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숙 시인의 시집 <꿈꾸는 침목>이
2006년 10월, 도서출판고요아침에서 나왔습니다.
장기숙 시인은
200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인의 말'에서 장기숙 시인은
"임진강 근처에 살면서 군부대의 포성과 장갑차와
망향의 슬픈 눈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현실의 그런
크고 작은 고통들이 자주 그 어딘가를 걷고 더듬게 한다..."고 말합니다.
정수자 시인은 '접경, 그 안팎의 삶과 꿈'이라는 해설에서
"...안타까움 속의 설렘과 부끄러움이 가장 뜨겁게 투영된 게 첫 시집이다.
장기숙 시인에게도 첫 시집은 그렇게 생의 한때를 올인한 결과일 것이다...
...늦은 등단이 오히려 내공을 보여준다면 등단 시기에 대한 편견도
버려야 할 것 같다. 시조 자체가 시보다 숙련을 요구하는 점도 있는 데다
생의 요설이나 장광설을 간추릴 만한 역량이 필요하니,
버릴 것 버릴 줄 아는 나이에 시조를 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다만
치열한 시정신의 부족을 나이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장기숙 시인의 시조세계도 젊음의 장기인 발칙한 발상이나 감각,
전위적인 표현 등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짧지 않은 삶을 통해 다져온
나름의 시선이 시편마다 미덥게 녹아든 것을 볼 수 있다...
...접경지역의 삶은 시인이 일상에서 만나는 풍경이자 의식적으로 찾아나서는
시적 모색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마주치는 역사의 현장과 흔적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를 기록하고 고발하는 시적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 지역의 사람이 아니면 놓칠 수 있는 일들의 세세한 관찰이나 기록 그리고
다양한 형상화를 요하는 것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 대치하고 있는
접경지역의 자연이나 사람살이에 끼치는 여러 흔적은 이보다 더 깊고
치명적인 것들도 많을 듯싶다. 이에 대한 시적 모색은 장기숙 시인이 시작한
하나의 지향이니 보다 깊어진 역사의식이나 시각을 갖고 장기적인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가닥을 정하고 나가다 보면 시적 발상이나 형상화 또한
다양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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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군화
-장 기 숙
임진강 기슭 아래 반쯤 묻힌 군화 한 짝
드는 순간 발 밑에 우르르 부서지는
흰 뼈들, 이름도 없이 삭아온 발가락들
돌아갈 길을 잃어 벗지 못한 긴 오욕
그의 혼백인 양 그 곁에 흐드러진
들찔레 희디흰 꽃잎 눈물이듯 날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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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아재
-장 기 숙
처서 무렵 벌초 길에 마주친 팔복아재
선뜻 내민 왼손을 잡으려던 한 순간
아 그만 나의 오른손 허공 속을 맴돌다
엿장수 가위소리에 신나던 보릿고개
탄피 줍던 사격장에 폭발소리 진동한 날
양지뜸 빨래터에는 붉은 강이 흐르고
그나마 이름 덕에 살았다는 개구쟁이
그 후론 복중에도 벗지 못한 긴 소매
초로의 텅 빈 어깨가 자꾸자꾸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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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처럼
-장 기 숙
차디찬 어느 벽도 주어진 삶이라고
행여 떨어질까 움켜쥔 가파른 길
한 뼘씩 오를 때마다 손톱 밑이 헐었다
무수한 손을 펴서 벌건 등 가려주고
오직 너 끌어안고 하늘을 당기면서
오늘도 태양을 만나 출렁이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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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朴氏
-장 기 숙
훅훅 찌는 아파트 늘어진 오후 한때
매미소리 시원한 밭뙈기라도 옮겨왔나
싱싱한 무등산 수박 동네사람 다 부른다
덤까지 얹어주며 본전이나 채웠는지
혼자 끓던 확성기 잠잠해진 석양 무렵
때 절은 부푼 전대에 하루 질끈 동인다
그을린 어깨 너머 팍팍한 삶의 무게
덜어내고 또 싣는 한 톤 푸른 용달차
내일은 무등산 한 채 여기 둥실 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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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소년의 저녁 한때
-장 기 숙
불빛 따스해지는 어스름녘이 되면
햄버거집 찾아드는 눈이 깊은 사람들
기름때 찌든 하루를 털썩 내려놓는다
어둠이 고여 있는 구석진 자리에서
잘린 손가락으로 집어드는 마른 빵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별같이 아득하다
충혈된 눈망울에 축축이 젖어드는
이국에 귀가행렬 줄줄이 이어질 때
머나먼 고향의 얼굴 그렁그렁 맺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