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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2열왕기 20장-25장
2열왕 20,1-11 히즈키야의 발병과 치유
“그 무렵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1).
성경에서 '그 무렵'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막연한 어떤 시기'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아시리아의 유다 침입(18,19장)과 관련이 있다(6절). 즉 병행구절인 이사 38,1-22에 의해서도 분명히 알 수있 듯 히즈키야의 병은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해온 초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산헤립의 1차 유다 침입은 기원전 701년경 그리고 2차 유다침입은 기원전 699년경의 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히즈키야의 발병(發病) 시기도 그때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20장에서 이사야(Isaiah)에 대한 이러한 소개는 이미 19장에서 행해진바 있다. 그런데 1절에서 또다시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그의 새로운 역할을 자연스레 소개하기 위함인 듯하다. 이 구절에서 이사야는 왕의 자문자(諮問者)로서 왕이 죽게 될 경우 왕가에 일어날 혼란과 다툼을 예방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히즈키야는 얼굴을 벽에 대고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이것은 히즈키야 왕의 경건성에 잘 보여준다. 당시에 얼굴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얼굴을 든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에게서 '얼굴을 돌렸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경멸이나 무관심을 가리킨다. 따라서 얼굴을 벽에 대고 기도하는 히즈키야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즈키야의 간절함을 나타낸다. 즉 그는 자기의 평상 업무와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후 오직 주님께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여 매달린 것이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3). 히즈키야의 기도는 이사 38,3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이 기도는 히즈키야가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잘것 없는 자신의 행적이지만 하느님 앞에서 진실되게 행하고자 처신을 다했다고 하는 겸허하고 간절한 기도일 것이다.
히즈키야가 이렇게 심히 통곡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추측된다. 아직 그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21,1에 따르면 히즈키야의 아들 므나쎄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12세였다. 그렇다면 므나쎄는 히즈키야가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은 후(6절)에 얻은 아들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히브리적 관념에 비추어 볼 때 후사(後嗣)가 없이 죽는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잘해 왔던 히즈키야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형벌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처음에 히즈키야의 죽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왕궁의 뜰을 나가기 전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영도자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해 주겠다. 사흘 안에 너는 주님의 집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나 자신과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5-6).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히즈키야가 하느님께 간구한 것은 단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이었다(3절).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의 생명을 무려 십 오 년이나 연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다.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무화과 과자를 가져 오라고 해서 그것을 종기에 붙이자 임금의 병이 나았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악질 또는 기타 다른 요인으로 인한 종기(腫氣)및 위궤양 등을 치유할 때 민간요법으로 무화과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화과의 본래적인 치유 효능으로 인해 히즈키야가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 마치 그리스도께서 진흙을 사용해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요한 9,1-12) 여기서 무화과는 하느님의 기적적인 치유 능력을 보여 주시는 매개물일 뿐이다.
히즈키야는 이미 치유를 받은 후에(7절)도 왜 이처럼 징조를 구하였는가에 대하여 간혹 학자들간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병이 완전히 회복되는 기간으로 예언된 3일(5절)은 히즈키야에게 있어서 참으로 초조하고도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기도가 정말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징조를 구하였던 것이다. “히즈키야가 이사야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치유해 주시어 내가 사흘 안에 주님의 집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그 표징이 무엇이오?”(8).
이사야는 히즈키야 왕에게 그가 이사야를 통해 자신의 병이 나으리라는 표징을 시간의 변화를 이루어 준다고 말하였다. 이사야는 히즈키야에게 표징에 대해 말하면서 그림가 열 칸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는제 그림자가 뒤로 열칸 가기를 원하는지 말하라고 하였다. 히즈키야는 그림자가 앞으로 가는 것보다 뒤로 가는 편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림자 즉 시간을 뒤로 열 칸을 가도록 요청하였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께 청하니, 주님께서 아하즈의 해시계에 드리운 그림자를 열 칸 뒤로 돌아가게 하셨다”(11). 해시계로 옮긴 히브리말은 본디 ‘계단’을 뜻한다. 쿰란에서 발견되 이사야서 두루마리 38,8에는 “아하즈의 옥상 방 계단들”이라고 좀 더 분명히 설명한다. 따라서 이를 옥상 방으로 올라가는 외부 계단으로 보아, 해 그림자 열 칸은 이 계단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길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건축 구조물에 관하여 알려진 바가 없고, 본문에 언급한 표징이 아하즈의 수명과 관련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히브리 말을 ‘계단’ 보다는 막대기를 세워 그 그림자로 시간을 재는 ‘해시계로 옮겼다. 해시계는 계단 맨 꼭대기에 막대를 세워 그 막대의 그림자가 비치는 계단의 수로 시간을 측정했다. 이러한 해시계는 아시리아나 바빌론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는데 유다에선 히즈키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B.C735-716)이 처음으로 일영표(日影表)를 만든 듯하다(11절;이사 38,8).
2열왕 20,12-19 바빌론 사절단
발아단의 아들 바빌론 왕 므로닥 발아단은 히즈카야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통해 편지와 예물을 보냈다. 바빌론왕 므로닥 발라단은 기원전 722년 사르곤(Sargon) 원년에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710년까지 약 12년간 바빌론을 통치하다가 다시 사르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기원전 705년에 사르곤이 죽고 난 뒤 다시 6개월 동안 통치하였는데 후에 산헤립에 의해서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기원전702년경부터 그는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엘람(Elam)에 거처를 정하고 계속해서 아시리아에 대항해 왔는데 그가 히즈키야에게 사절단을 보낸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 아닌가 추측된다. 따라서 여기서도 히즈키야의 발병 시기를 알 수 있는데 아마 므로닥 발라단은 산헤립을 물리친 히즈키야의 명성을 듣고 사절단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히즈키야의 병 완쾌를 축하한다는 구실로 유다에 사절단을 보내어 유다와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했을 것이다.
바빌론 사절단의 방문은 여러 이방사절단의 방문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히즈키야는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유다에서 철수,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 이러한 영광을 획득하게 되었음도 알 수 있다(2역대 32,22). 한편 당시 국력이 신장(伸張)하고 있던 바빌론의 사절단이 히즈키야를 방문한 것은 히즈키야에게 특별한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바빌론과 동맹을 맺는다면 앞으로 아시리아의 침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히즈키야는 바빌론 사절단에게 신망(信望)을 얻기 위하여 자기 보물고를 보여 주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이방 나라와 동맹을 맺어 의지하려는 마음이 히즈키야에게 있음을 간파하고 비록 왕의 청함이 없었지만 그를 질책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히즈키야에게 나아갔을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이사야는 오직 주님께만 도움을 구하고 이방을 신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었다(이사30,1-7;31,1-7). 그러기에 이제 이사야는 히즈키야의 심증을 캐묻기 위하여 또는 히즈키야가 바빌론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회개토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14)라고 질문한 것이다.
