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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총례(羅聰禮) 연보
나총례(羅聰禮, 886년경 통일 신라 헌강왕(憲康王) 12년 생~985년경 고려 성종(成宗) 4년 몰; 향년 100세)
본관 금성(錦城) 금성(錦城) 나(羅) 씨
금성(錦城) 나(羅) 씨 시조
신라 말엽 나주 지방 호족 금성태수•나주성주
고려 시대 명문거족 출신
고려 정종조 벽상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壁上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고려 정종조 삼한일등공신(三韓一等功臣)
고려 정종(定宗)조(재위 945년~949년) 문신
신라 말 금성의 호족으로 금성태수 역임
고려 초 나주의 호족으로 나주성주 역임
고려 초 문과 과거 급제•한림학사•삼한일등공신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 금성부원군 역임
초휘 종례(宗禮)
휘 총례(聰禮)
시호 충문(忠文)
처 나총례의 처(생몰 추정 연대, 890년경 생~980년경 몰 또는 928년경 생~1018년경 몰; 향년 91세)
1대조 시조 삼한일등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나총례(羅聰禮)
2대조 아들 고려 종2품 자의대부 금산군 나은고(羅恩誥, 931년 생~991년 몰 또는 969년 생~1029년 몰; 향년 61세)
3대조 교위직장 대광 나함헌(羅含憲)
4대조 삼중대광 예빈경 대호군 나성좌(羅成佐)
5대조 삼중대광 나성군 나정서(羅廷胥)
6대조 삼중대광 금성부원군 나국영(羅國英), 서경유수 나언
7대조 검교 대호군 나인겸(羅仁謙), 상장군 금성부원군 나수겸(羅守謙)
8대조 예부상서 나효전(羅孝全), 정의대부 나선(羅宣), 장군 나극효(羅克孝)
9대조 나국충(羅鞠忠), 나응화(羅應和), 제주부사•형부상서 나득황(羅得璜), 삼중대광 나문현(羅文玄), 직장 나성(羅成), 나문일(羅紋逸)
10대조 대장군 군부판서 나유(羅裕), 나윤(羅允), 첨의중찬 나종수(羅宗綏), 봉익대부 나철준(羅哲準), 봉순대부 나장명(羅長命), 통의대부 한림원시강학사 나인송(羅仁松)
11대조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출생 연도 미상~1344년 몰), 대장군•밀직사지신사•도승지 나천부(羅天富), 문하시중 안정백 나천서(羅天瑞), 문하시중 상산백 나원서(羅元瑞), 문하시중 적라백 나문서(羅文瑞), 검교정승 나정서(羅正瑞), 경주부윤•판관 나지열(羅旨說), 밀적부호군 나언(羅彦), 도첨의 금성부원군 나순(羅珣)
12대조 봉익대부 판밀직 금성군 나영걸(羅英傑), 나성군 나준걸(羅俊傑), 봉익대부 나열걸(羅烈傑), 나복기, 토의대부 상호군 나포(羅泡), 조산대부 감찰어사 나종(羅淙), 종사랑직장 나득봉(羅得逢)
13대조 명경박사 안렴사 나문규(羅文奎), 승사랑 해평군사 나구규(羅龜奎), 봉순대부 나천규(羅天奎), 나진두, 개성참군 나원(羅元), 나윤(羅綸), 전법사봉직랑 나개(羅凱), 평양부사록 참봉 나덕중(羅德中), 나이(羅頤)
14대조 나순(羅純), 문하시중 나연(羅珚), 병조정랑 나신(羅臣), 한림직학사 나봉(羅奉), 중추부녹사 나신(羅信), 통례 나경(羅經), 밀직부호군 나락(羅絡), 나대연, 봉정대부 사헌부감찰 나문, 나귀생, 감찰어사 나조, 봉성대부 밀직부사 나직, 직장 나서, 현령 나선, 나제도, 나섬, 나증
15대조 선무랑 통례문 봉례 나중호(羅仲浩), 중현대부 충주목사 나광우(羅光佑), 홍문관교리 병조판서 나명우(羅明佑), 정순대부 한성판윤 나중귀(羅仲貴), 중직대부 형조판서 나사고(羅師古), 봉정대부 사헌부감찰 나중징(羅仲徵), 진사 나욱(羅郁), 생원 호장 나희(羅熙), 군수 나중문(羅仲文), 주서 나중산(羅仲山), 봉사 나중립(羅仲立), 나중원(羅仲元), 판전사 지리박사 나흥유(羅興儒), 판관 나계유(羅啓儒), 나채일, 나채무, 나천강, 권지승사랑 통례문 봉례 나천산, 나천통, 선위장군 나온, 나소, 나석강, 나석견, 예문관제학•전리판서•소부판사 나계종(羅繼從), 판전의사 나구동, 호조전서 나인주, 나도, 생원 나언
나총례의 선조
금성 나 씨의 관향은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금성군(錦城郡)개칭되었고, 940년 고려 태조 23년 나주(羅州)로 개칭되었다. 백제 시대에는 전국 5도의 하나인 발라현이라고 불렸다.
