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근현대철학, 현대신학, 현대문화: 절대적 규범의 상실과 삶의 파편화
*<대화와 소통>
첫째로, 하나님과 인간이 모두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할 수 있다. 창세 전 삼위의 위격이 모두 인격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삼위 사이에서는 실질적인 의사소통이 있었다.
하나님은 말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말을 통하여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신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나 히브리어로 자기 뜻을 전달하시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셨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또한, 사울도 하나님이 하시는 히브리 말을 알아듣고 답변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까"(행 26:15). 그러므로 키르케고르 이후에 비이성의 영역으로 넘겨진 신적 대체물(상층부)이 일상의 삶의 세계(하층부)와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에서는 참되고 실질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종교적 진리들뿐만 아니라 역사와 과학의 영역에서까지도 명제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사실들을 말씀하셨다. 한 하나님이 자기 자신, 인간, 역사, 우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이 모든 영역의 지식 - 종교적 지식, 역사적 지식, 과학적 지식 - 사이에는 통일성이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진술과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진술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층부의 특징인 초월적 세계에 관한 지식은 하층부의 특징인 합리성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며, 자연에 대한 인과론적인 과학 탐구는 하나님이 자연에 대하여 기적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자연적인 인과관계의 원리를 가지고 자연 세계 전체를 획일적으로 해명해 버리려는 과학주의(scientism)는 하나님에 대하여 "닫힌 체계"로서 기적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진정한 과학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연현상에 대하여 인과율로 설명하면서도 하나님과 인간이 자연을 재구성할 가능성에 문을 닫지 않는다.
하나님과 세계를 포괄하는 종교, 인간, 우주 등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전달된다. 성경에 나타난 계시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정점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 우주, 인간을 모두 묶는 규범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 규범으로부터 자율적으로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의 규범적 계시로부터 떠나서 자율적으로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의사소통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내용을 전달할 때 의사소통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배경을 언어에 담음으로써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자기 자신에게만 고유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바, 이 고유하고 특별한 의미가 과연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신적인 대체물인 비이성적인 한계체험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쉐퍼는 언어에 전달자의 특수한 배경이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 안에는 외적인 세계와 경험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비록 어떤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참된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완전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정확한 의미전달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상원,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변증》, p.97~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