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 답사입니다*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11년전에 제가 답사 공지하면서 썼던 인사 말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풍수를 참 많이 좋아했고, 푹 빠져 지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올려드립니다.
벌써 올해 마무리 답사라니....
이번 답사는 포천시 일원에 있는 풍수학인에게 많이 알려진
역사 속 인물의 음택으로 답사지를 선정하였습니다.
풍수공부를 하면서 배우는 또 하나의 묘미가 바로 역사를 알아간다는
것이지요.
책을 읽고, TV 사극을 통해서 알게 된 인물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어찌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이동하는 느낌이랄 까요 (*.*)
한 시대를 호령했던 분들을 만난다는 설렘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또한, 그 분들의 유택은 어떨지 더 궁금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정취와 더불어
역사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풍수"의 세계에 흠뻑 매료되시길...
올 한해도 답사에 함께해주셔서 진심으로
"곰사합니다"
(고맙습니다와 감사합니다)의 합성어로 마음에서 우러나올 정도의
고마움과 감사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말이다.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가를 알릴때 쓰인다.
1. 일시 및 장소 : 2023년 11월 12일 (일)
오전 9시 아주대 정문 출발
2. 답사지
1) 조성하 선생 묘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순소(舜韶), 호는 소하(小荷). 고조할아버지는 조엄(趙曮)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조진관(趙鎭寬)이다. 할아버지는 조만영(趙萬永)이며, 아버지는 조병준(趙秉駿)이다. 조병구(趙秉龜)에게 입양되었다.
추존 왕인 익종(翼宗)의 비인 신정 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친정 조카이다.
첫 부인은 이호준(李鎬俊)의 딸인 우봉 이씨(牛峰李氏)이고, 둘째 부인은 박내보(朴來輔)의 딸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조성하(趙成夏)[1845~1881]는 1860년(철종 11) 신정 왕후에게 문안하러 갔다가 사용(司勇)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9월 구일제(九日製)라고 하는 국제(菊製)에서 제2등으로 발탁되었다. 1861년(철종 12)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62년(철종 13) 규장각 대교에 제수되었다.
1863년(철종 14) 홍문관의 부수찬과 응교 및 사헌부 집의, 의정부 검상, 사복시정과 훈련도감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특명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고, 계속해서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비롯해 이조와 호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지냈으며, 첨지중추부사와 돈령부 도정을 지냈다. 1865년(고종 2) 양모(養母)인 안동 김씨 상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1868년(고종 5) 출사해 직제학과 동지경연사 및 이조와 형조의 참판, 동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동지의금부사, 부총관, 한성부 우윤, 활인서와 제용감 제거 등을 역임하였다.
1874년(고종 11) 특명으로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부임 후 토호들의 폐단을 뿌리 뽑고 약한 사람들을 도왔고, 고과를 신중하게 하였으며, 선발을 공평하게 하였다. 또한 병기를 수선하고 자모 산성을 중수하였다. 1876년(고종 13) 일본이 개항을 요청하며 군함으로 침공해 오자, “국가가 위급한데 어찌 좌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돈 1만 냥과 양곡 1,000석을 마련하여 병조에 보냈다.
그 해 겨울 지경연사로 발탁되어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이어 예조 판서, 공조 판서, 지의금부사, 정부 유사당상, 세자시강원 우부빈객, 내의원 제조, 승문원 제조, 빙고 제조를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 16) 지중추부사로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판의금부사에 제수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881년(고종 18) 의정부 좌참찬과 홍문관 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령을 받기 전에 죽었다. 이때 나이 겨우 37세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 서성 선생 묘역 (포천시 설운동 산1-14)
1976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묘소는 서성과 부인 여산송씨와의 합장묘로, 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도로변 야산에 위치한다.
묘역 입구 오른쪽에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봉분 주위는 곡장을 조성했으며, 봉분은 호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뒤편에는 현대식 건물로 재실이 갖추어져 있다.
서성(徐渻, 1558~163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이며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5개도의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역학(易學)과 서화(書畵)에 뛰어났다.
묘소는 뒤쪽으로 곡장을 둘렀는데 곡장은 사고석을 쌓아 만들었다. 봉분은 호석(護石)을 높게 두른 다음 봉토(封土)하였다.