“이사야가 다시 물었다. ‘그들이 임금님의 궁궐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히즈키야가 대답하였다. “내 궁궐 안에 있는 것을 다 보았소. 내 창고 안에 있는 것 가운데 내가 그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소”(15). 15절에서 히즈키야는 자신이 바빌론 사절단에게 행한 일들을 자세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즉, 왕을 질책하기 위해 온 예언자에게 히즈키야는 마치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일들을 고백하듯이 분명하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다윗에 버금가는 히즈키야의 위대한 신앙이 있다 할 것이니(2사무 12,13) 사실 잘못을 지적받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법이다.
이사야는 히즈키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라, 네 궁궐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네 조상들이 오늘날까지 쌓아 온 것들이 바빌론으로 옮겨져, 하나도 남지 않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 주님이 말한다. 너에게서 태어날 아들들 가운데 더러는 끌려가서 바빌론 왕궁의 내시가 될 것이다”(17-18). 여기에 언급된 보물들 가운데 금은의 상당 부분은 아시리아에게 넘어 갔지만(18,15) 기타 다른 보물들은 여전히 히즈키야가 보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히즈키야가 바빌론 사절단에게 국고(國庫)를 열어 보인 것(13절)은 그만 도둑에게 자신의 보물을 자랑한 꼴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18절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였다.
2열왕 20,20-21 히즈키아가 죽다
“히즈키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모든 무용, 그리고 그가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일에 관해서는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20). 2역대 32,27-33에 보면 히즈키야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번영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번영들은 대부분 기원전701년 아시리아의 침략 이후에 획득한 것이니 그가 병에서 완쾌된 후 15년 동안은 실로 태평 성대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히즈키야가 예루살렘 성 밑으로 수로(水路)를 뚫어 만든 못과 수도는 아시리아의 침략을 대비하여 만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이 증거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 만든 지하 수로의 길이는 약540m 가량 된다고 한다.
2열왕 21,1-17 므나쎄의 유다 통치
“므나쎄는 열두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쉰다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헵치 바였다. 므나쎄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1-2). 므나쎄는 12살이 왕이 되어 55년간 통치하였다. 유다 제 14대 왕(기원전 697-642)으로 등극한 그는 그 이름에 걸맞게 아비 히즈키야의 선행(善行)을 잊어버리고서 악정(惡政)을 일삼았다. 므나쎄는 히즈키야가 15년간의 생명을 연장받게 된 때로부터 제3년째에 태어난 셈이다(20,6).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의 석상과 우상 그리고 산당을 모두 훼파하라고 명령하셨다(7,5).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본받게 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상 숭배했던 왕에 대해서 엄한 징계를 내렸다(1열왕 13,34;21,17-26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나쎄는 아하스와 같이(16,3) 이방인들의 각종 우상을 섬겼다(4-9절).이러한 므나쎄의 행위는 통치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역사 의식과 주체 의식이 없었음을 증거한다. 따라서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비젼(Vision)을 제시해 줄 목자가 없었던 유다는, 결국 바빌론의 침략에 맥없이 무너져 버리고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므나쎄가 과거 히즈키야에 의해 척결되었던 산당을 다시 세우므로써 히즈키야가 이루어놓은 종교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중앙 성전으로 집중된 유다 백성들의 마음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리게 되었다. 당시 므나쎄가 그토록 부패한 정책을 편 것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집트를 의지하여 아시리아를 물리치자고 주장했던 히즈키야 때의 거짓예언자들과 다른 불신앙의 세력들이(이사 28,7;30,9) 어리고 경험없는 므나쎄의 배후에서 그에게 우상 숭배를 하도록 부추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막강한 통치력을 가졌던 히즈키야와 당대의 신앙의 거성(巨星)이었던 예언자 이사야의 죽음이 백성들 사이에 신앙의 큰 공백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유다에서 바알(Baal)을 숭배한 것은 아탈야 이후로(11장) 아하스(2역대 28,2)에 이어 므나쎄가 세 번째이다. 그러나 므나쎄는 실제로 아하스보다 더 공개적으로 바알 숭배를 허용한 듯하다. 왜냐하면 역대기 저자와는 달리 열왕기 저자는 아하스가 바알 숭배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6,3,4). 한편 열왕기 저자는 므나쎄의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 '아합의 소행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한다(왕상 16,31-34). 그런데 므나쎄는 오히려 아합보다 더 극심하게 바알 및 이방신들을 숭배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기 아버지 히즈키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 제단들을 세웠다. 또 이스라엘 임금 아합이 하던 대로,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군대를 경배하고 섬겼다”(3).
“므나쎄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도록 유다를 죄짓게 한 죄악 말고도, 무죄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피로 채웠다”(16). 여기에서 말하는 ‘무죄한 피 흘림’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을 가리킨다. 특히 므나쎄가 끌어들인 우상 숭배에 항거한 죄로 목숨을 잃은 이들과 어린이 제사로 희생당한 아이들은 무죄한 사람들이다. 이사야와 예언자 미가는 히즈키야가 죽기 이전에 예언 활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스바니야는 요시야(Josiah,기원전 640-609)왕 때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므나쎄의 통치 기간 55년 동안에 성경상으로 알려진 예언자들은 아무도 없는 셈이 된다. 유다 전승은(탈무드와 이사야 승천기) 이사야의 죽음을 므나쎄의 탓으로 돌린다. 므나쎄는 이사야를 감옥에 던져 넣었다가 나중에 톱으로 두 조각을 내어 죽였다고 한다.
므나쎄는 죽어 다윗 성에 묻히지 못하였다. 그는 궁전의 동산인 우짜 동산에 묻히고 그의 아들 아몬이 임금이 되었다.