금성 나 씨의 선조는 나 씨 3형제로서, 백제 발라 지역에 정착한 나 씨 3인이다. 그들의 7대조 후손이 나장언이며, 나장언의 후손 가운데 서기 600년대 신라 시대 좌정승을 역임한 나지강과 그의 아들 나주사찬 나경이 있다.
금성 나 씨에 대한 이설은 한나라 때 나덕헌, 나덕부, 나덕공 3형제가 마한에 와서 정착했다고도 한다. 신라 좌정승 나지강과 나주사찬 나경 부자(父子) 가운데 나지강이 당나라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통일 신라 시대 정승 각간을 역임한 4대조 나천업(羅千業, 또는 나업(羅業)을 금성 나 씨 원시조로 삼기도 한다.
금성 나 씨에 대한 이설은 가야국 구언왕이 신라로 복속되면서 가야의 성을 달리했고, 신라에서 국성(國姓)으로 라성(羅姓)을 하사했다는 설이 있다. 가야에서 신라로 통합되면서 가야의 성이 끝나고, 일부는 경주 김 씨로 편입되었고(구해왕 김수로계), 안동 권 씨는 오히려 경주 김 씨로부터 시조 권행(權幸)으로 다시 득성(得姓)되기도 했다.
나 씨는 백제 시대 전국 5도의 하나인 발라현(發羅縣)의 토성(土姓)으로 발라의 나 씨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세력은 북방으로 진출해 통일 신라 시대 발해(渤海)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 시대 가야로부터 신라로 통합되면서 신라의 라성이 하사되었고, 경덕왕 때 발라가 금성(錦城)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왕건 때 나 씨 성씨로 나주(羅州, 라주)라고 개칭했으며, 전주와 나주를 합해 전국 5도의 하나인 전라도로 개칭했다.
조선 세종 때 전남 지역을 통합해서 나주 도호부를 설립하고 탐라를 함께 관할하게 했으며, 나주를 본관으로 나주 나 씨 “최초의 나주인” 이조판서 나득강(羅得康, 1378년 생~1444년 몰; 고려 지제고•조선 제 우의정 나중우(羅仲佑)의 아들)이 탄생했다.
“소금장시 비단나가 나총례는 물짠나가!”
―금성 나 씨 가문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시조에 대한 구전으로, 신라 말 고려 초에 가장 값비싼 물품이었던 소금과 비단을 거래하는 소금 장수와 비단 장수로 중국과의 무역에서 거부를 축적했던 해상 세력이자 오랜 역사의 전통적인 나주 지방 토호 세력을 자칭한다. 소금과 비단을 거래하는 해상 무역상이자 바닷사람으로서 고려조 나득황의 아들 나유 대장군이 전함 300척을 건조해 일본 원정에 나섰고, 조선조 나대용 장군은 거북선과 창선 그리고 해추선을 만들어 왜란에 나섰다.
886년경 1세 출생 추정 연도. 통일 신라 헌강왕(憲康王) 12년 백제 발라현 나 씨 3형제의 후예 금성태수 나총례(羅聰禮) 출생(924년경 출생설도 있음.)
