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19/170424]잡초는 없고 풀꽃도 꽃이다
학생들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
-한국 만 15세 삶의 만족도 OECD 48개국중 47위
동아일보 4월 21일자 사회면 헤드라인(제목)이 자못 자극적이다. 만 15세이면 중학교 2학년, 그들이 세계에서 거의 꼴찌로 해피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21.6%가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75%가 “시험 성적 낮을까봐 걱정”이라는 것이다. 운동을 통해서라도 스트레스를 풀거나 줄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통계마저 아프다. ‘등교 전이나 학교 후에 운동을 한다’고 답한 한국학생은 46.3%에 그쳐 분석대상 56개국중 최하위라고 한다. 삶의 불만족도가 48개국중 47위라니? 우리의 아들딸이고 손자손녀들이 아닌가. 그들이 ‘망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런가하면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헬조선”이라며 ‘3포, 5포세대’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조선일보 4월 24일자 사회면 제목도 눈을 찌른다. “대졸 실업자 처음으로 50만명 넘었다-취업포기 인구도 첫 350만명” 통계청의 ‘1분기 고용동향’ 조사결과란다. 대선후보들의 교육정책 공약들도 춤을 춘다. ‘교육(敎育)’이 어둡다. 교육이 어둡다는 것은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는 말과 결국 같은 말이 아닌가.
최근 모처럼 주말에 조정래 작가의 ‘풀꽃도 꽃이다’ 1, 2권을 통독했다. ‘정글만리’ 1,2,3권 이후 역작(力作)이다. 읽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아팠다. 아니 가슴이 먹먹했다. 청소년, 그 ‘어려운 시기’를 천만다행하게도 우리의 아들들은 ‘무사히’ 통과했지만, 막 자라고 있는 손자에 생각이 미치자 한없이 우울해졌다. 우리 손자가 크는 이 세상도 소설 속의 풍속도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이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 사교육의 폐해야말로 요즘 대선의 이슈가 된 적폐 중의 적폐인 ‘교육적폐’가 아닐까. 작가 조정래 선생도 눈에 넣어도 아플 것같지 않은 손자를 바라보면서 사교육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조 선생은 대하소설 <태백산맥 10권> <아리랑 12권> <한강 10권> 등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의 문호(文豪)’(개인적인 생각이다)가 아닌가. 그분이 오늘날의 교육현실과 사교육시장의 허와 실 그리고 청소년들의 ‘구겨진 각종의 삶’에 대해 돋보기를 들이대었다. 밀착 취재와 치밀한 묘사에 역시 혀를 내두르긴 했지만, 책을 다 읽고난 후 알지 못할 허탈감에 빠졌다. 대작가가 대안으로 제안한 듯한 ‘혁신학교’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았고, 작품의 완성도도 그분의 다른 대작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듯했다. ‘일진회’보다 더 무섭다는 ‘중2’ 아이들이 사용하는 무수한 은어(슬랭)와 속어들의 행진(어쩌면 지금은 모두 사라졌고, 또다른 신조어가 양산되었을)도 읽기가 참 거북했고, 그것들을 적어내려가는 대작가가 안쓰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 노력이 ‘도로(徒勞)’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런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1권보다는 2권이 조금 더 리얼하게 와 닿는 부분이 많았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윤구병 님의 ‘잡초는 없다’라는 책의 제목이 불쑥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은 귀농기(歸農記)이긴 하지만, 농사를 실제로 수년간 지어보니까 잡초는 잡초대로 다 쓸모가 있더라는 ‘고백서’이라 할 수 있다. ‘풀꽃도 꽃이다’도 마찬가지 뜻이리라. 어디 장미꽃만 꽃이랴. 담벼락의 호박꽃도 꽃이고 길가의 이름없는 풀꽃도 꽃이 아니랴, 하는 뜻일 듯. 저마다 고귀한 생명, 생명인 것을. 우리 학생 한 명 한 명이 다 ‘꽃’이고 ‘생명’이지 않은가. 모두 다 자기 집에서는 금쪽같이 예쁘고 귀한 자식들인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들의 굴곡되고 과잉된 애정으로 인하여 정작 그들이 받는 상처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자녀들의 적성을 인정하고 배려하여 그들의 소질을 계발해주는 것이 부모의 몫일진대, 도리어 그들의 목을 쥐고 숨을 막히게 하는 게 부모의 그릇된 ‘애정과 사랑’이 아니던가.
결손가정의 청소년들, 왕따가 되어 허덕허덕 힘겹게 버티어가는 우리의 자녀들, 친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맴도는 우리의 손자들... 등등등등, 우리 중고생들의 복잡다기한 문제들은 언제, 누가,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낱같은 햇빛이라도 비치는 ‘긴 교육터널’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아지 못게라. 어른이 된 죄가 크다. 면목도 없다. 게다가 우리는 3년 전에 '큰 바다'에서 엉뚱하게 더 큰 죄조차 저질렀다. 그 '한(恨)'은 언제 어떻게 풀 것인가. 죄가 구천에 닿았다. 어떻게 속죄를 해야 할 것인가.
첫댓글 울 마늘님이 좋아하는 말인데 잡초도 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