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則 오래 사는 놈들도
있고 일찍 죽는 놈들도 있다(日面佛月面佛)
垂示
一機一境 一言一句 且圖有箇入處 好肉上剜瘡 成窠成窟 大用現前 不存軌則
且圖知有向上事 蓋天蓋地 又摸索不
일기일경 일언일구 차도유개입처 호육상완창 성과성굴 대용현전 부존궤칙
차도지유향상사 개천개지 우모색부
著 恁麽也得 不恁麽也得 太廉纖生 恁麽也不得 不恁麽也不得 太孤危生 不涉二塗
如何卽是 請試擧看
저 임마야득 부임마야득 태렴섬생 임마야부득 부임마야부득 태고위생 부섭이도
여하즉시 청시거간
서문
어느 때는 행위를 보여주기도 하고 어느 때는 무엇을 가리키기도 하며, 어느 때는 짧은 한마디 대꾸 등 갖가지 방법으로 깨우치려 하나, 오히려
그런 짓들은 아름다운 살에 마구 상처를 내어 꼴사나운 구멍투성이를 만들어 놓을 뿐이다. 지극한 도의
활동은 우리 둘레 어디에나 꽉 들어차 있고, 세상의 속된 법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 지극한 도를 깨우치기 위한 방법이 온 세상에 가득 차 있어도, 그것을
손으로 더듬어 찾아낼 수가 없다. 지극한 도를 찾아낼 수 있든, 찾아낼
수 없든 그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찾아낼 수 있다, 찾아낼
수가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러나 지극한 도를 찾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므로 그냥 둘
수는 없다. 찾아내면 안 된다, 찾아내지 않아도 안 된다고
하니 대체 이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마침 여기 좋은 본보기가 있으니 살펴 보자.
本則
擧 馬大師不安 院主問
和尙近日 尊候如何 大師云 日面佛月面佛
거 마대사부안 원주문
화상근일 존후여하 대사운 일면불월면불
본문
마조스님이 노환으로 몸이 편치 않았는데 원주가 찾아와 물었다.
“화상께서는 요즈음
용태가 어떠십니까?”
마조스님이 대답했다.
“일찍 죽는 놈도
있고, 오래 사는 놈도 있으니 그렇게 부산 떨 것 없다.”
頌
日面佛月面佛 五帝三皇是何物 二十年來曾苦辛 爲君幾下蒼龍窟 屈 堪述 明眼衲僧莫輕忽
일면불월면불 오제삼황시하물 이십년래증고신 위군기하창룡굴 굴 감술 명안납승막경홀
송
일면불이니 월면불이니
오제니 삼황이니
그것이 다 무엇이더냐
이십 년 내내 괴로웠던 나날들이여
그것을 찾아 창룡굴을 얼마나 드나들었던가
아! 혼났다 그 괴로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눈 밝은 스님네들이여 이를 가벼이 여기지 말라
[解釋]
깨달음, 즉 道는 우리 모두가 꼭 얻어야 할 삶의 본질이다. 삶의 본질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무엇이 삶인지도 모르고 사는 헛된 삶(假生)이고, 삶의 본질을 알고 산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삶(眞生)을 사는 것이다. 헛된
삶에는 모순과 괴리감으로 가득 찬 고통의 연속이고, 진정한 삶이란 그 어떤 모순과 괴리감도 없이 지고의
평온과 사랑만이 충만한 삶이다. 이 극명히 대립되는 두 가지 삶은 우리가 삶의 본질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이렇듯 중요한 삶의 본질, 즉 道를 중생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그 많은 선사(禪師)들이 때로는 몸짓으로, 때로는 사물을 가리킴으로, 때로는 짧은 말 한마디로 별 짓을 다하여
보았으나 깨달음은 그렇게 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그런 짓들은 아름다운 살에 마구 상처를 내어 꼴사나운 구멍투성이를 만들어
놓은 꼴이 되어 버렸다. 이 지극한 道는 세상 도처에 그 어디에나 널려 있으나, 세속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니 찾으려 해도 보이지가 않고, 더듬어
보아도 만져지지가 않는다. 이 지극한 道는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고 나에게 오는 것도 아니니 道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말아야 하는
것인가? 道를 찾는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 것?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道를 깨우쳐야 내가 진정한 삶을 살게 될 터인데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마침 여기 마조스님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 지극한 道가 무엇인지 우리 한번
유심히 살펴보자.