896년 11세 통일 신라 진성왕(眞聖王) 10년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문과 기예로 금성태수•나주성주로 성장
901년 17세 통일 신라 효공왕(孝恭王) 5년 후백제 견훤(甄萱)이 금성 지역을 약탈하자, 금성태수 나총례가 후고구려의 궁예의 보호를 요청했었고, 후에 고려 태조 왕건과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903년 18세 효공왕(孝恭王) 7년 나주의 호족 나총례와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해상 세력이었던 송도의 호족 왕건이 궁예의 파견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에 오자, 금성태수 나총례가 환영해서 맞이하고 서로 금성을 나누어 지키며 훗날 고려 창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신라 시대에 이 지역은 금성이라고 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금성에 온 이후로 이 지역은 나주(羅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왕건이 금성군을 점령한 후, 금성의 호족 나총례의 성씨를 따라 지명을 나주로 개명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 왕건이 나주를 확보함으로써 고려는 삼한 통일의 기틀을 세웠다.
906년 21세 효공왕(孝恭王) 10년
916년 31세 통일 신라 신덕왕(神德王) 5년
918년 33세 고려 태조(太祖) 원년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르고 삼한 통일을 완수한 공로로 강공진(姜弓珍), 김한충(金漢忠), 천명(千明) 등과 함께 나총례를 삼한공신으로 책봉. 공신당(功臣堂)의 벽에 삼한공신의 1인으로 나총례의 초상을 그려 넣고 정1품 대광(大匡)을 제수. 그 이후로 후손들이 금성(錦城)을 본관으로 집성촌(현 전남 나주시 문평면) 형성. 공신당의 벽에 그려진 삼한공신들은 나총례 외에도 강여청, 구존유, 권행, 금용식, 김락, 김선궁, 김선평, 김홍술, 김훤술, 문다성, 방계홍, 배현경, 복지겸, 손긍훈, 신숭겸, 염형명, 유금필, 윤신달, 원극유, 이능희, 이도, 이총언, 이희목, 장정필, 최준옹, 최필달, 한란, 허선문, 홍유가 있다(『사미헌집』 제10권―묘갈명, 김세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장군」―나대용 장군 평전―(2) 나대용 장군의 탄생」, 『나주문화관광』 재인용 참조).
926년 41세 태조 9년
931년 태조 14년 나총례의 아들 종2품 자의대부 금산군 나은고(羅恩誥, 931년 생~991년 몰 또는 969년 생~1029년 몰; 향년 61세) 출생
936년 51세 태조(太祖) 19년
943년 58세 고려 혜종(惠宗) 원년 북방 방어에 공로
944년 59세 혜종 2년 왕규의 난 평정에 공로
946년 61세 고려 정종(定宗) 원년
947년 62세 정종 2년 박수경과 내란 평정에 공로
956년 71세 고려 광종(光宗) 7년
966년 81세 광종(光宗) 17년
976년 91세 고려 경종(景宗) 원년
980년경 95세 경종 5년 나총례의 처(생몰 추정 연대, 890년경 생~980년경 몰 또는 928년경 생~1018년경 몰; 향년 91세) 별세
985년경 100세 고려 성종(成宗) 4년 사망 추정 연도. 고향 금성에서 서거. 향년 100세
묘역
실전묘. 전남 진도 정승동(政丞洞)
시조묘. 전남 나주 문평면 대도리
제사일. 음력 5월 첫째 주 토요일
사우 경모사(敬慕祠)에 91위 제향(1980년대 설립) 및 나총례 사적비(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충문공 금성 나총례 사적비)
시조단 묘비명.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나공 총례지묘
나총례 추모 행사
나주 문평 무학산록에 단을 모셔 참배하고, 금성 나 씨 사당 경모사(景慕祠)에 후손 90위와 함께 시조의 위패를 봉안해서 연례 추모 행사 세일제(歲一祭) 거행
991년경 고려 성종(成宗) 10년 사망 추정 연도. 나총례의 아들 종2품 자의대부 금산군 나은고(羅恩誥) 서거. 향년 61세
1011년 고려 현종(顯宗) 2년 제2차 거란전쟁 때 현종이 나주로 피란했다 돌아와 나주를 나주목으로 승격시켰다.