2열왕 21,19-25 아몬의 유다 통치
“아몬은 스물두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두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므술레멧인데 욧바 출신 하루츠의 딸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 므나쎄가 하던 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19-20). 그는 예루살렘에서 2년간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 방법은 그의 아버지 므나쎄를 그대로 본 딴 것이었다. 아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요시야가 행한 종교 개혁을 보면 당시 아몬이 얼마나 우상 숭배에 광분(狂奔)했었던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23,4-24). 아몬의 신하들은 임금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반란한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임금으로 임명하였다.
다시말해 백성들이 마치도 촛불혁명을 일으킨 것과 같이 아몬을 죽인 이들이 정권을 차지 하지 못하게 하였다. 백성이란 사회적으로 부유하고 세도가 있는 특권층이 아니라 다윗 왕조의 회복을 갈망 하는 모든 유다 백성을 지칭한다. 이 백성들은 이집트의 세력에 힘입어 이집트의 영향을 빌어 정권을 잡으려는 반역배(反逆輩)들을(23절) 죽이고 8세밖에 안된 요시야(22,1)를 왕위에 앉혔다. 이러한 사실은 유다 백성들이 비록 우상숭배로 하느님 앞에 심히 패역했지만 그래도 다윗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역사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러한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친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을 8세의 요시야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배교적(背敎的)인 부친의 유물들을 모두 배격하고 의로운 왕이 될 것을 바랐던 것이다. 한편 열왕기에 의하면 이러한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요시야는 하느님 앞에서 가장 칭찬받는 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23,25).
2열왕 22,1-2 요시야의 등극과 종교개혁
“요시야는 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서른한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여디다인데 보츠캇 출신 아다야의 딸이었다. 그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그대로 걸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1-2).
요시야(Josiah)의 부친 아몬은 24세에 죽었다. 그러므로 결국 요시야가 태어난 때는 아몬의 16세였던 셈이 된다. 한편 요시야는 유다 최후의 선왕(善王)으로서 31년간(기원전 640-609)을 통치하였다. 그는 다윗을 본받아 주님 신앙에 전념하였는바 죄악으로 더럽혀진 나라를 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유다를 구원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며 그 자신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고 성급히 이집트와의 싸움에 참전하여 전사(戰死)하였으니(23,29-30)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경건에 대한 평가는 여호사팟(2역대 17,3) 및 히즈키야에 대한 평가와 동등하다(18,3). 때문에 후대 사가 (史家)들은 여호사밧, 히즈키야, 요시야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유다의 3대 성군(聖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열왕 22,3-20 주님의 율법서를 발견하다
2역대 34,3-7에 따르면 요시야는 이미 그의 통치 12년에 한 차례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모든 우상들을 파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유다 역사상 가장 철저하고도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인 바로 이 통치 18년째의 일이다. 한편 요시야 왕 18년은 기원전 621년경이다. 이때는 앗술바니팔 왕의 죽음(기원전 626년)으로 인해 아시리아 제국이 이미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대외적인 면에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대내적으로 오로지 종교 개혁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기원전 622년경, 요시야가 통치한 지 십팔 년째 되는 해, 또는 그가 성인이 된 후에 행해졌다. 이 개혁을 실시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성전 안에서 발견된 ‘율법서’였다(22,8). “힐키야 대사제가 사판 서기관에게, “내가 주님의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였소.” 하고 말하면서, 그 책을 사판에게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서,”(8). “그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임금은 자기 옷을 찢었다. ”(11). 율법을 가리키는 이 율법서라는 표현은 오직 신명기계 문헌에서만 발견되는데(신명 29,20), 성전 안에서 발견된 두루마리와 현재의 신명기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가서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의 말씀을 두고,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주님께 문의하여 주시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13).
하느님 뜻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책(또는 두루마리)에 사람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22,13) 공공 정책 분야에서 결정을 내릴 때 공적이고 거룩한 문서를 하느님의 안내를 받는 지침으로 여기는 신앙이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지금까지는 주로 예언자가 한 말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 더 오래된 이야기들 안에는 기록된 하느님의 법(여호 23,6; 24,26; 1열왕 2,3; 2열왕 14,6)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 시대가 아니라 신명기계 역사가가 나중에 첨가했을 것이다. ‘성경’에 대한 믿음이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다른 증거를 에즈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시야 시대보다 약 220년 후에 에즈라는 유배 이후 이스라엘 재건의 일부로서 어느 날 아침 “모세의 율법서”를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봉독하며 성경에 대한 믿음을 키울 것이다(느헤 8,1-12).
요시야 임금과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이 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결정하기 위해 여예언자 훌다에게 조언을 구한다(22,14-20). 훌다는 주님께서 당신을 저버린 이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진노가 꺼지지 않는다고 전한다. 그러나 회개하는 이들에게 열려져 있는 손길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이곳과 이곳 주민들이 황폐해지고 저주를 받으리라고 내가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유순해져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다. 또 네 옷을 찢고 내 앞에서 통곡하였다. 그래서 나도 네 말을 잘 들어 주었다. 주님의 말이다”(19).
훌다는 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까지 신명기계 역사라는 파란만장한 이야기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예언자인데, 이 긴 역사의 서두에 등장하는 첫 예언자 드보라(판관 4-5장)와 수미상관 관계를 이룬다. 요시야의 개혁은 예루살렘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2열왕 23,26-27 참조), 다가올 굴욕적인 패배로부터 요시야를 구해 낼 것이다.
이상하게도 열왕기는 이 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예레미야와 스바니야를 소홀히 대한다. 예레미야는 성전이 폐허가 되리라고 설교했기 때문에 그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적들을 만들었고(예레 26장), 스바니야는 요시야 시대에 예루살렘을 반항적이고 타락한 도성이며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약탈자라고 비난했다(스바 3,1-4). 아마도 신명기계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이 선동자들에게 거의 호감을 갖지 못한 것 같다.
2열왕 23,1-23 율법서 봉독
“임금은 모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 사제들과 예언자들, 낮은 자에서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데리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큰 소리로 읽어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에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2-3).
성전 안에서 발견된 책의 존재가 임금과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었지만 이 책의 구속력은 이때 행해진 공적인 계약에 바탕을 둔 것으로 소개된다. 임금은 “계약 책”(23,2)으로 불리는 그 책을 공적으로 읽은 후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 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키기로 야훼 앞에서 계약을 맺는다. 이 공적 행위는 이 책 안에 기록된 계약을 새롭게 갱신한다(23,3; 신명 6,5.20 참조).
