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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양천의 향교와 겸제 정선의 그림 속으로
양천 향교와 정선의 그림과 허준이 탄생한 강서구를 찾아볼까요. 오늘은 어렵사리 시간을 할애 하신 선생님들과 함께한 시간 여행이었고,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던 알찬 하루였던 것 같다. 전국 234개의 향교 중 유일하게 서울에 남아있는 문화재이다.
우선 양천 이라는 명칭이 자주 등장 하는데 양천구로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양천이란 이름을 집고 넘어가 볼까요. 양천은 강서구 가양동 239번지 일대 입니다만 그 옛날 양천 현이 있었던 곳이 엇기에 양천이 자주 등장 하므로 오해 없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시작 하고자 합니다. 양천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주위에 안양천이 흐르니 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다른 하천이 있어서 양천일 것으로 생각 하고 찾아보니 동쪽은 안양천이요 서쪽은 굴포 천이라 바로 경인 운하를 계획한 하천이 있었다. 그리고 볓양(陽)에 그 뜻이 있었다. 따사로운, 부드러운 햇빛이 흐르는 하천이란 의미로 살기 좋은 터전이란 의미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양천 허씨가 탄생한 허가 바위와 공암 나루라는 옛 지명 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바위 안쪽으로 작은 암자는 아늑한 모습으로 비어 있어서 그 옛날 석기시대 사람들이 자리 잡기에 좋았으리라 석기시대 유물도 있었다고 오덕만 선생님께서는 말씀 하신다.
앞으로도 강서 양천 지역과 김포 지역은 발전 가능성이 풍부한 지역이다.
이런 이름들처럼 한강변을 따라 유적과 유물이 줄을 이엇고, 지극히 살만한 지역 이엇음을 말하고 있었다. 흥원사 조계종 사찰이 티벳 라마교의 외형을 살린 건물 양식에서 외래의 수양 정신조차도 받들겠다는 뜻으로 연상 되며 외적으로 개방된 절의 모습이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있었다. 흥원사 앞으로 양천 현 관아가 있었음을 표지 석은 전하고 있었다.
없어진 양천 현을 정선의 그림에서 추정 해 볼 뿐이다. 지역 유래를 살펴 볼 것 같으면 삼국 시대에는 재차파현(인천 앞바다에서 밀려온 밀물이 파도를 형성 한다는 의미) 통일 신라 시대에는 공암 현(석기 시대 유적으로 알려진 동굴 바위에서 그 유래를 가늠 해 본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양천 현으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뒷 동산의 정자는 소악루로 불린 것처럼 절경을 이루었던 것이다. 또한 궁산을 파산, 성산, 관산 이라고도 하였으며 주위의 탑산과 개화산이 어우러져 한강과 어울리니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지 않은가?
그래서 정선은 이곳을 배경한 그림을 많이 남겼으리라.
향교에 이르고서 나 자신을 뒤 돌아 보게 한다. 정장은 하였는가? 경솔한 마음 가짐은 아닌가? 산행의 가벼운 옷차림 모습이 결례가 되지 않았을까? 향교 측에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 하려합니다.
향교에는 누구나 오리 밖에서 부터 말을 내려 자신을 낮추고, 경배 하는 마음으로 접근 하라는 하마비가 서 있었고, 하마비 주위 마을은 하마비 마을 또는 하마 마을로도 불리어 졌었다. 향교 정문 외삼문 앞에 이르니 홍살문이 이곳은 신성한 장소이니 함불어 범접 하지 말라고 버티고 서 있다. 홍살문이나 외삼문, 내삼문 모두 우리의 삼신 사상의 대표 문양인 삼태극의 문양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의 전통 사상과 접목하기 위한 필연이 아니었을까 짐작 할 따름이다. 불교가 삼신당을 지어 하나씩 하나씩 자리 잡아 왔던 것처럼---
양천 향교 (서울시 문화재 제 8호로 지정 1990)
양천 현 홀기 (서울시 문화재 제44호 지정 2009):양천 관내 제반 제사 진행 요령을 기록
태조 11년 (1411년) 유학을 토대로 한 교육 기관이 건립 되었고, 대성전엔 공자와 중국과 한국의 성현 27현의 위패를 모시고 석전대제를 올리며, 지방 수령이 올렸으나 지금은 강서 구청장이 초헌관으로 올린다고 한다.
구한말 1894년 과거 제도가 폐지되므로 기능은 상실되고, 문묘는 이름만 남았으며, 건물과 문묘제도 모두 사라 졌었으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교궁이 중수되고 1981년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향교는 어떤 곳인가 알아보고 오늘날 교육 제도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알아보자.
