 도피하였다. 그들을
보호해 주거나 지지해줄 공동체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들은 야웨신과 관계를 맺었다. 이 신과의 관계는 당시의 어떤 이론들과는 달리 그 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듯이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어떤 규범들에 절대적으로 충성함으로써 형성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혁명은 모세그룹과
토착민에 의하여 요단강 동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혼과 옥은 성서전승대로 전쟁에서 격파되었으나 모압과 에돔은 아직 공격을 받지 않았다. 시혼은
이스라엘을 공격했는데 그 이유는 그 나라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종교공동체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특별히 종교적 공동체로서
시작했다. 시간과 역사적 재난의 과정에서 이 종교적 공동체는 동족끼리 결혼하고 외부 부족을 상당히 거부함으로써 생물학적 연속성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 종교는 야웨를 모르는 이웃과 투쟁하고 종교적 열정이 식어지게 되어 종교가 단순히 계층이나 만들고 정치체제나 옹호하고 결국엔
의식적이고 문화적인 전통의 체제가 되어버릴 때까지 기적같이 이어져 갔다.
참고도서.
고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천사무엘
기독교 대백과사전
이스라엘의 역사/정중호/대한기독교서회
초기 이스라엘의 형성과 사회상에 관한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정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