“임금은 힐키야 대사제와 두 번째 서열의 사제들과 문지기들에게 명령하여, 주님의 성전에서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모든 군대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기물들을 모조리 끌어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예루살렘 밖 키드론 들판에서 태우고, 그 재를 베텔로 가져갔다”(4).
이어지는 종교 개혁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는데 그중에서도 바알 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정화(23,1-7), 유다에 있는 산당들 파괴(23,8-9), 예루살렘 밖(23,10)과 토펫(예레 7,30-34 참조)의 몰록 사원 파괴를 꼽을 수 있다. “임금은 ‘벤 힌놈 골짜기’에 있는 토펫을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아무도 제 아들딸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여 몰록에게 바치지 못하도록 하였다”(10). 이 행위들,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예식의 중앙화는 신명기의 규정과 일치한다. 신명기계 역사 전체는 요시야가 행한 예배 중앙화의 관점에서 기록된다.
사마리아의 성읍들 근처에 있는 산당의 제거(23,19-20)는 아시리아에 대한 중요한 반역을 암시한다. “요시야는 또한 이스라엘 임금들이 사마리아 성읍들에 만들어 놓아, 주님의 분노를 돋운 모든 산당을 베텔에서 한 것과 똑같이 없앴다. 그는 그곳 산당들의 사제들을 모두 제단 위에서 죽이고, 그들 위에 사람의 뼈를 얹어 태운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19-20). 아시리아는 사마리아를 속주로 통치했지만 사실 아시리아 본국은 강력한 군사적 압력에 직면에 있었다. 요시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싸고 온 이스라엘의 재통합을 시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금이 온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계약 책에 쓰여 있는 대로 주 여러분의 하느님을 위하여 파스카 축제를 지내십시오”(21). 전처럼 각 성읍과 가정에서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된 파스카 축제는 유일한 성소로 가는 순례의 관습으로 탄생시켰다. 요시야는 개혁의 절정에 파스카 축제를 복원하여, 이제 신명기에 규정된 대로 중앙 성소로 순례를 떠나는 국가적인 순례 축제로 기념한다(신명 16,1-8). 편집자는 이 축제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판관 시대 이래로 의식이 거행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한다(여호 5,10-12 참조).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파스카 의식이 묘사된 여호수아기는 이 열왕기 분문보다 후대에 나온 것이다. “요시야 임금 제십팔년에 이르러서야,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주님을 위하여 파스카 축제를 지내게 되었다”(23). 기원전 7세기 말 요시야의 통치를 파스카 축제와 연관시키는 것은 당시에 이집트 탈출 전승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판관기 안에 이미 그 흔적이 남아 있다(판관 6,13; 11,13.16; 19,30 참조).
2열왕 23,28-30 요시아의 죽음
“요시야 시대에 이집트 임금 파라오 느코가 아시리아 임금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을 향하여 올라갔다. 요시야 임금이 그와 맞서 싸우러 나가자, 파라오 느코는 므기또에서 요시야를 보고 그를 죽여 버렸다”(29). 이집트 왕 파라오 느코는 니네베(Nineveh)가 멸망한 후 3년째 되던 해인 기원전 609년에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왕이 된 그는 당시 아시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바빌론 왕 나보폴라살과 격전을 벌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고 유다 땅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기원전 605년 경에 다시 나보폴라살을 공격했는데 이때에 나보폴라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가 갈그미스 전쟁에서(2역대 35,20) 이집트을 격파했다. 이것으로 이집트의 세력 확장은 중단되었다.
요시야는 므기또 전쟁에서 전사하는데(기원전 609년), 그의 죽음으로 개혁도 종결된다. 국제정치의 움직임에 따라 나라 사이의 동맹관계도 바뀌게 되어 파라오 느코가 통치하던 이집트는 최대의 적으로 여겼던 아시리아의 동맹을 맺는다. 당시에 그들을 위협하는 바빌론의 힘이 동쪽에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야는 주요 동맹국 없이 이집트를 저지하기 위해 직접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므기또 전쟁에서 살해된다. 므기또는 선과 악이 싸우고 처음에는 악이 우세하는 장소로서 점점 이스라엘의 종교적 심상 안으로 들어온다(즈카 12,11; 묵시 16,16 참조).
유다를 정복한 힘센 이민족은 다윗 왕조를 계승한 임금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대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사람을 임금 자리에 앉히는 불안정한 시기가 이어진다. 여호아하스, 여호야킴, 여호야킨, 치드키야 이 허수아비 임금들은 모두 요시야 집안 출신으로 다윗 계보 안에 들어 있다.
2열왕 23,31-37 여호아하즈와 여호야킴의 유다 통치
“여호아하즈는 스물세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하무탈인데 리브나 출신 예레미야의 딸이었다”(31). 여호아하즈는 요시야의 4째 아들이다. 그는 백성에 의해 추대 되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 왕에 의해 폐위되었고 이집트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즈는 3개월 간 짧게 통치하고(609년) 친이집트파인 여호야킴(기원전 609-598년)을 지지하는 파라오 느코에 의해 폐위된다. 여호야킴은 원래 엘야킴으로 불렀는데 이름이 바뀐 것은 파라오의 신하로서 그의 종속된 위치를 강조한다. 여호야킴은 에레미야서에서 에레미야 예언자의 악한 적대자로 등장한다(예레 36장 참조).
한편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여호야킴은 국민들에게 세금을 과다하게 거두어 파라오 느코에게 바친 후 남은 것으로는 자신을 위해서 사치스런 궁전을 세웠다고 한다(예레 22,13-14). 또한 그는 예언자 우리야도 죽였다고 한다(예레 26,20-23). 여호야킨 통치 11년간(기원전 609-598)은 바빌론이 서서히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통치 말년에는 바빌론의 영향도 컸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는 자기 조상들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37). 이집트 왕 느코에 의해 옹립된 여호야킴(34절)은 이집트의 정책을 그대로 좇아 독재를 행한 또 한 명의 악행자(惡行者)였다.
24,1-20 첫 번째 바빌론 침략
“여호야킴 시대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 올라와서, 여호야킴은 세 해 동안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 뒤에 그는 돌아서서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반역하였다”(1). 여호야킴은 요시야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이집트의 조공을 위해 백성을 수탈하였다. 그의 사치한 마음으로 인해 큰 궁전과 재물 축적에 힘을 모았다. 그는 예언자 유리야를 죽였고,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움으로 암흑정치를 하였다. 2역대 36,5-8에는 여호야킴의 말년에 대하여 보다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거기에 따르면 여호야킴은 바빌론으로 잡혀가 그곳에서 마지막 나날들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구체적인 악행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서(26,23; 36,20-23)와 에제키엘서(19,9)에 잘 기록되어 있다.