문병 온 원주에게 퉁명스럽게 마조스님이 대답한 한마디에 그 답이 들어있다. “일찍 죽는 놈도 있고, 오래 사는 놈도 있으니 그렇게 부산 떨
것 없다.” 佛經設에 따르면 월면불(月面佛)은 수명이 하루 낮 하루 밤을 사는 일찍 죽는 놈이고, 일면불(日面佛)은 수명이 팔백 년이나 되는 오래 사는 놈이다. 세상에는 일찍 죽는 놈들도 있고, 오래 사는 놈들도 있으니 그깟
죽음에 연연하지 말고 늘 지금 이 순간을 잘 살라고 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갖는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을 깊고 깊게 찾아가다 보면 죽음에 두려움이
그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많은 파생되는 정신적인 문제 및 고통을
만들어 낸다. 태어남도 축복이요, 삶도 축복이요, 죽음 또한 우리 자리로 돌아가는 축복일 뿐이다. 그저 태어나서 죽기까지
아무 걱정 없이 매 순간순간을 멋지게 살다가 죽음 또한 멋지게 축복으로 받아드리고 내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죽음은 두려운 것도 아니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으며 당연히 우리에게
오는 축복일 뿐이다.
인간은 언제 인가부터 죽음은 슬픈 것이며,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여 왔다. 그러나 나의 어버이가 돌아가시면 갈 곳으로 가셨으니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하고 한바탕 축제를 벌이면 왜 안 되는가? 열자(列子)에는 자식을 잃은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자식이 죽어도
그 아버지는 도무지 슬퍼하지를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드님이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아끼시고 사랑하셨는데 어찌 아드님의 죽음에 그리 슬픈 기색이 없으십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게 그 아들이
없던 시절에는 아들로 인해 슬퍼할 일 조차가 없었는데, 이제 다시 아들이 죽어 없어졌으니 그 옛날 아들이
없었던 시절로 돌아간 것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슬퍼할 일이 있겠는가?”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가?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너무 잘못 생각하고 있다. 언제부터 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죽음에 대한 오래된 관념이 너무 고착화되어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이
죽음에 대한 잘못된 관념만 벗어내도 우리 삶이 90%이상 달라진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관념과 생각이 나를 불행한 삶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지극한 삶의 과정의 일부이다. 숙명이니
운명이니 할 것 조차도 없다. 죽음을 축복이니 축제니 할 것도 없고,
죽음을 슬픔이니 엄숙함이니 할 것도 없다. 죽음은 그저 내가 매 순간을 멋지게 살듯이 그
순간도 멋지게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지극한 道가 마조스님
한마디에 모두 들어 있다. “일찍 죽는 놈도 있고, 오래
사는 놈도 있으니 그렇게 부산 떨 것 없다.” 이 한마디를 이해하면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이 한마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깨달음은 아직 멀리 있을 뿐이다. 그렇게
지극한 道는 우리 주변 도체에 널려있고, 깔려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도처에 널려있는 道를 이미 깨달은 자가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배울 수 없는 것이고, 내가 아무리 배우려 해도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극한 道는 천지사방에 널려있다. 다만 내가 어느 한 순간에
“아! 이것이구나.”라고
깨달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의 자식들에게 준 유서에 남겨져 있다. “아빠가 죽으면 장례식 치르지 말고, 바로 화장해서 아무 곳이나
너희가 편한 곳에 훨훨 날려 보내라. 그리고 누군가가 아빠의 죽음을 알고 찾아오면 술 마시고, 노래하며 한바탕 실컷 놀아라.”
삶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지금의 현대 및 미래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깨닫지 않고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방도는 더 이상 없다. 벽암록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중국 선사(禪師)들의
소중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은 삶은 현대 및 미래사회에서 정말 위험하다. 벽암록에는 100개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지만, 지극한 道는 내 주변
도처에 깔려 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첫댓글 감사!!!
삶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살 것인가?...
일면불월면불
저는 예전에 이렇게 해석해봤습니다.
(해뜨는) 대낮에도 부처님만을 마주하고(섬기며)
(달뜨는) 밤에도 부처님만을 마주하며 살고 있노라
알고보니 과연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