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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영주 부석사.아름다운 사찰 선정. 정원이 아름답다.무량수전의 감동.소조 석가모니불.고색창연. 역사의 누적을 느끼겠다.전체적인 당우와 주변환경과의 자연스런 조화, 세월이 전각의 뜀을 허락치않고 전체가 무척 균형을 갖춘 조화스럼이다
한국의 건축가들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의 목조건물로 오랜 역사도 지니고 있지만, 볼록한 배흘림기둥과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의 아름다운 추녀 곡선은 한국미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부석사는 통일신라시대 676년(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의 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들어 원융(964~1053년)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 1358년(공민왕 7년)에 왜적의 침탈로 가람의 일부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의상 이후 혜철을 비롯하여 무염과 징효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1376년(우왕 2년)과 이듬해에는 원응국사 천희가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수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절 이름을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고도 불렀다.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1580년(선조 13년)에 사명대사가 중건하였고, 1746년(영조 22년)에 화재로 전각과 요사 등이 크게 손실되어 이듬해 모두 복원하였다.
.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절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商船)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또,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만월당(滿月堂)·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浮石寺祖師堂)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원각전(圓覺殿)·안양루(安養樓)·선묘각(善妙閣)·응진전(應眞殿)·자인당(慈忍堂)·좌우요사(左右寮舍)·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응진전·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가 있다. 또,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었던 부석사의 선원(禪院)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전되어 현재는 주지실과 종무소(宗務所)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7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국보 제45호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보물 제249호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255호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735호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인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원융국사비는 절의 동쪽 500m 지점에 위치하며 1054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 외에 삼층석탑 두기와 동쪽 언덕에는 1기의 고려 말 부도를 포함한 10여 기의 부도가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룡(石龍)을 비롯하여 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석조(石槽)·맷돌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묘정은 절의 동쪽에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드렸다고 한다. 대석단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절의 입구에 있다. 거대한 축석(築石)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면석(面石)을 섞어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석단은 3단으로서 극락세계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대석단과 합하여 상·중·하의 셋으로 보는 가람 경영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녹유전은 가로와 세로가 14㎝의 정방형 기와로서 두께는 7㎝이며, 벽돌 표면에 0.3㎜ 정도의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내게 한 신라시대의 유품이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땅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 것에 입각하여 무량수전의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선비화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하는데,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무량수전 앞 석등은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297센티미터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지대석과 간주석, 화사석, 옥개석이 완전한 형태의 석등이다. 화사석은 사면의 화창이 있고 다른 사면에는 각 한 구씩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미를 간직한 석등 조각의 백미라 칭송할 만하다.
의상대사를 흠모하다가 용(石龍)으로 변한 선묘의 머리는 무량수전의 부처님 밑에,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 밑에 묻혀져 있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의미 있는 석등이다.
동쪽 기단면에는 '忠原 赤花面 石手 金愛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지금은 많이 훼손되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신라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공포는 주심포식이다. 전체적인 건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건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이며,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의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과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 그리고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한 것과 기둥머리가 넓어 보이는 눈의 착시현상을 막기 위한 배흘림(엔타시스) 형식의 기둥 등은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들이다. 내부에는 국보 제45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고려시대의 소조아미타여래불이 봉안되어 있다. 서방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인데도 동남쪽을 향해 결가부좌한 자세로 수인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참고 : '화엄경'의 교주는 비로자나불이다. 그런데 화엄사상을 배경으로 조성된 부석사가 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구품세계를 펼쳐 놓은 것은 의아한 일일 수도 있다. 이는 어러운 화엄사상을 중생에게 쉽게 전하기 위해 마련한 방편에서 채택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것은 원효대사의 화엄사상이 외적으로 나타난 신앙형태가 아미타불이었다는 점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주법당인 무량수전에는 극락정토의 교주인 무량수불(아미타불)을 모셨다. 제자들이 의상대사에게 왜 탑을 세우지 않는가를 물으니 "무량수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열반하는 일이 없으며 지금도 시방에 항상 계시므로 탑을 세우지 않는다"라고 답했다고 전해 온다. 실제 무량수전의 동쪽 언덕에 있는 삼층석탑은 동방사 터에서 옮겨 왔으며, 범종루 앞의 삼층석탑 2기는 절의 동쪽 약사골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이다.
폐사지인 동방사터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봉안하고 당호를 '자인당'으로 고쳤다. 이는 곧 부처님을 자인대사(慈忍大師)라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 봉안된 3분의 석불좌상 중 양쪽으로 놓인 두 불상이 보물 제220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이란 이름으로 지정된 비로자나 석불이다.
보물 제220호로 지정된 지권인의 수인을 한 비로자나석불인데, 통일신라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자인당' 건물.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인 나한전 . 일반적으로 석가삼존불과 500나한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이라고 하고,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모신 전각은 응진전이라고 한다.
중앙의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고, 좌우 협시는 제화갈라불과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고,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은 석고로 제작되어 봉안된 것이다.
부석이라는 절 이름은 왕명을 받고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이교도들이 폐악을 부리며 방해하자, 의상대사를 흠모하다가 용으로 변한 선묘가 커다란 돌로 변하여 공중을 떠 다니며 이들을 물리쳤다는데서 유래한다. 그 선묘의 영정을 봉안한 선묘각이다.
선묘각 봉안된 선묘의 영정
삼성각 안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봉안했고 후불탱화는 칠성탱이다. 왼쪽에는 독성탱을, 오른쪽에는 산신탱을 모시고 있다.