'네부카드네자르'이란 이름은 바빌론의 신 '느보'(Nebo)의 이름과 결합된 것으로서 '느보여 나의 지계석(地界石)을 지켜주소서'라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바빌론의 역대기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609년경 바빌론 왕 나보폴라살은 서진(西進) 정책을 세우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성읍 하란을 공격하였는데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가 이 지역을 막고 있어서 하란을 탈취하지 못하고 서쪽 영토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기원전 605년 경에 나보폴라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와 이집트의 느코가 유프라테스의 갈그미스에서 전투를 했다. 이때 이집트의 느코(Neco)가 참패하여 물러나고 네부카드네자르은 자기 부친 나보폴라살이 원했던 아람과 팔레스틴 전 지역을 차지하고 계속해서 유다의 여호야킴과 주변의 다른 왕들을 위협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바빌론으로 끌려간 것(다니 1,1-7)도 바로 이때인데 이것이 곧 바빌론의 제1차 유다 침입이다. 또한 네부카드네자르가 필리스티아 땅 아스클론을 차지한 것(예레 47,5-7)은 그로부터 한해 뒤인 기원전 604년경의 일이다. 그리고 기원전 602년경 네부카드네자르는 이집트 쪽으로 이동하여 그 경계 지역에서 느코와 다시 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두 나라는 크게 손실을 보았고 네부카드네자르는 바빌론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바빌론 1차 침입(기원전 602년경)후 네부카드네자르가 바빌론으로 돌아가자 여호야킴은 주권 회복의 호기(好機)로 생각, 반바빌론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칼데아 연합군을 편성, 유다에 대한 내정 간섭을 하였다.
여호야킴이 처음 바빌론 배반했을 때 네부카드네자르는 칼데아, 아람, 모압, 암몬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 연합 부대를 유다에 보내어 반란을 평정하려고 했다. 여호야킴이 네부카드네자르를 배반한 탓에 칼데아 연합군의 침입을 당한 것은 유다 멸망의 전조(前兆)였다. 그런데 유다가 결국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하리라는 사실은 이미 이사야, 미가, 하바쿡, 예레미야, 스바니야, 훌다 등과 같은 예언자들이 예언하였던 바이다(20,16-18; 22,16, 17; 예레 21,8-10; 미가 4,9; 하바 1,5-11 ;스바 1,1-18). 그래서 열왕기 저자는 그 같은 예언에 의거, 당시의 정황을 하느님의 심판의 도래(到來)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데아는 본래 남부 바빌론에 있는 한 지방의 이름이다. 그런데 후에 이는 신바빌론을 다스렸던 왕국을 통칭(通稱)하게 되었다. 한편 여기서 '부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두딤'은 조직화된 군대가 아니라 기습했다가 달아나는 유격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아람이나 모압, 암몬은 유다보다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유다와 정면 대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도 당시까지는 큰 군대를 유다에 보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는 칼데아, 아람, 모압, 암몬인들로 구성되 유격대를 파견, 유다를 괴롭혔던 것이다. 한편 바빌론이 다시금 이스라엘에 전면적인 공격을 시도한 것은 여호야킴이 죽은 지 1년이 지난 후인 기원전597년 3월로서 그때는 여호야킴의 18살 난 아들 여호야킨이 왕위에 있던 때이다(5-17절). 바로 이것이 바빌론의 제 2차 유다 침입인데 마지막 제 3차 침입에서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사건은 다음 25장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605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유프라테스 강 근처의 카르크미스라는 성읍에서 이집트-아시리아 군대를 제압했다(예레 46,2 참조). 24장은 기원전 598년 여호야킴이 죽은 지 얼마 후 어떻게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함락시켰는지를 전해 준다. 여호야킴의 아들 여호야킨이 그의 뒤를 잇는다(24,8-17). 여호야킨과 예루살렘의 중요한 관리들(에제키엘 예언자 포함)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간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 치드키야를 임금으로 세우고 예루살렘에 남겨놓는데 그가 다윗 가문의 마지막 임금이다(기원전 598-587년).
“여호야킴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자,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6).
역대기 저자는 여호야킴이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쇠사슬로 결박되어 바빌론으로 잡혀 갔다고 기록할 뿐(2역대 36,5-8)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예레 22,19에서는 “사람들은 노새를 묻듯 그를 묻으리라. 그를 끌어다가 예루살렘 성문 밖에 멀리 내던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6절에서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다'라는 말은 여호야킴이 예루살렘에 있는 묘실에 장사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ㄸ라서 여호야킴은 어떤 식이든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되끌려와 죽임당한 후 예루살렘 묘실에 장사된 것으로 보인다
예레 36,30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여호야킴에 대하여 “그의 후손 가운데 아무도 다윗 왕좌에 앉을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6절에서는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호야킨은 즉위한지 3개월 만에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대신 여호야킴의 동생, 즉 그의 삼촌 치드키야가 왕위에 올랐으니(15,17절) 실상 여호야킨은 왕위에 올랐다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여호야킨은 열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느후스타인데 예루살렘 출신 엘나탄의 딸이었다”(8).
여호야킨응 18살에 임금이 되었고, 단지 3개월만 통치하였다. 그는 바빌론 1차 포로시 에스테르와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한편 병행 구절인 대하 36,9에서는 여호야킨이 위(位)에 나아갈 때에 단지 8세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 훼손의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8세밖에 안 된 여호야킨이 집권 3개월 만에 포로로 잡혀갔을리는 만무하며 2. 15절에서 그의 아내들이 언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예레 22,28에서는 그의 자손까지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대기의 기록은 '10'을 나타내는 알파벳 '요드'(*)가 지워져 버림으로 인해 생긴 본문 훼손상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다. 이렇게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도성에 이르렀다”(10-11). 여호야킨이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이다. 이 시기는 기원전 597년 3월이다. 이때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제2차 유다 침입을 시도하였다. 처음에 예루살렘을 에워싼 것은 네부카드네자르의 신복(臣僕)들이었고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한참 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11절). 한편 처음에 여호야킨은 이집트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이집트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고 네부카드네자르가 추가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자 곧 항복하였다(12절).
