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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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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충의 지조의 시 스크랩 68. 서시 / 윤동주
은하수 추천 0 조회 10 13.07.15 07: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8. 서시 / 윤동주

 

 

 

 

 

 

 

 

 

<서시 원문>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원문에는 이 시의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그러나 윤동주 육필원고에는 '서시(序詩)'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고,

운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증언한 바 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서시라는 제목으로 부른다.

 

 

 

 

 

 

윤동주 시인 연보

1917년(1세) : 12월 30일에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 모친 김용(金龍, 1891~1948)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본관 : 파평. 아명 : 해환(海煥).

                      윤동주의 호적을 비롯한 각종 공식 기록에 그의 출생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1924년(8세) : 12월, 누이 혜원(惠媛, 아명 貴女) 출생.

1925년(9세) :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

1927년(11세) : 12월, 동생 일주(一柱, 아명 달환) 출생.

1928년(12세) :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을 정기구독 시작.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듬.

1931년(15세) : 3월 20일, 명동 소학교 졸업.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대랍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
                       이 해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

1932년(16세) : 4월, 용정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 부친 인쇄소 차렸으나 사업이 부진하다.

1933년(17세) : 4월, 동생 광주(光柱) 태어나다.

1934년(18세) : 12월 24일, 최초의 작품인 시 3편(초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을 제작 기일 명기하여 보관 시작.

1935년(19세) :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다음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 편입)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 간행의 학우지 『숭실활천』 제 15호에 시 「공상」 게재, 최초로 작품 활자화되다.

1936년(20세) : 3월,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퇴.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문익환은 5학년에 편입.)

1937년(21세) : 8월, 백석 시집 『사슴』을 배껴 필사본을 만들어 가지다. 이 무렵 광명중학교 농구선수로 활약.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과 심하게 대립, 결국 조부의 개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연전 문과>로 진학 결정.

1938년(22세) :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4월 9일, 서울 연전 문과 입학.

                       연전 기숙사 3층 지붕 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인이 한방을 쓰면서 연전생활 시작

1939년(23세) : 기숙사를 나와서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 북아현동에서 살 때,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을 방문,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 「아우의 인상화」를 尹東柱 및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 

                      동시 「산울림」을 『少年』에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


1940년(24세) :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다. 하동 출신 정병욱(1922~1982)과 깊이 사귀다.

                       1939년 9월 이후 절필하다가 이해 12월에 가서 3편의 시(八福, 慰勞, 病院)을 씀.

1941년(25세) :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집 옮기다.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전 4년을 졸업하다.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음)


1942년(26세) : 연전 졸업 후 한달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부친이 일본 유학을 권한다.

                       도일수속을 위해 1월 19일에 연전에 <平沼東柱>라고 창씨한 이름을 계출하다.

                       1월 24일에 쓴 시 「懺悔錄」이 고국에서 마지막 작품이 되다.
                       4월 2일,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10월 1일,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

1943년(27세) : 7월 10일, 송몽규 특고경찰에 의해 경도 하압경찰서에 독립운동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윤동주, 고희욱도 검거되다.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검찰국에 송국되다.

1944년(28세) :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 제2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2년(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을 선고

                       (확정: 1944년 4월 1일, 출감예정일 1945년 11월 30일).
                       이들은 판결 확정 뒤에 복강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 시작.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1945(29세) :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복강형무소 안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
                    2월 18일, 북간도의 고향집에 사망통지 전보 도착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가져오려고 도일, 복강 형무소에 도착

                    하여 먼저 송몽규를 면회.(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동주가 그래서 죽었다는 증언을 듣다.)
                    3월 6일,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
                    3월 7일, 복강형무소에서 송몽규 눈을 뜬 채 운명. .

1947년 : 2월 13일, 유작 「쉽게 씌어진 詩」가 당시 주간이던 시인 정지용의 소개문을 붙여 『경향신문』 지상에 발표됨.
              2월 16일, 서울 <플라워 회관>에서 첫 추도회 거행.

1948년 : 1월, 유고 31편을 모아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여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

1955년 : 2월, 서거 10주년 기념으로 유고를 더 보충한 증보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정음사에서 출간.

 
1985년 :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조도전대학의 대촌익부(大村益夫) 교수에 의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와 비석의 존재가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되다.

1990년 :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4월 5일에 북간도의 유지들이 명동 장재촌에 있던 송몽규의 묘를 용정 윤동주 묘소 근처로 이장.

1995년 :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송몽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애국장은 독립장보다 한 등급 아래 훈장이다.)

1998년 :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다.

             현재 윤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들은 3백 편을 상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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