1018년 현종 9년 후백제 수도 전주(全州)와 호남의 호족 나총례의 나주(羅州)를 첫 글자로 해서 전라도(全羅道)라고 통칭했으며, 전라도는 고려 5도의 하나였고, 다른 도가 시대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 것과 달리, 전라도는 고려 혜종 이후로 고려조와 조선조 그리고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전라도라는 단일 명칭으로 존속되었다(김갑동, 「전라도의 탄생과 그 의의」,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2016년. 1~28. 논문 초록 참조).
1024년경 현종 15년 나총례 생몰 추정 연도 이설로서, 924년경을 나총례의 출생 추정 연도로 보고, 100세가 되는 1024년경을 고향 금성에서 나총례 서거 추정 연도
1054년 고려 문종(文宗) 8년 12월 문종이 삼한공신 3천 2백 명에게 추증직을 내리며, 나총례에게 정1품 삼한벽상대광일등공신 금성부원군을 추증하고, 시호 충문(忠文)을 하사
1592년 조선 명종(明宗) 17년 금성 나 씨 최초 족보 『가정보』(嘉靖譜) 간
1717년 조선 숙종(肅宗) 43년~1729년 조선 영조(英祖) 5년 금성 나 씨 나주 납적(納籍)
1732년 영조 8년~1756년 영조 32년 금성 나 씨 나주 거평 납적
1747년 영조 23년 무신흉변(戊申凶變) 당시 전국 55개 나 씨 본관 가운데 영남 지역 안정, 군위, 수성 나 씨 등과 호남 지역 금성, 정산, 나주 나 씨 등 사이에서 금성(현 나주) 본관 금성 나 씨로 이관
1756년 영조 35년 금성 나 씨 금성 납적
18세기 중후반 정랑 나무송(羅茂松, 1577년 생~1653년 몰)의 고손 나경언(羅景彦)이 부산 동래부로 이주하면서 금성 나 씨 부산 입향조가 되었다.
1937년 대한 임정(大韓臨政) 19년 문기주 편찬 『동래군지』에 금성 나 씨가 우거(寓居) 성씨로 기록
1980년대 사당 경모사(敬慕祠)를 설립하고 91위 제향. 나총례 사적비(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충문공 금성 나총례 사적비) 건립
1981년 7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금성시로 통합
1999년 11월 전남 나주시 문평면 설단(設壇) 및 경모사(景慕詞) 창건 연례 세일제
2000년 인구 조사에서 부산 지역 금성 나 씨 인구 1천 5백여 명 추산
2006년 족보학전문연구소, 『한국의 名家: 나주 본관편』, 2006년 제2회 팔도 성씨 박람회 자료집, 족보학전문연구소, 2006년 (나총례에 대한 단행본)
2007년 10월 경기 파주 고려통일대전 개국실에 나총례 배향
2012년 5월 6일 나총례사적비 건립(고려역사선양회 기술, 금성나씨대종회 건립)(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시충문 나공 총례 사적지비)
2015년 정청주, 「신라말•고려초 海上勢力의 대두와 그 역사적 의미―왕건의 海上勢力 장악을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제59권, 2015년. 27~64. (나총례에 대한 논문)
2018년 10월 12일~13일 목포대 목포캠퍼스에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한국중세사학회•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 공동 주최 학술대회, 「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 기념학술회의」 개최. 김갑동 저 「왕건과 전남 세력의 동향―나총례, 오다련, 최지몽을 중심으로」, 『도서문화』 제52호,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8년. 7~36 (나총례에 대한 논문). 고려 왕조 성립기에 왕건 가문과 나총례 가문이 합세하여 궁예가 파견한 왕건이 금성군을 나주로 승격시켰고, 나총례는 고려의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나총례는 고려의 토성으로 나주의 지배 세력이 되었고, 고려 명족으로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김갑동 논문 초록 참조). 나총례 가문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도 전남 지역과 나주 지역의 지방 호족 세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9년 강봉룡, 『해양강국 고려와 전남』, 민속원, 2019년. (나총례에 대한 단행본)