봉분 앞에는 묘비,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으며, 상석을 중심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계절(階節: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을 만들고 양끝은 곡장의 끝과 연결시켰다. 배계절(拜階節: 계절 밑에 절을 할 수 있게 평평하게 만든 땅)에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좌우로 각각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문인석은 투구를 쓴 것으로 보이는데, 현대에 와서 비무장지대의 집안 묘역에 있는 것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묘역 아래에는 가첨석(加檐石)을 갖춘 신도비가 있다. 1646년(인조 24)에 세워진 이 비는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짓고,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으며, 김광현(金光炫)이 전액(篆額)을 쓴 것이다. 비문은 김상헌의 문집인 『청음집(淸陰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묘역의 곡장·호석·봉분 앞의 묘비는 1968년에 후손들이 신축 및 보수를 한 것이다.
서성 선생 묘 안쪽에는 할아버지 서고(徐固)와 아버지 서해(徐嶰)의 묘가 있고,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에는 아들인 서경우 묘(徐景雨墓)가 있다. 포천에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의 묘들이 많이 분포하는데, 조선 중기에 포천 지역과 달성 서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토문화전자대전
3) 인평대군 묘 및 신도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산46-1)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무덤과 신도비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위치한다. 1992년 6월 5일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전주이씨 인평대군파 종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온 후 사은사로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났다.
묘역은 곡장(曲墻: 묘 뒤에 둘러싼 작은 담)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은 단분(單墳)으로 원형의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 오씨(吳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1658년(효종 9)에 건립된 묘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다.
상석을 받치는 고석(鼓石)에는 사면에 양각으로 사자상(獅子像)을 조각해 놓았다. 상석 밑으로 봉분과 석물의 공간을 분할하는 얕은 석단이 가로질러 있다. 석단 밑에는 좌우로 동자석(童子石)이 있고 그 앞으로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망주와 문석인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묘역 뒤편 오른쪽으로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석물과 묘역 우측 하단에는 제물(祭物)을 올릴 때 사용하는 판석이 놓여 있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세워졌는데, 높이 325㎝의 거대한 규모이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생동감이 넘치는 정교한 모습이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1,800여 평의 규모로 매우 장대한 편이다.
특히 묘역 하단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의 어제 친필(御製親筆)로 된 치제문비(致祭文碑)를 포함해서 2기의 치제문비가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평대군 묘 및 신도비 [麟平大君墓─神道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전계대원군 묘 (포천시 선단동 773)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계 대원군 이광 부부의 합장묘.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1785~1841)은 조선 후기 왕족으로
그의 가계는 영조(英祖)[증조할아버지]→사도 세자[할아버지]→은언군(恩彦君)[아버지]→전계 대원군→철종[아들]으로 이어진다.
이광은 부모와 형 상계군(常溪君) 부부의 죄에 연좌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빈농으로 살았다.
사후에 이광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이 헌종을 이어 1849년 철종으로 등극하자 전계 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광의 첫 부인 완양부 대부인(完陽府大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최수창(崔秀昌)의 딸이고, 둘째 부인 용성부 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는 영의정으로 추증된 염성화(廉成化)의 딸로 철종을 낳았다.
1841년 이광이 57세로 세상을 뜨자 경기도 양주 신혈면 진관[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의 은언군 묘 옆에 안장하였다가 1856년 포천의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완안 부대부인과 합장하였다. 용성 부대부인 염씨 묘는 이광 무덤의 동쪽 옆 구릉에 단독으로 조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계 대원군 묘 [全溪大院君墓]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5) 백사 이항복 선생 묘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1082-11)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 장군의 딸과 혼인하였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우정과 해학이 얽힌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이의 문하로 서인에 속했다. 이후 저작(著作)·박사·정언(正言)·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으며, 전란 중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한음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병조판서를 맡아 전란을 지휘하는데 앞장섰다. 1598년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발생하자 목숨을 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으로 전란을 무사히 극복하여 그 공로가 인정되었으며 1599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 강경 대북파가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서울 부암동에는 이항복의 별장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으며 이 계곡을 '백사실계곡'이라고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항복 [李恒福]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3. 회비 : 5만원 (당일 총무에게 지급)
4. 담당자 : 총무 김은희 (010-3228-6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