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이 주기적으로 족보에 후손을
새로 등재하는 기간이다.
어떤 착오가 있어 우리 형제들 민원 서류와 대금을 모아
함께 보내야 하는데 그 일을 내가 맡았다.
오늘 송금과 서류 발송을 하는데 한의원 일이 바쁘니
도오씨가 짜증을 내며 왜 이런 일을 맡아 가지고 이렇게
귀찮게 일을 벌이느냐고 한다.
다른 형님들이 해야 할 일을 막내인 내가
맡아서 하는 데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형제들 중 누군가가 해야 될 일이니 내가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하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언짢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갔다.
그런데 언짢은 마음이 깨끗이 사라지지 않고
한 가닥 여운이 계속해서 자리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왜 이럴까?
한참을 지내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일상수행의 요법 1조에 대조를 하기 시작했다.
'경계가 오기 전에는
원� 언짢은 마음(요란함)이 없었지 않은가.'
'그리고 경계를 따라 언짢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정상적인 진리의 작용이 아닌가.'
이렇게 대조를 하자 과연 효과가 확실하게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오씨의 입장도 분명히 보게 되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간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대중만 잡아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도오씨에 대한 못마땅한 분별성을 털지 못한 채
대중을 잡는다고 하였으니
대중만 잡아 가질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법대로 공식대로 순서에 따라 대조를 하자
비로소 원래 요란함이 없는 진공 자리가 챙겨져
분별성이 완전히 털어져 나가게 되었고,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언짢은 마음만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저절로 일은 해결이 된 것이다.
앞으로는 반드시 일상 수행의 요법 순서대로 대조를 한 후에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가도록
공부를 해야 되겠다.
왜냐하면 잘못하다간 분별성이 털어지지 않은 채
모르고 속을 수도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