* 나총례의 생몰 추정 연도: 나총례의 생몰 연도는 추정 연도이다. 현재 전해지는 기록은 901년 금성태수 나총례의 기록과 903년 금성의 해상 세력 나총례와 송도의 해상 세력 왕건의 후삼국 통일 협력,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삼한공신 책봉, 943년 나총례의 북방 방어, 944년 왕규의 난 평정, 947년 박수경과 내란 평정, 1054년 고려 문종이 나총례를 정1품 삼한벽상대광일등공신 금성부원군에 추증하고 시호 충문(忠文)을 하사했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901년 금성태수로부터 1054년 추증에 이르는 기간을 이설로 전해지는 나총례의 나이 100세를 기준으로 출생 추정 연도를 901년 이전, 사망 추정 연도를 1054년 추증 이전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생몰 추정 연도는 대략적으로 서기 886년경 통일 신라 헌강왕(憲康王) 12년 생~985년경 고려 성종(成宗) 4년 몰로 추정되었다. 왕성한 내란 평정 시절을 기준으로 금성태수 시절은 10대 후반경으로 추정했다. 참고로, 금성태수•나주성주 나총례는 고려 정종조 재위 기간 945년~949년 당시 호남의 주요한 해상 호족 세력이자 고려의 삼한 통일의 일등공신이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
* 나주(羅州)의 옛 지명: 근본적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 또는 통의군(通義郡)이었으며, 신라 때 금성현(錦城縣) 또는 금산현(錦山縣)이었고, 고려 때 나주(羅州)였으며, 고려 성종 때 진해군이라고 하다가, 조선 때 나주 도호부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때에 금성과 나주로 행정 구역을 공존하다가 현재는 나주로 불리고 있다. 현재 금성 나 씨는 나주 나 씨와 동성동본이족(同姓同本異族) 관계이다.
* 금성(錦城)의 옛 지명: 본래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이었고, 죽군성(竹軍城)이라고도 했으며, 대방주(帶方州)가 설치되기도 했다. 686년 신라 신문왕 통의군(通義郡)으로 개칭했으며,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불리었다. 940년 고려 태조 23년 나주로 개칭되었고, 983년 고려 성종 2년 나주목을 설치했다. 995년 성종 14년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고, 1018년 현종 9년 나주목으로 환원했다. 1310년 고려 충선왕 2년 나주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고, 1356년 공민왕 5년 나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895년 조선 고종 32년 나주부를 설치하고 나주군을 관할케 했고,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되어 금성시가 되면서, 금성시와 나주군이 분리되었고, 198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금성시가 나주시로 개칭되었고, 199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나주시와 나주군이 나주시로 통합되었다.
* 나총례(羅聰禮) 가문: 나총례 가문의 유래는 가문 초기에 나 씨 3형제가 삼한의 마한, 백제의 발라에 왔으며, 그들의 7대조 후손 나장언이 지나로 갔고, 나장언의 후손 나지강이 서기 600년대 신라에서 좌승상을 역임하고 발라로 귀향했다. 다른 설은 한나라 때 나덕헌, 나덕부, 나덕공 3형제가 마한에 와서 정착했다고도 한다. 나총례는 초기 발라에 정착한 나 씨 3형제의 후예로 추정되며, 고려 왕조 성립기에 왕건 가문과 나총례 가문이 합세하여 궁예가 파견한 왕건이 금성군을 나주로 승격시켰고, 고려가 나주를 지배하면서 나총례는 고려의 개국 일등 공신이 되었다. 나총례는 고려의 토성으로 나주의 지배 세력이 되었고, 고려 명족으로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김갑동 논문 초록 참조). 나총례 가문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도 전남 지역과 나주 지역의 지방 호족 세력이자 중국과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해상 세력이었다. 903년 고려 왕건이 금성을 방문해서 금성태수 나총례의 성씨를 따라 금성군을 주로 승격해서 나주(羅州)라고 명명했으며, 후에 고려 혜종이 후백제의 수도 전주와 나총례의 관향 나주의 앞 글자를 따라 전라도(全羅道)라고 명명했다. 전라도의 명칭은 고려 이래로 바뀌지 않고 조선과 대한민국에서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한편, 고려 왕건이 지명을 성씨로 하사한 곳은 금성 나 씨의 나주와 상주 상 씨의 상주 2곳뿐이라고 한다.