삼성각 안의 독성탱.성각 안의 산신탱화
범종은 지옥중생를 제도하기 위해 친다. 새벽에는 28번(수미산을 중심으로 수직적 28천을 의미)의 타종을 하는데 천상계인 사천왕천에서(욕계 6천, 색계 18천과 무색계 4천)비상비비상천까지 28천의 모든 하늘나라 중생들을 깨워서,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는 의미에서 치고, 한편으로는 인도의 가섭존자에서 중국의 달마대사까지 28대 조사를 위하여 친다는 설도 있다. 저녁에는 육신을 가진 현실의 수행자가 수미산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정상이 도리천이다. 즉 현실의 수행자들이 사는 곳이 도리천을 상징함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의미로 33천(도리천을 중심으로 수평적 33천을 의미)을 상징하는 33번의 종을 친다. 그리고 28천+욕계천 아래의 5계(지옥, 아귀, 축생, 인간,아수라)라는 설도 있다.
자인당의 석조불상과 함께 동방사터에서 옮겨온 삼층석탑으로 현재 보물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층 기단에는 탱주와 우주가 있고, 옥개받침은 각층 모두 5단씩이다. 처마의 전각은 약간 반전되어 있고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으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봉안한 법당으로 명부전 또는 시왕전이라고 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다 구제한 다음 부처님이 될 것을 서원한 보살로서, 아주 큰 서원을 세웠다고 하여 대원본존이라고도 한다.
대개 육도를 상징하는 육환장을 짚고, 보주를 들고 있다. 부처님 입멸 후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무불시대에 육도중생을 제도할 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부터 부촉받은 보살이다. 좌우 협시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고, 또한 열 분의 명부시왕이 있다.
인로왕 보살이 반야용선을 타고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모습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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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부석사의 일주문은 1980년에 세운 맞배지붕에 다포식의 일주문이다. 당간지주가 안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일주문은 원래의 위치에 세운 것은 아니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으로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액은 박병규(朴秉圭)의 글씨로 '太白山浮石寺'라고 쓰여져 있다. 일주문 뒷편에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일주문 뒤쪽의 '해동화엄종찰' 편액이 보인다.
석당간지주일주문을 지나 부석사 경내로 오르다 보면 왼쪽 길가에 보물 제255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를 만게 된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에서 각종 법회나 행사시 당(깃발)을 내걸 때 사용하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지주를 말한다. 높이 428센티미터의 두 지주가 1미터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간지주이다.
삼층석탑
현재 가람의 동쪽 약사골 절터에 있던 쌍탑을 1966년에 현재로 자리로 옮겼다. 1966년 옮겨올 때 익산 왕궁리 오층 탑에서 출토된 사리 5과를 석탑에 안치하였으며, 동탑의 모습이다.약사골 절터에서 옮겨온 서탑의 모습이다. 이중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린 신라 기본 형식이지만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보여 주므로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범종각이다. 건축학에 관련된 사람들이 찬탄해 하며 찬사를 보내는 건물이다. 건물은 측면으로 앉아 있고 건물의 앞쪽은 팔작지붕의 형태이지만, 뒤쪽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는 비대칭형 건물이다. 그러나 건축학적 측면에서 보면 정말 자연 친화적이며, 부석사의 전체 모습을 살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뒤쪽에서 바라본 맞배지붕 형태의 범종각.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은 안양루에서 무량수전 올라가는 계단에서 보면 올라갈수록 석등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무량수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동쪽에 있어 방문객으로 하여금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갈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이다.
무량수전.석등,량수전 모서리기둥(우주)의 공포,량수전 측면의 공포,량수전 정면의 공포,량수전 측면 3칸의 모습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無量壽殿'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이다. 무량수전이라는 이름은 한량없는 수명과 한량없는 지혜를 지닌 아미타여래를 무량수무량광불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이다.
목조석가모니불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은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설명 출처 : 문화재청)
일주문 입구 절까지 은행나무길.가을이 아름다울듯.
조사당은 사찰의 고승, 창건주 등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말한다. 이 건물은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625~702년)를 중심으로 여러 스님들의 영정과 신중탱을 봉안하고 있다. 중앙에는 석고로 조각된 의상대사의 상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조사당의 처마 아래에는 '선비화(콩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인 골담초)'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의상대사의 주장자를 꽂은 것이 지금까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부석사 창건의 유래를 간직하고 있는 부석 바위이다.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아래윗 바위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선묘용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부석
부석사는 9개의 석축과 108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개의 석축은 9품을 의미한다. 9품이란 9단계의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살아 생전의 선행과 공덕에 따라 환생되는 것이다.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 3개의 석축은 하품의 경계를, 범종루에서 안양루까지는 중품의 경계를, 안양루에서 무량수전까지를 상품의 경계로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다. 위 사진은 하품에 해당하는 천왕문을 지나서 범종루로 오르는 3개의 석축이다.
이 건물은 위쪽과 아래쪽의 현판이 서로 다르다. 올라가면서 앞쪽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고 되어 있고, 위쪽의 마당쪽에는 '안양루'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하나의 건물에 문과 누각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安養)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그리고 안양문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글씨인 무량수전 현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내3출목, 외2출목의 다포식이다.
무량수전 앞 마당쪽에서 본 안양루이며 안양루 편액은 소남 김종호 선생이 갑신년 가을(1944년)에 쓴 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