교육 내용은 4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 5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으로 현대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수렴하기에는 미흡한 것 같다. 또한 양반 제도와 같은 동제와 서제가 있어서 우수한 인재의 길을 막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향교를 비롯한 몇몇 장소는 성스러운 장소로 지목되어 하마비와 홍살문이 세워 졌었다. 이러한 장소 에서는 걷는 방법도 조심하라는 뜻에서 송파구에서 우측 보행을 실시했던 것처럼 우측 보행이 일반적인 관례 였음을 향교 지킴이 선생님의 설명이 있었다. 즉 동문으로 들어오고 서문으로 나가는 이치가 그렇다고 설명 하신다. 향교도 지역이나 위치에 따라 오늘날 종합 대학교, 대학, 전문 대학, 전문 교육기관 등으로 분리 되어, 부, 목, 군, 현에 1교씩 두어 설립 되었다. 부 목에는 유생이 90명, 도호부에는 70인, 군에는 50인, 현에 30인으로 제한 하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배출된 유생이 1차 과거에 합격 하게 되면 생원 진사 칭호를 받게 되고 성균관에 가게 되는데 이것이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가는 과정이고 다시 문과 시험(행정 고시)에 응시하여 고급관리가 되는 것이다. 교육부가 교육을 관장 했다면 수령과 관찰사가 주도 했던 것이다. 석전대제는 문묘와 공부자 성현에 제향하며 춘추 길일을 택해 악과 금관 제복으로생패제례(익히지 않은 음식)을 현설 하고, 음악, 춤과 함께 행해지므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에 불을 사용하기 이전의 인류의 먼조상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한 것 같다. 제상에 올리는 방법도 조율이시 과채적탕의 순서를 보아도 인류 진화 과정과 어쩌면 그렇게도 똑 같을까? 인류가 처음에는 과일이나 열매로 연명 했으리 그리고 채소를 재배하는 법을 알아 농경이 시작되고 환경이 열악 해 지자 동물을 채취 익혀먹고, 그릇이 발명되어 끓여 먹는 과정을 이어 왔으리라, 과채적탕의 순서가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을수가 있을까, 조율이시의 순서는 동이족이 임금을 선두로 신하 들을 이끌고 살기 좋은 해가 뜨는 고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연상 시킨다. 음식이 갖는 의미가 우리 조상의 역사성과 너무도 흡사하다.그래서 공자도 동이족이라 했던가?
분 향 례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대성전 성현께 향을 올리는 순서며, 15일간 있었던 대 소 사를 알리는 고유제도 겸 하였다. 제사의 의미는 조선 왕조 실록 세종 조에서 간략하게 정리 해 놓고 있다. 제는 제단을 의미하며 땅 신에게 드리는 예이며, 사는 하늘에 드리는 예이며, 분향은 조상이나 살아있는 인신께 하는 존숭하는 경건한 의미다. 여기 우리나라 성현 중 설총, 최치원이 포함 된 것은 잘못 되엇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다. 그 두 분은 고유한 우리의 전통을 고집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분이기 때문이다. 양천 성현 중에 허준 선생과 겸제 정선이 추가 되엇다면 얼마나 숭고한 뜻을 더할까 생각 하며 향교를 나선다.
향교를 나서며
공자(B.C552-B.C479)가 생각 했던 유토피아를 감히 소인이 알수 있으랴마는 공자의 말씀 중 실 생활에 도움될 몇 말씀만 들어보고 가자. 공자는 실 생활에서 생의 의미를 찾고자 여러나라를 찾아다닌 나그네 였으며, 하루를 어떻게 사는 것이 훌륭한 삶인가 묻고 있었다.
윗 어른을 공경하고 후인들에 존경 받을 수 있고 무탈한 하루가 있으면 족하다 하였으며.
살아가는 지혜 중에
도둑을 맞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 건강 하시고 행복이 넘치는 삶이 같이 하시길 빌면서 공자님 말씀 중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향교 뒷산으로 오르니 예가 궁산 근린공원 이라네
양천 고 성지는 풀 밭에 업듸려 있고
무심한 저 강물은 저만치 홀로 흐르네
권율 장군이 머물다 결전 장소로 강 건너 행주산성으로 이동 하여서 행주대첩을 맞으며 임진왜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아마도 양천 고성은 결전 장소로 부족한 점이 있었으리라 부족한 점이 무엇이었을까 가늠해 보네---
백제시대 풍납 토성과 아차 산성이 그랳던 것처럼 이곳도 양천 고성과 행주 산성이 같은 역활을 하였으리라. 산에 오르니 산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동 서로 펼쳐지고 선유도(지금은 없어 졌지만)가 물위에 떠있고 산마다 어우러지니 절경이로다. 시인은 붓을 들고 화공은 화판을 펼치며 음율 가락으로 추임새를 대신 하였으리라. 그래서 겸제 선생은 65세 때 양천 현감으로 오면서 경교 명승첩과 양천 팔경첩을 67세 현령 3년 째에는 한강을 중심한 연강 임술첩을 남겼다. 이러한 작품 활동은 정선의 소악루, 소악 후월등 그림으로 짐작 할 때 소악루는 강서구 가양동 산6-4(세숫대 바위)근처로 추정되나 1994년 현 위치로 신축 하였다. 어쨌든 겸제가 자주 찾았던 장소였음을 부인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곳엔 정선의 그림 두점이 현장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었다.