여호야킨이 이렇게 빨리 항복하기로 결정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 예레미야나 다른 예언자들의 예언 때문이었을 것이다(예레 22,24-30). 아무튼 여호야킨은 바빌론 왕의 선처(善處)를 바라면서 모친과 신하과 대신들과 내시들을 모두 데리고 항복하러 나아갔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그의 부친 여호야킴에게 했던 대로(2역대 36,5-8) 여호야킨에게도 어떠한 혜택도 베풀지 않고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그들 모두를 포로로 잡아가고 말았다(예레 22, 24-30).
예루살렘 성을 몰락시킨 후 바빌론은 맨 먼저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들을 탈취해 갔다. 이방 나라의 침략에는 항상 이와 같은 노략 사건이 뒤따르기 마련이나 여기서는 20,16-19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서 특이성이 있다.
“그런 다음에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의 삼촌인 마탄야를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우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바꾸게 하였다”(17). 요시야의 아들은 모두 네 명으로서 요하난, 여호야킴, 치드키야, 여호아하스이다(2역대3,15). 이중에 치드키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서 여호야킨에게는 삼촌이 된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주님을 분노하시게 하였기에,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당신 앞에서 쫓아내셨다. 그런데 치드키야가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였다”(20). 치드키야의 통치 11년은 기원전 587년까지이다. 그는 유다 왕조의 최후 통치자로서 예루살렘 함락을 목도한 비극의 인물이다.
요시야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주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 그중에서도 치드키야의 악행에 대해서는 2역대 36,12-16, 예레 27-39장에 상세히 나와 있다. 그 기록들에 따르면 치드키야는 매우 허약하고, 우유부단하며, 환경에 잘 휩쓸리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때가 차면 홀연히 주님의 심판이 임하듯(즈카 14장) 이제 패역한 유다 백성을 징계할 바빌론의 마지막 3차 침입이 있다는 것이다. 치드키야가 바빌론을 배반한 것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 위하여 진노하셨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레미야의 예언들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데(예레 21,1-10; 34,1-3; 37,6-10; 38,17-23) 예레미야 예언자는 치드키야가 바빌론을 배반함으로 인해 온 유다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계속해서 충고했다. 한편 이와 관련 치드키야가 바빌론을 배반하게 된 외적인 동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유다의 반바빌론 정책을 주장하던 무리들은 치드키야에게 적극적으로 친이집트 정책을 주장했다. 심지어 이 무리들은 우유 부단한 치드키야를 설득시켜 바빌론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이집트의 지원을 요청했다(예레 27,1-22). 이때 거짓 예언자들도 이 정책을 지지하는 거짓 예언을 했다(예레 28,2-4). 그러나 예레미야는 유다가 이집트과 동맹을 맺고 그를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의 예언을 했다(예레37,6-8). 이처럼 들을 귀가 없고 볼 눈이 없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없고,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므로 화를 자초하게 된다.
아무튼 치드키야는 유다의 가장 비참하고 굴욕적인 왕이 되었다(25,4-7).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바빌론에 복종했으면 유다가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자신도 비참한 상황에 처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떠나 사는 자들은 신명기적 축복과 저주의 원칙에 따라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신명 28,1-68).
25,1-30 두 번째 바빌론 침략
“그래서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치드키야 통치 제구년 열째 달 초열흘날에,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곳을 향하여 진을 치고 사방으로 공격 축대를 쌓았다”(1).
치드키야는 바빌론에 반역하였고 그는 에레미야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예레 28장 참조). 바빌론 침략이라는 재난을 불러왔다. 치드키야는 도망치다가(24,4-5) 사로잡혀 바빌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에제 12,12-13). 성전을 포함하여 솔로몬이 세운 모든 장엄한 건물을 불타버리고 도성 성벽은 붕괴된다(2열왕 25,9-10). 두 번째 유배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남겨 두어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했다(25,12).
남아 있던 유다인들이 유다인 통치자와 싸우는 마지막 반역(25,22-26)은 예레미야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예레 40,13-41,18 참조) 여호야킨은 바빌론 임금 에윌 므로닥(기원전 562-560년)에 의해 가옥에서 석방되는데 이는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이 강조할 주제를 말해 준다. 곧 하느님은 그분 백성과 함께 계시고 유배 중인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바빌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포위당했던 기간은 약 2년 정도였다.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는 이보다 더 정확하게 예루살렘이 18개월 가량 포위당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레 52,5을 보면 바빌론의 포위는 그 해 4월 9일에 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예루살렘 성은 성(城) 주위에 있는 언덕이 성보다 더 높아서 기혼 샘물을 성안으로 쉽게 끌어들일 수 있어 살기에는 좋았으나 전쟁시에는 쉽게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예루살렘성은 견고한 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이방인의 손에 함락된 것이다.
“그는 치드키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가운데 살해하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청동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7). 치드키야 왕은 칼데아 군사에게 잡혀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게로 끌려갔다. 치드키야는 네부카드네자르과 맺은 계약을 어기고 모반했기 때문에(에제 17,16) 네부카드네자르의 법적인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예레 52,9).
치드키야에 대한 형벌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우 잔인하게 보인다. 치드키야는 결국 네부카드네자르과 맺은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이 같은 곤혹(困惑)을 치룬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칼데아 군대에 항복하는 길만이 자신과 그 백성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예레미야의 끈질긴 호소(예레 21,8-10)를 거부한 탓에 받는 하느님의 형벌이다(예레 38,18).
네부카드네자르이 치드키야의 아들들까지 죽인 것은 그가 다루기 힘든 유다 왕가의 종식(終熄)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것은 적의 왕에게 모든 적대행위를 금하도록 하는 것으로 완벽하게 무기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친위대장은 그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12). 당시 바빌론이 유다에 이러한 농부들을 남겨 놓음으로 인해 계속해서 농사일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빌론의 정책에 의한 농사는 포로 시대 이후 까지도 계속되었다. 특히 바빌론은 정책적으로 총독 그달야를 유다에 보내어 경작을 활성화하도록 했는데(예레 40,10) 그것은 그들이 식민지 유다로부터 계속해서 조공을 거둬들이기 위함이었다.
