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에 관한 여러 모습
1. ‘나이듦’과 관련된 두 개의 작품을 접했다. 하나는 칠레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한 언론인의 나이듦에 관한 다큐 <이터널 메모리>이고, 다른 하나는 ‘안락사’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의 문제를 제기한 단편소설 <자유인>이다. <이터널 메모리> 속에서 노인은 점점 기억을 잃어버리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무너져내리고 있다. 총명하고 예리한 지성을 지녔던 노인은 자신마저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지만, ‘치매’라는 냉정한 침입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앗아가 버린다. 다큐는 노인의 파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옆에서 노인을 돌보는 아내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인생의 후반에 만나서 20여년를 같이 한 여인은 노인을 얼굴을 딱아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들면서 노인을 지킨다. 영화는 상실하는 것과 동반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2. <자유인>은 안락사가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86세가 지나면 강제적으로 안락사를 강요하는 가상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86세가 되면 의사는 소위 ‘ED(Eternal Dream)'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요구한다. 정신적 문제가 없이 동의하면 그는 과학의 힘으로 영원한 꿈 아니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렇게 되면 86세 이후 그는 사회적 보호망에서 팽개쳐버려진다. 사회적 서비스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게 되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일명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3. <이터널 메모리>는 어쩌면 ‘사랑’의 위대함, 아니 동반자가 있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현실이기에 감동의 크기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아내가 희생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동안 누적했던 사랑의 힘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치매 환자를 돌봐야하는 아내의 고통 그리고 간간히 찾아오는 그들 사이의 사랑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듯하다. 현재의 파트너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과 연대의 중요성을, 때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치명적인 위험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나이듦’이란 결국 무너져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담담히 견디어나가는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며 서로에 대한 연민이다. <이터널 메모리>는 그것이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존엄의 상징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4. 하지만 ‘나이듦’은 대부분 절대적 고독 속에서 진행된다. <자유인>은 안락사를 강요하는 분위기 앞에 놓인 노인의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분명 더 오랜 영생을 꿈꾸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연스런 죽음의 희망마저 빼앗가 가는 냉정한 사회적 압력 앞에 그는 절규한다. “이전의 모든 인간들이 죽었던 방식으로, 나도 그런 시간을 누리고 싶다. 기억이 마를 시간, 감각과 감정에 피와 살이 빠질 시간, 주어진 시간을 모두 다 쓰고 싶다. 마지막 한방울까지 다 마시고 텅 빈 병을 던지고 싶다. 육체의 한계를 모두 소진한 뒤 그렇게 죽고 싶다. 이게 그렇게 나쁜가?” 노인의 절규는 분명 죽음을 거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자신의 육체와 정신적 힘으로 버틸 수 있는 기회마저 앗아가는 외부의 힘에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자신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도전이다.
5. 어쩌면 두 개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나이듦’의 다양한 모습 또한 개별적인 능력의 차이에서 벌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한 차이를 줄이기 위해 사회적인 보호망이 필요하다는 점은 당연한 요구이지만 결국 죽음의 질은 ‘개인’적 차원에서 결정된다. 어떤 노인학자는 노후에 필요한 세 가지 자유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하나는 신체적 자유, 둘째는 금전적 자유, 셋째는 정신적 자유이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삶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 <이터널 메모리>는 신체적 자유를 빼앗긴 인간의 무너짐이다. 현재 속에서 설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과거의 기억에 매달리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체적 자유’는 ‘나이듦’에서 가장 중요한 선결요소일 것이다.
6. 하지만 신체적으로 건강할지라도 금전적인 어려움이나 정신적인 무능에 빠져버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살아있는 ‘좀비’처럼 사회적인 불안을 이끌어낼 수 있다. 경제적 자유를 위한 사회적 복지는 공동체의 책임이 더욱 크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노인연금’이나 ‘기초생활수급비’는 이러한 빈곤에서 최소한의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신체적, 금전적 무능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그가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나이듦’을 진행할 수 있을까? 그렇지않다. ‘정신적 자유’가 필요하다. ‘정신적 자유’는 나의 생각과 판단이 자율적인 판단과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 얻어졌을 때 정당한 의미를 갖는다. ‘생각’의 주인이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에는 집단적 광기와 왜곡된 신념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들에게 행운처럼 주어진 신체적 자유와 금전적 자유를 헛된 ‘이데올로기 가치’에 의해 지배당하며 ‘정신적 이그러짐’으로 소모하는 모습은 ‘나이듦’에 대한 고민을 제기한다.
7. ‘나이듦’은 가장 기본적인 상황에서 출발한다. ‘신체적인 자유’라는 조건이다. 이것을 빼앗겼을 때, 삶은 극한의 위험에 봉착한다. 그때의 삶은 오로지 수동적인 모습으로 진행된다. 어떤 상황이든 인간은 각각의 조건에서 자유와 존엄을 선택할 수 있다. <이터널 메모리>와 <자유인>은 최악의 조건 앞에 직면한 인간의 실존적 선택의 과제와 실천적 도전을 제기한다. 또다른 나이듦의 가능성도 있다. 신체적 자유와 최소한의 금전적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인간은 더 큰 자유의 영역을 실천할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러한 행운을 사회적 광기와 집단적 폭력에 소비한다면 ‘나이듦’은 행운을 사회적 악으로 바꾸는 추악한 삶의 단계가 될 것이다. 점점 노인들이 늘어가는 지금, ‘신체적 자유’을 위협받는 사람들의 아픔과 ‘금전적 자유’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더불어 ‘정신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개별적인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노인들로 가득차는 사회는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노인들의 정신적 자유를 향한 ‘나이듦’을 기대해본다.
첫댓글 - <자유인>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 추천작 일본 영화 'Plan 75' 내용과 흡사하다. 또한 <이터널 메모리>는 영화 '아무르'와 '노트북'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의 노인 문제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도 그 한가운데에 있으며 체념 혹은 선택의 순간을 준비해야할지도 모른다.
- 삶의 마지막 존엄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국가나 사회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가족이나 개인의 몫으로 남게 되는데, 나이듦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건강과 판단력,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최소한의 요소로 남는다. 이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