* 금성(錦城)의 인물들: 금성 나 씨 총인구는 현재 6만여 명에 이르지만, 2000년 4만 명, 1980년대 3만여 명으로 20세기 이전에는 이보다 숫자가 적었다. 또한 21세기 근래에는 수성 나 씨와 군위 나 씨가 금성 나 씨와 친밀하게 교유하고 있는 친화성을 보이기도 했다. 금성의 주요 인물에는 고려조 병부상서 나효전, 형부상서 나득황, 대장군 군부판서 나유, 명경박사 나문규, 전리판서 나계종, 조선조 성균관대사성 나세찬, 장군 나대용 등이 있다. 금성 나 씨 사당과 유적으로는 나계종 사당 봉강사가 전남 문화재자료 제94호이며, 나세찬 사당 송재사가 있고, 체암공 나대용 장군 사당 소충사가 있으며, 나대용 장군의 생가와 묘역은 전남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6호이다. 나계종이 생전에 가꾼 숲이 공원으로 있으며, 나대용 생가 부근은 나대용 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금성 나 씨의 여러 사당들과 유적들이 전남 나주 지역에 소재한다. 금성 나 씨 집성촌은 전남 나주 문평면 오룡리, 동원리, 대도리, 송산리, 산호리이며, 전남 나주 세지면 죽동리, 전남 영광 법성면 대덕리, 전남 장성 삼서면 대곡리, 대구 동구 백안동, 경북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그 외에 북한 지역 금성 나 씨 집성촌으로는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매남리와 매서리,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용천리가 있다.
금성 나 씨 계파 및 분파는 충절공익희파, 참봉공수파, 부사공항파, 판결사공참파, 이문파, 득춘파, 교위공희파, 참판공침파, 진사공지파, 훈도공복파, 부장공파, 첨지공율파, 유파, 진파, 금파, 진사공항파, 현감공상파, 참의공협파, 부호군공언파, 석파, 참봉공열파, 우파, 침파, 수남파, 진사공한준파, 붕파, 참봉공임파, 신파, 생원공수경파, 처경파, 생원공문경파, 철파, 봉익파, 한림공파, 경복파, 효헌파, 효방파, 후계파, 상경파, 응경파, 신경파, 영도첨의공순파, 참봉공덕인파, 부사공덕의파, 전서공파, 시랑공파, 금양군파, 연안군파, 직장공파, 염공파, 죽헌파, 체암파, 계은공파, 성백리공파, 송재공파, 총례공파, 창주공파, 청백리공파, 나주파, 강진파, 연천파, 무안파, 영암파, 원주파, 교동파, 광주파, 한산파, 화순파, 해제파, 용강파, 성천파 등이다.
* 나주 나 씨 시조 나부(羅富): 한반도의 나 씨는 전국적으로 55개 본으로 산재해 있으며, 그 가운데 나주, 금성, 안정, 군위, 수성, 비안, 의성, 정산 등이 현재 알려져 있는 나 씨 관향이고, 대략 나주 나 씨와 금성 나 씨 그리고 안정 나 씨가 나 씨의 대표적인 성 씨들이다. 나주 나 씨 시조 나부(羅富)는 본래 전라도 여황(艅艎, 현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에 정착한 여황 나 씨였으며, 조선 시대 세종조 여황현이 나주로 통합되면서 나주 나 씨로 이관되었다. 시조 나부는 고려조 정3품 정의대부 감문위상장군을 역임했다. 조선 시대 영종조 무신란으로 반란에 가담한 나주 나 씨가 반란 실패로 위기에 처하자, 나주 나 씨 후손들이 금성 나 씨 집안으로 피신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 1490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편지 2통의 저자 안정 나 씨 나신걸(羅臣傑):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편지의 저자인 안정 나 씨 나신걸(羅臣傑, 1461년~1524년)은 2023년 4월 22일 보물 제2209호로 지정되었으며, 나신걸은 조선 시대 전기 조선군 군관 장교와 사마 현감을 역임했다. 나신걸은 조선의 시인 나식(羅湜)의 부친 나세걸과 사촌 형제였으며, 그러므로 나신걸은 나식의 당숙이다. 나신걸의 묘역은 충북 보은 안정 나 씨 선영에 소재하며, 한글 편지를 돌로 새긴 석조 조각상이 나신걸 묘역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다.