“칼데아인들은 주님의 집에 있는 청동 기둥들과 받침대들, 그리고 주님의 집에 있는 청동 바다를 부순 뒤, 그 청동을 바빌론으로 가져갔다”(13). 여기서 주님의 집 입구에 서 있는 두 청동 기둥은 솔로몬의 명령에 의해 히람이 만든 야킨과 보아스의 두 기둥을 가리킨다(1열왕 7,15-22). 그런데 기둥은 하느님께 대한 예배(창세 28,18),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탈출 13, 21, 22), 그리고 그분의 위엄과(시편 104,3) 영광(1열왕 8,10) 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기둥을 깨뜨렸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파괴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는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한편 이것들을 그대로 운반하지 않고 깨뜨려 갖고 간 것은 기둥이 너무 거대해서 운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기원전 605-562) 앞에 끌려간 포로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1. 치드키야와 그의 아들들을 포함한 유다의 주요 관리들(6,7절), 2. 성전의 관리들과 예루살렘 성에 남아있던 자들로서 끝까지 바빌론에 대항하던 자들(18,19절), 그리고 나머지 포로들도 느부자르아단에 의해 리블라로 끌려갔으나 도성에서 만난 국민 60명과 같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왕의 앞에 까지는 인도되지 않았다. “바빌론 임금은 하맛 땅 리블라에서 그들을 쳐 죽였다. 이렇게 유다 백성은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갔다”(21). 아시리아인들은 포로들을 처형시킬 때 십자가에 매달든지, 목을 베든지, 아니면 껍질을 벗기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용광로에 넣어 태워 죽이거나 맹수에게 먹이로 주든지, 아니면 잔인하게 사지(四肢)를 자르기도 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기록이 베히스툰 비문에서 발견된다. 한편 성경의 기록에 대한 역사성을 고증(考證)하거나 설명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돌이나 점토판에 새겨져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비문들이다.
예레미야 예언자에 의하면 네부카드네자르 7년에 3,023명, 제 18년에832명, 제 23년에 745명 등 총 4600여명이 사로 잡혀간 것으로 알려진다(예레 52,28-30). 그 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약18,000여명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부녀자와 아이들은 계수하는 데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사판의 손자이며 아히캄의 아들인 그달야를 자기가 유다 땅에 남긴 나머지 백성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22). 아시리아와 달리 바빌론은 정복지에 자국민의 이민 정책을 펴지 않고 그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자치제를 실시해 세금과 조공을 받아 갔던 것 같다. 그래서 유대인 가운데 명문 출신인 그달야를 총독으로 세우고 새로운 형태의 행정을 유다에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처사에 대해서 그 땅에 남아있던 많은 사람들은 불만을 품어 그달야를 몰아내고 다른 유다인으로 총독을 삼기 위한 시도가 발생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때 암몬과 동맹을 맺는 새로운 변화를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고 그 후로 약 50년간 바빌론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총독이 된 그달야가 유다가 멸망된 후 각지에 숨어 있던 그 땅에 남은 자들을 불러 모았음을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달야는 수도를 새로 미스파에 정했으며, 자신의 요청에 따라 바빌론을 떠났던 예레미야도 새로운 통치자 그달야를 충고할 수 있는 새로운 수도 미스파에 거처를 정했다(예레 40,1-6; 42,1-43). 그리고 이스마엘과 다른 사람들이 바빌론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나와 유다로 돌아왔을 때에 그들은 그달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달야의 군사 고문인 요하난은 그달야에게 그들의 맹세가 거짓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달야는 요하난의 이러한 경고를 믿지 않았다(예레 40,13).
“그러나 일곱째 달에, 왕족 출신 엘리사마의 손자이며 느탄야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과 함께 찾아와서, 그달야를 쳐 죽이고 그와 함께 미츠파에 있던 유다 사람들과 칼데아 사람들도 죽였다”(25). 그달야가 총독으로 임명 되고 새로운 행정이 시작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이스마엘을 중심적으로 한 격렬한 무리들이 반정(反政)을 일으킴으로 인해 그달야의 행정은 붕괴되고 말았다.
예레 40,14에 따르면 이스마엘이 암몬 왕 바알스의 자극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통치자의 지위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한편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매우 간교한 자로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당시에는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 피하여 있다가 이제 와서 왕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스마엘이 그달야를 죽였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기에 결국 이집트로 도주하였다.
“유다 임금 여호야킨의 유배살이 제삼십칠년 열두째 달 스무이렛날이었다. 바빌론 임금 에윌 므로닥은 자기가 임금이 된 그해에, 유다 임금 여호야킨을 감옥에서 풀어 주었다”(27). 본문은 네부카드네자르(기원전 605-562)가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에월므로닥 왕이 유다 포로들에게 호의를 얻으려고 유다 왕 여호야킨을 유배살이 37년만에 감옥에서 풀어주고 바빌론 왕과 식사를 함께 할 정도로 융숭한 대우를 해 주었다.
“여호야킨의 생계비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임금이 날마다 일정하게 대 주었다”(30). 비록 그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포로지에서도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여전히 왕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경비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여호야킨이 포로지에서나마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언젠가는 유다 백성들을 자기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소망의 증표와 같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비록 여호야킨이 바빌론 왕 에윌 므로닥의 호의로 편히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왕의 신분으로 전국에 잡혀간 볼모의 신세라는 사실이다. 바빌론 왕이 진정으로 여호야킨을 생각했더라면 그를 예루살렘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돌려보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마음속에 사무치는 회한(悔恨)을 품고 고향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예레 22,24-30)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었다.
<열왕기 상권과 하권의 메시지>
솔로몬부터 치드키야까지의 역사를 다룬 열왕기에는 솔로몬의 안정에서 혼돈으로 이끄는 비극적인 일들이 이어진다. 2열왕 25장의 약탈과 파멸에 대한 묘사는 낙관과 기쁨의 분위기 안에서 성전의 토대를 놓던 1열왕 6-7장의 위풍당당함과 빛나는 광채와 대조적이다. 하느님은 다윗의 왕좌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세울 것이라고 예고하셨다(2사무 7장).
그러나 기원전 587년 성전이 불타고 다윗 왕가의 마지막 임금이 눈먼 채로 바빌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자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공포와 침울로 변했다. 하느님은 다윗 왕조가 영원히 쇠퇴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지만 그 언약에도 불구하고 왕정제도는 실패했고 무너졌다.