성황사 (城隍祠)
성황사의 신은 여신으로 도당 할머니로 모시고 이곳 주민의 터줏 할머니 혹은 보호 신으로 여겼으며 이곳에 아직도 건재한 것도 할머니의 영험한 음덕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도당 할머니가 불럿는지 임진왜란 전후를 풍미했던 황진이도 이곳을 다녀가면서 글을 남겼네, 아니면 양천 현령의 부름이 있어서 왔을까?
옛 산 봉우리 험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
강물은 밀물을 만나 띠를 띄웠네
산위 성터는 무너지고
신령님 기리는 기원 속에는
연년 세세 도당굿으로 이어 졌네
이 글은 필자가 나름대로 해석 해 적어본 글이니 오해 없으시기를---.
황진이가 나이 들어서 이곳을 돌아보고 글을 남겼으리라.
이 글 내용으로 볼 때 산세가 험 했으리라 짐작 되는데 6.25때 미군이 도강하면서 아마도 포대를 조성하기 위해 산을 깍으며 성황사가 헐릴 위기를 맞았으나 주민의 반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랳는지 이곳월남 파병 장정 모두 무탈하게 돌아오고 한명은 탈영으로 행불이지만 그러면 궁산 자락에 자리 잡은 겸제 정선 기념관으로 가볼까요.
겸제 정선 기념관 (1676-1759)
기념관 계단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걷기가 조심 스러움은 정선의 그림을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뜻으로 비쳐진다. 발 뒷꿈치에 유리라도 다칠까 조심 스러움이여---
전시 마당의 첫째 마당은 겸제의 대표적인 정선이 세상에 예술성을 내 비친 금강산의 4계로 사계의 숨 소리와 음악을 느끼며(음악도 한국적인 음악이 곁 들여 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며) 둘째 마당으로 향하니 정선이 살아온 내력과 환경이 이어지며, 셋째 마당으로 정선이 그림으로 빛을 보이기 시작한 30대 후반 이야기로 35세에 금강산을 여행 하면서 풍악도첩 산수를 남겼고 백악 전신첩으로 젊음의 패기를 그렸다. 그림의 발전상을 보면 30대의 후반의 패기 넘치는 시기로부터 40-60대는 안정감이 있었다면, 60-70대에는 편안한 원숙 경지로, 70-80대는 추상과 상상을 자유자재로 묘사한 겸제의 정신 세계를 엿보게 한다.
그림을 좋아 하시는 분 이라면 꼭 보여드리고 싶은 곳 그곳이 겸제 정선 기념관이라네!
공 암 나루를 찾으니 물위에 떠 있는 삼봉은 누가 여기다 도담 삼봉을 갖다 놓앗나---
주위의 모습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 웠으리라, 공암 나루는 구암 공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암 나루에 떠 있는 광주 바위는 광제 바위로도 불리는데 이름처럼 널리 구제하고 이롭게 하는 지역으로 광주 바위 전설을 떠올려 본다. 이곳이야 말로 천혜의 군사적 전략지 임을 알 수 있다. 수군을 감출 수 있는 지역으로 하류로 접근하는 적군을 대처 하기에 좋은 장소로 또 있을까 싶다. 공암 나루는 백제가 하남 위례성을 지키는 전초 기지로, 또 한강 물줄기를 장악하는 중요한 지점 이었으리라, 공암 나루하면 곰나루를 연상 시키지 않는가?
구암 공원에는 의성 허준이 환자를 돌보는 모습이 공원을 지키고---
구암 허준 (1539-1615)
허론의 서자로 태어나 젊은 시절은 호남 지방에서 의술활동을 하였다. 이때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도 나오고, 미암의 추천으로 내의원에 근무하게 되며 세상에 허준을 알리게 된 동기가 된다. 63세에 언해 두창집요, 구급방, 태산 집요를 저술 72세에 동의 보감을 출간 후세에 남기고 있다. 허준은 선조 때 내의로 되어 왕실 진료의 공을 세웠고 찬도 방백론 맥결 집성을 출간 후학의 길잡이가 되었다. 동의 보감은 2009녀 7월에 유네스코 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 하였다.
허가바위 (가양동26-28 영등포 공고 정문 앞)
굴의 안쪽 넓이가 6메타 2메타 정도로 10여 명이 생활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허준의 조상으로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이 태어 났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허가 바위라고 하며, 바위 안쪽이 비어 있다하여 공암이라 한다. 석기 시대 선인들의 생활과 정선의 허가바위 그림을 떠 올려 보면서 역사의 그림 속으로 같이하신 선생님들께 감사 하면서 현실 세계로 버스에 오른다.
첫댓글 탐방길에 하나도 허투루 대하지 않으시고 교감을 하셨을 선생님을 생각하니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글을 읽다보니 어쩌면 그리 정리가 잘 되는지요. 잘 보았습니다.
하루를 보아도 벅찬 일정을 4-5시간에 소화하시느라고 고생 하셨을 선생님들께 경의를 표하며 댓글 감사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