* 금성 나 씨 삼강문(三綱門): 조선 시대 충신 나통서, 효자 나봉서, 열녀 나덕전의 처 옥천 설 씨, 열녀 나준서의 처 공산 이 씨 4인의 충효열(忠孝烈)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전남 문화재자료 128호이며, 전남 장성군 삼서면 우치리에 소재한다. 앞면 3칸, 옆면 1칸 팔작지붕과 홍살문으로 세워졌다.
* 고려 가요 「금성별곡」: 1480년 고려 성종 11년 박성건 작 경기체가 고려 가요 총 6장이다. 나주 지역 경관과 나주 유생들을 노래했다. 1789년 조선 정조 13년 『함양박씨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 나주해전(羅州海戰): 신라 말 신라와 당나라를 잇는 주요 해상 요충지는 경기 화성 당은포과 전남 나주 덕진포였으며, 841년 장보고의 사망 이후에는 당은포 지역 등이 해적떼와 도적떼의 창궐로 제 기능을 상실하자, 신라의 당나라 출항 길은 나주 덕진포 주변으로 집중되었다.
나주해전은 나주라는 당시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던 항구를 점령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해상 및 육상 전투를 가리킨다. 901년 후백제가 신라 합천 대야성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회군 길에 금성을 공격했으나 금성 호족들의 저항으로 무산되었고, 후백제 견훤에 대한 반감만을 샀다. 903년 왕건이 견훤과 싸워 금성을 함락했고, 909년에는 진도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910년 견훤이 군사 3천 명으로 나주성을 열흘간 포위하자, 궁예가 수군으로 습격해 물리쳤다. 대표적인 나주해전은 912년 8월 나주덕진포해전(나주해전)에서 궁예와 견훤이 덕진포에서 맞섰으며, 견훤이 목포 영산포에서 덕진포로 수군을 이끌었고, 궁예가 육상의 이점으로 바람을 역이용해 견훤을 물리쳤고 결국 견훤이 포기하고 작은 배로 달아났다. 이로써 궁예와 왕건의 군사 전략은 남해의 후백제를 제압하고 서해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또한 나주 지역의 경제권을 안정적으로 선점하게 되었다(김가영, 「나주 덕진포해전(후백제-태봉)의 배경과 진행」, 『사람과생명』, 네이버 블로그 참조).
* 금성태수 나총례의 학술 연구: 금성태수 충문 나총례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근래에 신라 말 고려 초 주요 지역의 세력권을 쥔 해상 세력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다. 당시 해상 세력의 경제 활동과 군사 활동 그리고 고려의 삼한 통일에서 기여한 역할 등으로 역사적 연구가 이루어지거나 진행되고 있다. <끝> <2024년 1월 5일,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금성 라 씨,” 『위키백과』; 김연지, “금성 나씨,” 『부산역사문화대전』; 김현민 기자, 「왕건에게 나주란?… 후백제 견제하는 배후지」,” 『아틀라스뉴스』, 2020-11-18; 김세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장군」―나대용 장군 평전―(2) 나대용 장군의 탄생」, 『나주문화관광』; 나진, 「시조 총례공(聰禮公): 금성나씨 사요, 청백리공 파보의 내용」, 『금성 나 씨 대종회』; 김가영, 「나주 덕진포해전(후백제-태봉)의 배경과 진행」, 『사람과생명』, 네이버블로그; 기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