임금들 이야기는 유배 중에 하나로 통합된다. 열왕기를 읽으면서 저자와 그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본문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삼백오십 년에 걸친 전승을 이해하기 위해 투쟁하고, 이 긴 역사의 혼돈 안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종교 지도자들을 상상해야 한다. 그들은 이야기 형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계속해서 세 가지 주제, 곧 임금, 성전, 예언자에 초점을 맞춘다. 각각의 요소 안에서, 그리고 그들의 상호작용 안에서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약속과 그 영속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신비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이 등장한다. 이 상호작용을 통해 저자는 재난의 시대 속에서 깊은 신앙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왕에 대하여: 열왕기에서 하느님이 임명한 임금이라는 제도는 하느님이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뜻한다. 왕조, 특히 다윗 왕조는 신성했다. 그 왕조는 하느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하느님은 그 약속 때문에 후대 임금들의 삶에서 많은 관용을 베푸셨다(1열왕 8,25; 9,5; 11,32-36; 15,4; 2열왕 8,19). 이스라엘 통치자들은 하느님이 기름 부은 사람으로서(1사무 7장; 시편 2편) 종종 사제 역할을 했다(2사무 6,13; 3,3-4; 시편 110편 참조). 그가 성인이든 죄인이든, 임금은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역사와 사회질서의 중심이 되었다. 왕정제도, 특히 다윗 왕조는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육화하시는 도구와 같았다.
그러나 임금은 이스라엘에서 다른 어떤 요소보다 신성하면서도 죄악으로 얼룩진 역설을 상징한다. 북왕국 임금들은 하나로 묶여 일괄적으로 단죄된다. 남왕국 임금들은 같은 죄를 되풀이한다. 때로는 히즈키야와 요시야 같은 임금들이 깊이 뿌리내린 온전함과 개인적인 거룩함을 증거하기도 했지만 악한 아들들이 거룩한 임금의 뒤를 잇는다. 진보가 막 이루어지는 듯이 보일 때 후계자는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었다.
성전에 대하여: 영속성과 신비의 역설이 성전에도 등장한다. 열왕기 첫 대목의 주된 내용은 솔로몬이 귀한 가구를 갖춘 하느님의 집을 건축하는 장면이다. 성전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채워진 장소, 하느님이 머물고자 하시는 장소다(1열왕 8,10-12). 만남의 천막은 이동할 수 있고, 일시적이며 튼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의 거대한 돌들은 영원히 지속된다. 솔로몬이 하느님께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8,13)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성전은 산헤립에게 포위되었지만 살아남았다(2열왕 19장). 하느님이 어떻게 그분의 집이 파괴되도록 놔두실 수 있을까? 예루살렘 사람들은 언제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을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 마지막 대목에서 바빌론 임금의 신하인 느부자르아단이 바위라도 뚫을 듯이 거침없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 “그는 주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태웠다. 이렇게 그는 큰 집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2열왕 25,9) 그리고 저자는 솔로몬과 그의 후계자들이 마련한 장엄한 건물, 가구, 비품이 어떻게 약탈당했는지 묘사한다(25,13-17).
그러는 동안 성전이 유린되고 성전의 부와 장엄함은 제거된다. 결국 엘리 이야기의 계약 궤처럼(1사무 4장) 성전은 더 이상 하느님의 축복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신앙 안에서 불타버린 성전의 연기 속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성전의 잔해를 용기있게 묘사하고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언자에 대하여: 예언자는 초자연적인 또는 초월적인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당시 사회의 권력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안락을 누리며 우상을 섬기는 당시 사람들의 타협적 삶을 질타할 수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통제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설교는 정치의 흐름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대표했다.
비록 예언자들이 인간적인 나약함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이 해낸 놀라운 일은 이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대표한다. 엘리사의 기적, 곧 나병환자를 치유하고 음식을 많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하고 죽은 이까지도 되살린 일은 흥미로운 마법 이야기가 아니다. 기적 이야기들은 예언자 주변에서 구원이 일어나는 사람들 또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예언자와 다른 사람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느님이 예언자의 적대자에게 내리시는 심판을 묘사한다. 모든 경우에 구원과 심판은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현세적인 것이다. 예언자들을 통해 오는 구원은 종종 그들의 현존과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제한된다. 모든 나병환자가 치유되지는 않았다. 모든 어머니가 죽음에서 되살아난 자식을 품에 안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활동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렙타의 과부, 시리아의 지도자 나아만과 하자엘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엘리야의 구원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깊은 좌절을 체험한다. 그는 이제벨의 격렬한 증오를 피해 호렙 산으로 가는 도중에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다. 이 도움은 그가 고통을 겪으며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한 후에야 일어난다. 임금의 궁전에서는 ‘거짓말하는 예언자들’이 야훼의 진정한 예언자인 미카야의 메시지를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은 나약함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재난 시대의 신앙에 대하여: 유배기에 이 책을 기록한 신학자들은 하느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충실함을 보여주는 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는데, 특히 지도자들의 모범을 강조했다. 하느님은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다. 그러나 인간이 당신 약속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남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근본적인 약속들은 하느님의 마법 같은 힘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여전히 은총으로, 오로지 하느님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으로 남아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갑자기 일어난 역사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본질을 보여준다.
열왕기에서 패배, 재난, 죽음, 파멸은 하느님이 그분 백성과 그들이 섬기던 임금의 죄를 다루시는 방식을 묘사한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보면 가장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들이 제거된다. 하느님은 그렇게 죄의 고유한 차원, 곧 죄와 죽음이라는 차원에서 죄를 다룬다.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그 규모와 영광 면에서 볼 때 세상의 힘센 나라들 사이에서 거의 보잘것없는 국가로 축소되었다.
이스라엘은 유배기에 모든 세속적인 장식물과 영광이 제거되는 체험을 하면서 자신들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한 백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그 전에 ‘계약의 책’이 성전에서 발견되었고 후세를 위해 남겨졌다. 왕정제도와 함께 사제직, 성전, 그리고 모든 정치적인 힘이 제거되었고 이스라엘의 신앙은 오로지 하느님 한 분에게로 돌아갔다. 그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난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하며, 혼돈의 심연 안에서도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게 한다.
유배가 끝날 무렵 세속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희망이 등장한다. 열왕기의 역사는 여호야킨이 바빌론 감옥에서 풀려나는 희망적인 소식으로 마무리된다.(2열왕 25,27-29) 이스라엘은 유배 이후에 더욱 영적인 형태로 존속할 것이며 예언자의 말들은 마지막 임금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선한 임금 요시야처럼 이스라엘은 유배 후에 사회적인 배려와 정의의 원칙들을 지닌 율법과 계약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